19361212일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Chiang Kai-shek)가 시안(Xian)에서 자신의 휘하 병력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다.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의 체포를 주도한 이는 바로 만주 지역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쉐량 즉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구금한 장학량이 그에게 요구한 것의 핵심은 바로 이거였다. 바로 일본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해서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1920년대 중국은 손문의 주도아래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장은 1925년 손문의 사망과 더불어 장제스가 반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결렬됐다. 당시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대립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제스를 주축으로 한 우파가 공산당의 출출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 배제를 요구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국민당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19263월에 일어났다. 그 사건이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중산함의 회항을 공산당의 반란음모로 규정하고 광주(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휘관 이지룡을 체포한 뒤 보로딘을 비롯한 18명이 소련 고문단 철수를 요구했었다.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장제스 정권의 공산당 탄압은 1927년에 들어 극심해졌다. 217일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는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를 점령했고, 공산당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러자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상하이 함락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개시했는데, 이후 장제스는 4.12 쿠데타를 획책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및 학살을 자행했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 이후 3주 동안 최소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을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홍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홍군 근거지를 건설하고 정강산에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정강산 투쟁이었다.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 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 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선 장제스는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10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다. 당연히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홍군은 다두허 도하 작전이라는 역사적인 기적을 창조해냈다. 이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와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추격과 군사적 압박은 지속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전선전략이 강조됨에 따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항일투쟁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당에게도 항일연합전선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민당은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361212일 이른바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는 신속히 진행되어 그날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국민당 측의 동북군과 서북군은 시안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다가 기습을 당한 남의사 병력은 무장해제당한 뒤 체포되었으며, 참모부 요원 전원은 시안 영빈관 숙소에서 포위당해 사실상 구금 상태에 놓였다. 경찰국장 사오리쯔가 사로잡혔으며, 이에따라 시안 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난징 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 억류당했다. 장제스를 체포하는 과정에선 양측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장제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장제스는 체포됐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만주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체포한 군인들은 장제스에게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장학량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 즉 앞에서 언급한 8개 항목에 대한 발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하여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그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장제스가 제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가운데, 그는 이른바 북벌도 진행했다. 쉽게 말해 중국 내에서 군벌전쟁도 벌인 것이다. 장제스 북벌에 대한 맞대응으로 일본은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작림 폭살 사건을 획책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이후엔 이른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투를 치렀는데, 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물론 국민당군이 일본에 맞서 항일전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규모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능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오쩌둥>전기 저자 필립 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32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는 공산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치욕적인 양보를 거듭했다. 즉 이런 부분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해 부끄러운 무저항 정책을 추친하며 중국의 국가이익을 팔아넘기고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장작림의 아들이었다.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1931년 만주사변 과정에서 굴욕적인 양보를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이행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시각에선 합리적으로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물론 장학량은 대략 6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슷한 시기 1937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난징에선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으로 단결한 중국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세월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중국 전선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2차 국공합작은 형식적인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신뢰관계는 1941년 신사군 사건을 계기로 완벽히 무너졌다. 당연히 여기에서 가장 큰 책임은 국민당에게 있었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1992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1999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현대 중국사 (), 이매뉴얼 C. Y. , 서정희(), 까치, 2013

 

중국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 홍수원 안양노 신흥범(), 두레, 2013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2015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1,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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