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만주를 침략한 수만 명의 일본군은 1932년에는 괴뢰황제 푸이(Puyi)를 내세워 이른바 자신들의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State of Manchuria)을 세웠다그러나 만주사변을 전후로 만주 지역에선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전개됐으며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싸우던 이들 중에는 만주에서 살던 혹은 만주로 결집한 식민지 조선인들 많았다이에 따라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게시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 초부터 1935년 봄까지 간도 지역에서만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 이른바 대토벌을 벌였다여기에는 일본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하천용 군함까지 동원되었으며총 10만 이상의 병력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11월 중순에 있던 일제의 2차 대토벌에서만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으로 구성된 6,000명의 병력과 항공기가 동원됐다.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도 자행됐다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마오쩌둥을 취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쓴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도 중국의 붉은 혁명 연극에서도 일본의 만주 침공과 학살을 다룬 장면이 언급된다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만주사변 시점부터 혁명 세력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혁명가 웨이정민,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1941년에 전사했다. 또한 그는 민생단 사건의 피해자들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김일성을 도왔다.)

 

일본은 간도에서 이른바 친일 단체를 이용한 공작을 감행했다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이용했었고그것이 바로 민생단이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어용단체였다당시 친일파 조선인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이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연합을 분열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그러나 민생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주국이 내세운 5족협화(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6개월 만에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생단이 해산된 이후인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인물이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고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간행물인 민주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었다.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부녀자와 아동들도 예외가 아니다틈만 있으면 민생단이 다 파고들었다적색구역과 백색구역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투성이다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

 

소위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논리가 먹혀 들었다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돼 형장이나 감옥으로 끌려갔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지속된 것으로 확인된다이 민생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는 최소 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유격대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1933년 코민테른이 파견한 양쑹은 당시 반민생단 투쟁에 관여했던 저우바오중을 통해상황을 보고 받고 경악했다 이에따라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 지역에 급파했으며웨이정민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의롸 체포구금살인을 불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민생단 사건은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불신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1935년 8월 제7차 코민테른 대회(Seventh World Congress of the Comintern)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가 천명한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이 채택되면서사실상 종결됐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동지인 저우바오중 가족이 48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일가와 찍은 사진.)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이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만주에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하여 더 가열차게 투쟁을 벌였고이는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중반 만주를 피의 숙청으로 몰고간 반민생단 투쟁(민생단 사건)은 또 다른 인물을 체포했다가 항일 영웅으로 만들었는데그가 바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Kim Il Sung)이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김일성은 1932년 이른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구국군에서 조선인 항일 유격대인 왕청항일유격대를 이끌었다이들은 일본군의 대토벌에 맞서 전투를 치렀으며, 1933년 9월에는 동녕현성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했었다그러나 김일성 또한 민생단 사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하여감옥에 수감되었었다그러나 당시 중국 공산당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중헝은 김일성같은 위대한 애국자가 절대로 민생단일 수 없다.”고 하며 그의 신원을 보증하여 김일성은 풀려날 수 있었으며재판으로 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까지 회복했다이후 김일성은 만주 항일투쟁의 붉은 별(Red Star)로써,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고7차 코민태른 대회 이후엔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김명호중국인 이야기 3한길사, 2014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한성한국의 레지스탕스생각정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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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광주의 대학살자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광주에서 수백 수천 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민주투사들을 박정희가 했듯이 잡아다 고문하고 반병신 만들고 죽인 그가 그리고 수만 명을 삼청 교육대로 보내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그가 오늘 죽었습니다. 그는 끝끝내 반성하지 않았고, 마르지 않는 29만 원으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원해준 세력은 누구인가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승인했고, 그 결과 광주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주 학살은 사실상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5.18에 미국이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포트를 지원했고, 니카라과의 대학살 세력인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으며, 대한민국 신군부를 지원했습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전두환이 죽은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의적절하게 제가 쓴 책의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합니다.

카터 정권 시기 미국의 지원을 받던 대한민국에선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여기서 카터 정권이 방관한 대한민국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겠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에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유신 독재 그리고 1979년 12.12 쿠데타로 이어지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존재했다. 1979년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살해된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군부가 이른바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러자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는 전라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16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이른바 폭도 내지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전두환이 보낸 군대의 잔혹함이 극에 달하자,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고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1871년 당시 파리코뮌에서 압제자에 맞서 봉기했던 파리의 시민들처럼 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규모의 군대와 탱크까지 동원하면서 아주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소 수백 명이(많게는 수천 명)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여기서 미국의 카터 정부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시민군을 진압하기를 원했으며, 신군부 세력의 진압 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 P216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런 시각은 2005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잘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나온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았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 미문화원으로부터 군인들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네요.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저도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진압이 무자비하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 투입에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만약 한국 국민이 전국적으로 군부를 반대하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군부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이 사태를 진정시킬 겁니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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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는 무엇일까아마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대표되는 고엽제 살포일 것이다. 100~150만 명 이상의 군인과 200~3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주체는 바로 남베트남의 민간인일 것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공격받자, 3월부터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이른바 북폭에 나섰다군사적 교리상 전략폭격이었지만현실은 무차별 융단 폭격이었다따라서 북베트남 전역이 미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그에 따른 인명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최소 수십만 이상이 이 폭격으로 죽거나 부상자가 됐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고 있는 미군 항공기)

