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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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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냉전(Cold War)1990년에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며 끝났다고 한다. 1991년 구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전 세계 패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 있는데, 소말리아 침공이나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및 코소보 내전 개입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은 세계 패권국가로서 막강한 무력을 타국을 침공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했었다. 그러던 2000년대 미국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한 국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었고, 1989년에는 중국 내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 반체제 세력이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일이 생겼었다. 소위 천안문 항쟁이라 불리는 이 집회는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이 탱크와 군대를 동원함에 따라 잔혹하게 진압됐다. 당시 서방언론은 천안문 시위에 대해, ‘중국의 민주화라는 구호로 미화했으나, 사실 천안문 시위에는 적잖은 마오주의자들 그러니까 중국의 수정주의화 내지는 자본주의화에 반발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물론 서방이 홍보했던 중국의 서방식 민주주의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향을 선택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는 성장세를 달렸고, 2000년대에 들어서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중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성장세를 달렸다. 중국은 1인당 GDP2010년대 후반에 1만 달러를 돌파했다. 더 나아가 중국은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대외팽창 그러니까 미국의 아시아 대중국라인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몇몇 이들인 현재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New Cold War)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신냉전이라는 표현이 어떤 면에선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경제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반면, 현재 미국과 중국은 좋든 싫든 때기 힘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이러한 시각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영화 강철비2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분쟁을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의 첫 시작은 센카쿠 열도(중국 댜오위다오)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대립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 운명에 휩쓸리게 되며, 남북 평화회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20세기 들어서 전쟁을 치렀던 적이 있다. 그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박태균 교수가 감수한 책 <1950 미중전쟁>은 현재 미중분쟁의 기원을 1950년 한국전쟁에서 찾고 있다. 책은 1946년 미국이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스폰지밥의 고향으로 유명한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냉전 초기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과 반공주의적인 대소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며, 1950년 한국전쟁을 얘기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치른 전투를 심도 있게 설명한 뒤, 중국과 미국이 또 다시 대립했던 베트남 전쟁과 1972년 데탕트를 얘기하며, 마지막으로 미중분쟁이 현재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초기에는 남북한의 내전의 성격을 띄었다가 중국이 참전하면서 사실상 국제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적으로 부딪히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냉전이라는 분쟁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는 분쟁은 반식민주의 대 제국주의라는 대립의 성격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1950년 미국의 전략은 특히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후 미국에 맞선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1950년에 정점을 찍었다. 사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미국의 반공 전략은 소련 핵개발의 영향과 더불어 전면적인 수정을 거쳤는데,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술적인 면에서도 변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진하지 않고 단순히 남베트남을 지키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던 점은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진의 실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호치민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면전인 남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50만의 미군을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뜨린 것도 한국전쟁의 교훈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비록 교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인 부분에서 적이었다. 그러나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만나면서 데탕트가 시작됐는데, 이러한 미중 데탕트는 미국의 대소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2000년대에 강대국이 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그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쟁의 기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 빈말은 아니다.

 

<1950 미중전쟁>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3부작짜리 다큐멘터리다. 즉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감수는 한국 현대사 전공자인 박태균 교수가 감수했다.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학자의 검증을 받았다. 현재의 미중분쟁은 한국 내의 갈등도 초래하는 것 같다. 일부는 중국을 매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일부는 중국과의 협력을 주장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길을 선택할 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몫이다. 책에서 주장하듯이 분명한 것은 단순히 적대적인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미중분쟁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중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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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중국관행 연구총서 18
후루타 모토오 지음, 이정희 옮김, 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기획 / 학고방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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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여행가면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와 동상, 사진, 공산당 측의 선전 포스터 등을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80노인이 되기까지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인민들 대다수가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196992일에 79세의 나이로 서거한 그는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깊은 존경의 대상이다.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그를 조국 베트남의 국부로 생각하고 있고,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비록 호치민의 유언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지만, 1945년 그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바딘광장에는 호치민묘(Ho Chi Minh Mausoleum)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비판을 피하기는 다소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그만큼 잊고 싶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현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문제와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레닌이나 호치민묘에 대한 찬반과는 별개로 나 또한 러시아와 베트남 여행을 갔을 당시 레닌묘와 호치민묘를 관람했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고개 숙여 진심으로 인사드렸을 뿐이었다.

 

호치민은 20세기 세계사와 혁명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침략행위와 잔학성에 맞서 투쟁하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서방사회에 크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 ! 호치민! ! ! 체게바라!”를 외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호치민은 이른바 68혁명(68 Revolution)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호치민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학자이자, 베트남국가대학 하노이교 일월대학 총장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1996년에 집필한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소위 호치민 사후 그를 계승한 후계자들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의 사상을 계승했고, 이것을 도이모이라는 과정에서 해냈는지를 분석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궁금증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현재 도이모이 과정에서 태어난 베트남 세대들에게 어떻게 해서 좋게 인식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경우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은 중국 내부에서도 결코 약하지 않다.

