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을 뒤에서 쳐다보는 미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주도했던 뉴라이트 세력들은 기존 역사교과서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의 이승만의 정치투쟁은 건국투쟁이고소련 치하의 공산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켰으며이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만들어졌다.”가 된다즉 한국 근현대사는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북한은 시작부터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이들은 소위 신의주 사건과 같은 예시를 들며소련군이 폭압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한다왜냐하면 그들이 찬양하는 미군정은 매우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으며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미국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상한 공식에 빠져 있다그러나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경제를 독점하는 과정을 보면허구일 뿐이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 또한 그러했다미군정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시점부터 환영하러 마중나온 시민에게 총격을 가해 몇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그리고 포고령을 발포하여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서울에 입성한 미군)

 

미군정의 통치는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이것은 미군정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즉 미군정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일반 노동자 농민은 쌀을 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으며땅과 자본을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만 증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그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봉기 및 저항으로 이어졌으며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에 대해 추수봉기(Harvest Uprising)’이라고 표현했다.

 

추수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 8,000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시작됐다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며칠 사이에 파업은 인쇄공전기기사전신 및 체신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산업에 파급되어 총파업으로 이르게 되었고많은 학생들이 이 파업에 가담했다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가담했다한반도 이남 지역을 통틀어총 25만 1,000명의 이 파업에 동참했다한마디로 미군정에 맞선 생존권 투쟁 및 자주권 투쟁이었던 것이다.

(대구 10.1 항쟁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에게 살해된 민간인의 시신)

 

파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개혁적인 것들이었다. “쌀 배급의 증가보다 높은 봉급실업자 및 귀국자들을 위한 주거와 식량공장에서의 작업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또한 민주적인 노동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그리고 반동적 테러의 중지 등의 요구도 나왔었다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장이던 허성택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에게 보낸 서신에도 앞에서 언급한 요구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1 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시위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학살한 제주도 양민 시신의 숫자를 보여주는 지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바로 강경진압과 폭력동원이었다대구 10.1 항쟁과 같은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명 이상이 경찰에게 체포됐다북한 개성 지역에서만 3,000명이 체포되고서울은 용산 철도 차고에서만 불과 하루사이에 2,000명이 체포당했다또한 전라남도에서만 4천 명이 체포됐다진압 당시 미군정은 주로 국립경찰에 의존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했지만필요의 정도에 따라선 서울측 경찰이나 미군 전술부대를 파견했다그리고 대구 10.1 항쟁에서는 미군 탱크가 출동했다.

 

1946년 10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미군과 우익경찰이 군중 6,000명에게 실탄을 사격했다이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죽고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이 체포됐다같은 날 경남 창원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 경남 진해 근처의 웅천에서는 미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었다부산의 경우 10월 9일에만 양측의 충돌로 경찰과 군중 24명이 피살되었고미군정은 전술부대를 투입하여 군중을 진압했다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총파업 및 반미군정 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당연히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생긴 사망자들이었다.

(존 리드 하지와 이승만)

 

이처럼 미군정의 통치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이런 폭력은 1948년 제주도에서 정점을 찍었다이들은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자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하고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미군정이 동원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독소전쟁 시기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시키는 학살극을 벌였다학살은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말까지 주로 발생했다총 30,000명에서 60,000명의 제주도민이 그렇게 학살당했다제주도민 10명 중 1명 혹은 6명 중 1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며미군정 자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려는 뉴라이트들을 보면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미군정은 일부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권이었지파업을 전개하던 대다수 시민을 위한 정권이 절대로 아니었다미군정이 내세운 이승만도 그러하며이들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따라서 미군정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전파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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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존재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국가 베트남 공화국(Republice of Vietnam, Việt Nam Cộng Hòa)이다한국에서는 보통 남베트남으로 자주 불리며영어로는 South Vietnam이라고 불린다남베트남은 1955년에 탄생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됐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호치민(Ho Chi Minh)을 지도자로 하며 1945년에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이 유지가 됐고남베트남에는 1949년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 Quốc gia Việt Nam)이 유지가 됐다.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응오딘지엠)

 

그러나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었다이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소위 국민 투표를 통해 탄생했으며형식적으로 대통령제가 유지됐다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분적으로 베트남의 상류 계층이었다식민지 시절 그는 식민지 관료였으며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바꿔 프랑스에 대항하는 약식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창설되자베트민으로부터 협력을 제의받았으나 단번에 거절했다그 이유는 본인의 형 응오딘코이(Ngo Dinh Khoi)가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물론 그의 형은 프랑스 식민지 협력자였고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다 그러했다결국 응오딘지엠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서 살았으며그 시기부터 반공사상을 전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엠이 귀국한 것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전후였고바오다이는 그를 베트남국의 총리로 임명했다이에 따라 미국의 노선은 바오다이를 지지하는 것에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하며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1956년 이내로 약속됐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실행했다그가 총선을 거부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그 이유는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그걸 알았기에 지엠도 아이젠하워도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미국의 계획대로 지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혹은 지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즉 그렇게 해서 실시된 것이 1955년의 국민투표였고지엠은 국민투표에서 98.2%의 득표율을 얻었다쉽게 말해 부정선거였다당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많았다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으며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휴버트 험프리존 F.케네디 등이 응오딘지엠의 지지파였다이들은 미국의 강경 보수 성향으로 극단적 반공주의자 지엠과 성향이 잘 맞았다.