 

남베트남은 북폭 이전부터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그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허가한 군사작전 때문이었다그 작전이 바로 랜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이다랜치 핸드 작전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략 10년간 베트남 주둔 미군이 진행한 군사작전이다이들의 목표는 베트콩이 숨어있는 정글을 없애는 동시에베트콩의 군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남베트남 농촌 일대에 고엽제를 투하하는 것이었다제초제를 담은 55갈론 드럼통을 두른 띠 색깔에 따라 에이전트 블루에이전트 화이트 그리고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렸고특히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농촌과 마을 그리고 밀림에 투하됐다특히나 이 고엽제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에이전트 오렌지였으며이 에이전트 오렌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이라는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UH-1 헬기)

 

다이옥신은 치사량이 0.15g인 청산가리의 1만배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진 맹독 물질로다이옥신 1g이면 2만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다또 이 물질은 잘 분해되지도 않고용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극히 적은 양이 흡수됐다고 해도 점차 몸속에 축적돼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되며그 영향은 후세대에게 까지 이어진다폐암후두암전립선암 등 각종 암은 물론말초신경병버거씨병당뇨병 등 각종 질환을 불러일으키며이러한 고통은 노출된 인간에게는 평생의 고통을 주게 된다따라서 인체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 바로 고엽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고엽제를 뿌렸지만비극적이게도 고엽제에 노출된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은 미군의 고엽제 살포를 환영했다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은 1960년대 초부터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에 파괴적인 네이팜 폭탄이 투하됐고이러한 폭격을 남베트남의 농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965년 미군이 대규모 지상부대를 파병하면서폭격의 빈도도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일단 고엽제를 뿌리면 나무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적어도 이틀 동안은 미군이 폭격을 중지했다따라서 남베트남의 민간인이 고엽제 살포를 환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엽제가 살포된 남베트남 지역)

 

당연히 이러한 독성물질을 살포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그러나 1954년부터 제네바 협정과 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던 미국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제정된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는 것 또한 손쉬운 일이었다에이전트 오렌지는 대략 10년 동안 총 7,200만 리터가 살포됐다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라 할 수 있다이 고엽제는 남베트남 전역의 농촌과 밀림 그리고 베트콩의 보급 역할을 하던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와 라오스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집중적으로 투하됐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고엽제 살포로 사망한 남베트남인은 최소 40만 명 이상을 넘는다기형아 사망자를 포함한 각종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일일이 따지면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1995년 기준으로 최소 20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피해자의 숫자가 350만 명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으며많게는 400만에서 48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의 피해자가 된 것으로 확인된다.

(고엽제로 인해 말라버린 남베트남의 밀림)

 

미군의 고엽제 살포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졌던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의 경우 현지 소수민족들이 이러한 피해를 아주 극심하게 본 것으로 확인된다당시 미군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들 남성들과 그들의 부족과 마을 주민들은 고엽제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렸다태어나는 아이들 중에 절반 이상이 기형으로 태어났으며어떤 아이는 등이 굽은 채 태어나서 걸음걸이를 하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당연하게도 이것은 남베트남에서 살던 베트남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고엽제 피해 1세대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많은 사산을 경험하였고다이옥신 농도가 높을 때는 아예 아이가 생겨나지를 않았다시간이 지나 체내에서 농도가 조금 낮아졌을 때 아이를 낳지만 거의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2009년 기준으로 베트남 정부 통계에 의하면 1년에 5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

(고엽제 후유증을 둔 부모에게서 태어난 기형아)

 

이러한 피해는 단순히 남베트남의 민간인과 베트콩 그리고 북베트남군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고엽제를 살포했던 미군들과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의 군인들 또한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한국의 경우 참전한 병사 31만 명 중에 최소 2만 명 이상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겪게 됐다그 외에도 라오스에서 반공산주의 작전에 이용된 소수민족인 몽족 또한 이 고엽제 피해에 시달렸다한마디로 고엽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모든 이들에게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이러한 일을 생각해보았을 때과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한 미국의 전쟁범죄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을까?