 

그에 반해 호치민에 대한 국민적 비판은 사실상 없는 수준에 가깝다. 굳이 찾자면 호치민을 강력하게 비판(사실상 근거 없는 비난에 가까운)하는 존재는 베트남 전쟁 이후 배를 타고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이들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망명자들이 하는 호치민에 대한 비판은 건전한 비판이 아닌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리고 목적이라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호치민을 비난하는 이유는 패망한 남베트남에 대한 영혼 없는 옹호를 하기 위한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호치민 비난 및 조롱은 신념화된 뒤틀린 반공주의적 말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쿠바의 반카스트로주의자들이 쿠바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호치민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드는 사례를 굳이 뽑자면 토지개혁(Land Reform)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였던 1953년부터 베트민은 토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근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소 억울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략 2,500명에서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에 협력했던 지주들이나, 혁명투쟁 가담자들도 있었다. 즉 이런 부분에 대해 호치민의 실책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호치민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호치민은 당 내에서 강도 높은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행했다. 또한 토지개혁 책임자였던 쯔엉찐(Trường Chinh) 해임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재산도 일정부분 돌려받는 조치가 베트남에서 실행됐다. 또한 호치민과 공산당이 실행한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이 토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계층들이 혜택을 보았고, 더 이상의 토지문제가 최소한 북부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되어 적어도 미국의 살인적인 폭격이전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오히려 토지개혁을 통해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인격적인 측면에서 지도자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자질은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 당시 호치민이 했던 발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민주가 빠져 있어서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적고, 현실을 보는 것이 적었다. 이렇게 폭풍이 불고 있는 때 나는 책임 질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중앙위원은 이처럼 타인의 의견을 듣고 현실을 직시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159

 

전반적인 그의 인생사를 따져 보았을 때,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호감이 생기는 인물이다. 그의 인품이나 부패하지 않은 청렴함 그리고 혁명투사로서의 이미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고, 나 또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호치민을 존경한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며, 호치민의 인생을 통해 그의 감동적인 삶이 다시 한 번 깊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길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호치민이 성취한 것에 있다.

 

호치민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베트남 전국을 단기간에 장악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다. 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미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침략자들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호치민이라는 혁명가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한편, 우리 역사에는 그 정도로 승리한 독립운동사가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호치민의 또 다른 매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의 행보에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었다. 버마의 아웅산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이들도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알고 이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한 시점부터 항불항일투쟁을 외치며 전개했다. 19415월에 그가 창설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도 항불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1955년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호치민은 상당히 현명한 지도자였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이 그를 얼만큼 잘 계승했는지는 많은 논쟁과 논란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베트남은 많이 어려웠다. 이들의 반미투쟁은 혁명사적인 입장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 거기다 1978년 캄보디아 폴포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산되어 베트남은 미국과 손을잡은 캄보디아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캄보디아에 대다수의 병력을 진격시켜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킨 것은 분명히 올바른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거기다 통일 이후 공산당 정책에 대한 남부인민의 반발도 심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1986쇄신이라고 하는 정책을 발표했고, 그것이 바로 도이모이(Đổi mới)였다.

 

도이모이 정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국제적인 고립을 타개하며,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과거 소련 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앉게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문제는 과거보다 더 증가했고, 과거에 미약하지만 유지했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 시스템이 붕괴됐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회 내부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베트남은 호치민 사상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현명하게도 베트남 공산당은 현재도 자아비판과 당내의 민주주의만큼은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점은 1970,80년대 한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만큼은 나는 베트남이 호치민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25년 전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쓴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현재 베트남 사회에서 호치민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한편, 이 책에 대한 인기도 결코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서문에 나온 설명과 같이, 역사학계는 호치민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2018년에 공개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다. 이 문서를 통해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깊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최신의 연구를 담지 못했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을 통해 호치민 사상이 어떻게 베트남에서 수용되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호치민의 사상과 정신을 통해 앞으로 베트남이 어떻게 나아갈지는 베트남에게 달렸을 것이다. 나 또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좋은 방향으로 갈거라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과 거의 비슷한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필자는 호찌민을 인류사적 시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위인이라고 단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지만, 호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수였다는 것은 호가 베트남을 탄생하게 한 민족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찌민 주석은 영원히 우리들의 사업 속에 살아있다.’ 이 말은베트남 공산당 만세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만세라는 말보다도 베트남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이다. 호찌민의 평가가 베트남의 발자취와 한 몸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 말이 베트남인들의 사상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를 향해 확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 바꿔 말하면 호찌민의 이름에 의해 호찌민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방향이 생성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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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 제2차 세계대전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얘거의 신화 KODEF 안보총서 4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지음, 이동훈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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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전쟁 초기 전쟁터에서 맹활약을 떨쳤던 부대들이 있었다. 특히 육군의 탱크부대나 루프트바페와 같은 공군 그리고 나치 독일 전쟁범죄의 대명사인 SS등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팔쉬름 야거라 불리던 공군 소속의 공수부대 또한 존재했다. 역사상 공수부대를 만든 주체는 1930년대 소련이었지만, 공수부대를 실전에 투입한 주체는 바로 나치 독일이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서유럽으로 진격했는데, 이때 아르덴 숲 돌파를 포함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점령에 있어 팔쉬름 야거라 불리던 독일 공수부대의 활약이 컸다. 이 시기 독일의 공수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투입이 생각보다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는데, 이는 1941년 그리스 침공에서였다. 특히 그리스령 크레타 섬 점령에서 독일은 막대한 손실을 냈고, 이는 히틀러가 더 이상 대규모의 공수작전을 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됐다.

 

소련 침공 이후 독일 공수부대는 동부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부터는 단순히 보병 부대로 활용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대규모의 공수작전은 없었다. 이는 미영 연합군을 상대로 했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1943년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이들은 거의 2년 동안 연합국의 발목을 이탈리아에 잡아놓기도 했는데, 이 이탈리아 전선은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특히 몬테카시노 전투는 공수부대의 저항으로 서방 연합군은 극심한 사상자가 속출했었다. 그 외에도 일부 병력이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구출이나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파르티잔 지도자 티토를 생포하기 위한 작전에도 투입됐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부전선에도 투입됐고, 동부전선에 투입된 이들은 베를린 전투까지 참가했다. 책에 따르면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일부 SS출신 공수부대원들은 소련군에게 체포되면 처형될 거라 생각하여, 일부러 영미 연합군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나치독일 공수부대가 어떻게 전투에서 활약했는지를 다룬 책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독일군 미화라고 표현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주로 계급과 병사들의 군장비 그리고 무기와 훈장 및 계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으며, 책에 나온 사진들 대부분은 그러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공수부대를 전선에 활용한 주체는 독일이었지만,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공수부대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한 주체는 미국과 영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2001년 미국 HBO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 잘 나온다. 결국 나중에 이 부대를 활용한 이가 승리했고, 전쟁 초기에 활용했던 이는 전쟁의 패배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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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정책은 소련에 맞선 반공주의(Anti-Communism) 정책이었다이런 미국의 반공주의적 정책에 가장 잘 맞아떨어졌던 아시아의 두 인물이 있었는데하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이고다른 하나는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이 둘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써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고국제정치 속에서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정권이 무너졌다.

 

이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아주 강력한 협력자였으며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사례이기도 했다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대한민국의 우남 이승만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은 상당히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이처럼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정치적인 측면이나 개인 성향 그리고 살아온 생애 또한 상당히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다른 점도 있는데대표적으로 종교탄압 부분일 것이다따라서 오늘은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아시아의 극단적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이들을 한번 비교해볼까 한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 이후 이른바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에서 초기 개화운동을 시작했고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거기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 인물이었다이승만은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서 살았다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었지만독립운동 부분에 있어서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따라서 1919년 미국에서의 명성을 토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있었지만본인이 일으킨 분열과 공금횡령 등의 문제로 결국 1925년에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까지 미국에 있었고더글라스 맥아더와 존 리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환영속에서 귀국했다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여운형과 같은 중도좌파적 통일 세력을 짓밟았으며좌파세력들을 탄압했고, 1948년 유엔의 주도로 이어진 투표로 대통령이 됐다그러나 친일청산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기에그는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도자로서 보이지 말아야할 행위를 했다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이른바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북진통일론은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 구호였다대통령 하야 이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에 90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은 190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꽝빈성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다가 식민지 관료의 삶을 걸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하는 짓을 했기에민족반역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도 힘드나그 이후에는 바오다이 내각에 반발하여 결국 이승만식의 약식 독립운동을 진행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그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는 실책을 범했고결국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하다 반발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다. 1945년 호치민이 주도한 8월 혁명 이후에는 인민전선 원리에 따라 베트민 정부의 협력을 호치민으로부터 제안받기도 했으나이를 거부했다.