 

참고자료

 

김성모고엽제란?"인류 역사상 최고 맹독 물질 중 하나"조선일보, 2011.05.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19/2011051901409.html

 

배보람다이옥신에 노출된 350만 명... '그런 전쟁'은 계속 되고 있다오마이뉴스, 2021.04.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7429&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송필경고엽제 태아 이야기경향신문, 2009.03.02. https://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14

 

주영재생태학살도 국제 범죄가 될 수 있을까?경향신문, 2016.11.30.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611301043001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어깨걸고, 2021

 

황성환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민플러스, 2018

 

위키피디아랜치 핸드 작전, ko.wikipedia.org/wiki/랜치_핸드_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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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생일에 맞춰 나온 베트남의 포스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지도자인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은 베트남 전쟁 당시 서구 좌파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치민 서거 3일 뒤인 19699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에선 히피족(Hippie)’으로 대표되는 대학생들이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나와 그를 추모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217일 독일의 서베를린에선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려 미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승리를 지원하며, ‘! ! 호치민!’을 외쳤다.

 

이처럼 호치민은 1960년대 서구 좌파들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좌파들에게 남아있다. 2019년 칠레에서 반정부 시위가 한참일 때, 거리로 나온 칠레인들 중 일부는 호치민의 노래(Bài Ca Hồ Chí Minh)’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호치민은 단순히 베트남의 국부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지금까지도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에는 현재 좌파의 영향력도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한 인물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사례는 아마 20세기에서는 호치민 말고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좌파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 응에안 성(Nghệ An)에서 태어났다. 2016년부터 하노이 일월대학 총장을 지냈던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호찌민-민족해방과 도이모이에서 그의 출생 년도가 미스터리하다고 밝혔으며, 1891년이나 1893년생일 수 있다고 했다. 후루타 교수에 따르면 그의 생일인 519일도 사실은 1941519일 즉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Viet Minh) 창설일을 생일로 표기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호치민의 출생일을 1890년으로 표기했으며, 베트남 측 자료가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관리였고, 아버지를 따라 당시 수도였던 후에(Hue)로 가서 공부했다. 17살이 되던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반프랑스 시위를 했다가 퇴학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당시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로 대표되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다. 호치민 또한 판보이쩌우의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그러던 1911년 사이공으로 가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했다.

 

19116월 만 21세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났으며, 30년간의 길고 긴 해외 생활을 이렇게 시작했다. 서방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1세대 연구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러한 호치민의 행적이 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점이라 주장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호치민은 그 해 7월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해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체험했고, 알제리, 튀니지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젊은 시절 그는 미국에도 있었는데, 뉴욕과 보스턴에도 있었으며 보스턴의 옴니 파커 하우스에서도 일했다고 한다. 1913년에는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도 정착했었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호치민은 프랑스사회당에 입당해 안남애국자협회를 조직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에 찾아가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안남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 언론자유 보장, 결사와 집회의 자유보장 등, 베트남인과 프랑스읜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의 청원은 프랑스 당국 인사들과 서구 열강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에서 3~4년간 머물렀는데, 2018년에 밝혀진 문서에 따르면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19207월 프랑스사회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민족문제와 식민지 문제에 고나한 테제 원안이 게재됐다. 이 글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에게 감명받아 같은 해 12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치민은 1960년 그가 쓴 나를 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에서 자신이 어떻게 레닌을 신뢰하게 됐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호치민은 이 글을 읽고 울고싶을 정도의 기쁨을 느꼈다. 후루타 교수는 호치민이 레닌주의를 애국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레닌주의의 수용으로 호의 민족주의도 민족독립을 명확히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호치민은 레닌의 논문에서 민족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독립 전사가 됐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억압받던 식민지 민족과 혁명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다.

 

이후 호치민은 1922년 르 파리아(Le-paria)라는 언론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베트남 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 그리고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19236월 프랑스에서 도망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고, 코민테른 휘하의 기관인 극동국에서 근무하며 그해 12월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으며, 호치민은 혁명가로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이후 소련의 육군 원수가 되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등을 만났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생전의 레닌은 만나지 못했고, 1924년 그의 장례식에 손수참가했다고 한다.

 

1920년 레닌의 논문을 읽은 호치민은 레닌주의자의 삶을 살게 됐다. 소련에서 중국 광저우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을 향해 전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베트남의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1930년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이 당명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합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이 개정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후 1930년 베트남 국민당이 단행한 대규모 봉기에 가담했고, 특히 응에안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 An-Ha Tinh Soviet)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결정된 강령에 따라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의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됐다. 실제로 베트민 활동시기 호치민은 팍 보(Pác Bó)동굴에 있으면서,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로 시냇물을 레닌으로 이름을 지었다. 레닌주의자가 된 호치민은 이 레닌주의를 소위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반제국주의 투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24년 호치민이 쓴 레닌 추모글인 레닌과 식민지 민족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참고문헌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에드컴, 20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후루타 모토오, 이정희(),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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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aperback)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Nick Turse / Picador USA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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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찾고찾던 책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학살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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