 

다만 1945년 8월 혁명에서 민족반역자였던 친형이 베트민에게 살해당했기에이미 뼈속까지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으며프랑스가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에는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 거주했으며거기서 반공주의적이며 메시아적이고 망상적인 의무감 즉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 허무맹랑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러나 미국 생활을 통해 지원자를 확보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이 분단되자 바오다이 내각의 총리로 임명됐다여기서 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바오다이와 빈쑤옌호아하오까오다이 그리고 베트남국민당 등과 같은 세력들을 박살내고, 1955년 부정투표를 통해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반공정책을 통해 총선을 파기하고자신의 적인 베트민에 대한 강도 높은 살인적인 탄압과 테러를 저질렀으며대중적인 종교인 불교를 탄압했다. 1960년 베트콩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러한 폭력적 행위를 일삼았으며, 1963년 6월 11일 틱광둑 승려의 분신자살을 시작으로 미국의 신뢰까지 떨어져 결국 CIA에게 암살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추구하는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아주 잘 맞는 인물이었고그랬기에 미국은 이들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이승만이 미군 병력에 의존하여 전쟁을 치렀듯이응오딘지엠 정권 또한 남베트남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에서 미국의 지원과 고문단 병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군사적 차이가 존재했는데이승만 정부는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그 외의 지리산 빨치산 게릴라전을 진압했고한국전쟁 이전까지 좌익의 씨를 말린 상태였기에한국전쟁 이후에는 더 이상 남한 내부의 게릴라전이 없었다.

 

반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베트민 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잔존한 베트민 병력과 봉기한 베트콩과 민중의 군대를 제대로 뿌리 뽑지 못했다오히려 이 게릴라들 즉 혁명세력은 허약한 무장력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을 압도했으며, 1963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는 이런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줬다물론 그 뿌리는 그의 암살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질 정도로 아주 강력한 존재였으며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 모두 양민에 대한 학살을 동반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군정의 도움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민중항쟁들을 진압하면서 대략 10만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한 상태였다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2~3달이라는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50만에 달하는 학살을 벌였으며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과 북한으로의 북진 과정 및 점령과정에서 또 다른 수십만(북한지역에서는 20만이 이들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짐)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학살로 이승만은 대량 100만 이상의 양민을 학살했으며그 수법도 아주 잔인했다.

 

응오딘지엠 정권도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양민학살을 저질렀다이런 학살의 규모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가 1954년에서 1956년 당시 토지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처형한 2,500명에서 1만 5,000명에 달하는 규모를 압도적으로 우회하는 수치였으며(애초에 이런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고 두 사건의 성격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지만), 이 시기 적잖은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다응오딘지엠은 일부 토착 세력 및 친프랑스 세력 들을 토벌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웠는데응오딘지엠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바로 항불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베트민 혁명가들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인적구성은 말 그대로 바오다이를 계승한 것이었기에인물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한국으로 치면 친일파 같은 인물들이었다특히 남베트남 군부는 어떤 육군 중령 1명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 부역했던 반역자들이었으며이들이 바로 베트민과 이후 베트민을 대체하는 베트콩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양민들을 토벌하고 학살했던 주체들이었다한 마디로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가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었고당연히 국가 정통성이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은 베트민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멸공반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5만에서 8만 명에 달한다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5만 명에 달하는 베트민과 베트콩이 죽었으며여기에는 당연히 학살당한 양민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런 수치까지 합친다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대략 10만에서 15만에 달하는 양민을 학살한 것이라 할 수 있다못해도 5만에서 많으면 10만 이상의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물론 이 학살의 규모에 있어서 이승만보다는 작은 편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종교에 있을 것이다이승만은 본인이 기독교 신자였지만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기독교인들로만 구성하지는 않았었다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베트남 초대 내각을 가톨릭으로만 구성했다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는 남베트남의 수석 보좌관으로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마담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디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그리고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따라서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에 직면해야 했고그 결과 응오딘지엠 암살로 이어졌다따라서 이 종교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이승만이 응오딘지엠 정권보다 관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을 쉽게 정리하자면, ‘미제국주의 압잡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이들은 정말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이었다이들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을 전적으로 수용했으며그 반공이데올로기를 자신들 사회에 적용시키려 했다그 결과 한국과 남베트남은 냉전에 있어서 미제국주의의 반공기지로 태어났으며사회의 진보적 가치들은 철저하게 탄압받고 짓밟혔다이승만의 국가는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가 한층 더 강화하며경제를 발전시켜 유지한 반면응오딘지엠의 국가는 쿠데타 이후 등장한 티우 또한 부정부패로 인해 결국 나라가 혁명 세력에 의해 사라져 버리는 결과를 맞게 됐다물론 남베트남의 패망은 제국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할 사건이지만동시에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미국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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