(응오딘지엠과 미국 대사인 헨리 케벗 로지, 지엠은 마치 미국 대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남베트남에 남아있던 베트민 세력들을 탄압하고 소탕하는 것이었다당시 베트민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세력이었다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침략을 무찔렀고남베트남 지역에서도 프랑스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에게 정통성이 밀렸던 것이다그 이유는 본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민들이 설치한 선거함을 철거했고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하고 감옥에 투옥했다. 1960년대 초반 기준으로 이미 남베트남에는 수십만의 정치범이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시기 식민당국에 협력한 이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북베트남에서 8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월남한 것도 따지고 보면이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이중 60만 명은 가톨릭 세력이었는데이들 또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식민당국의 대대적인 협력자들이었다즉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켰고남베트남의 군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규모가 늘어났다그리고 이 남베트남군의 장교와 사령관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당국에 협력한 인사들이었다쉽게 말해 이들은 바오다이 베트남국에서 응오딘지엠의 베트남 공화국의 장교와 사령관이 된 것이다즉 미국은 이런 매국노들을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교활하게 포장시켰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에게는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는 2017년 켄 번즈(Ken Burns)의 PBS The Vietnam War(2017)에 대한 비판 글을 개제하며응오딘지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선거조항을 담고 있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운명은 와드의 역사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저자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조국에서 몰아내었던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유일한 설명은 남베트남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1955년에 선거를 거부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제안된 선거만을 언급하는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가 마치 그들이 프랑스 식민통치권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남베트남 정부의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것처럼, 6쪽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미국 그 자체가 선거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1955년 중반 디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1955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통일 베트남을 위한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는데냉전국가인 분단된 독일과 한국의 정책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자유선거를 유지했던 것이었다.”(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Gareth Porter, 2018.03.01.)

 

쉽게 말해 미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남베트남의 정부가 정통성이 없었다는 것을 책에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매클리어는 베트남 30년 전쟁의 제1막에 해당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마감은 임무 교대를 위한 무대 장치의 전환이었으며, 10년에 해당하는 제2막은 미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9) 응오딘지엠 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매클리어는 미국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인용하며미국의 남베트남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와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만난 응오딘지엠)

 

미국은 제네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입장은 베트남 국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이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은 6월의 <펜타곤 페이퍼>에 잘 나타나 있다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윤충로 교수는 박사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서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으며친프랑스 세력에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그의 논문에는 남베트남 군벌 및 친불파 집합체이던 까오다이교나 호아하오교 그리고 베트남 국민당이나 빈쑤옌 등과 같은 세력을 견제했다고 나온다. “1955년 바오다이의 폐위를 거쳐 1956년 4월 호아하오의 지도자인 바꿑(Ba Cut, Le Quang Vinh)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하고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이런 프랑스와의 대결이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 그러나 윤충로 교수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낀 세력이 바로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한 베트민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히 밝혔다.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논문에서 윤충로 교수한 인용한 쩐반짜우(Tran Van Giau)의 인용문을 보자.

 

남부당국은 그 지역의 우리 동포와 모든 애국적이며평화적인 세력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겨우 1년 동안에 그들은 3,000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적어도 4,000명의 애국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5)

 

응오딘지엠 정권의 멸공 반공 정책은 사실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해가고 있던 프랑스를 잠시나마 몰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원에 의존한 것이었고그렇기 때문에 과거 반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애초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아무것도 안했으니당연히 정통성이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과 이승만, 1957년 응오딘지엠은 한국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만났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도 정치 성향도 통치하는 방식도 거의 비슷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맞다이는 낡은 관점이 아니라 응오딘지엠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애초에 미국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남베트남은 미국의 창조물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였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졌고미국 정부에 의해 제거됐다. 1963년 그가 암살당한 것도 CIA가 뒤에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미국이 기존 꼭두각시를 새로운 꼭두각시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내용은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그러나 양측의 성격이 구분된 상황에서 미국이 식민주의의 흔적 없이 베트남에 들어간다는 덜레스의 말처럼 순진한 말도 없을 것이다베트민은 선거를 통해서든전복이나 게릴라전을 통해서든 남쪽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그들은 근대 세력이었고그들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은 봉건주의자들이었다그 상황에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그들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에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웠다아울러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를 쫓아내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베트남 사회에 대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식민 지배 아래에서 그들 사회는 분열되었고서로를 불신하며 의지할 가족에게만 충실했다따라서 그들이 연대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알게 되었다.

 

남쪽은 정반대였다남쪽의 정부 구성원들은 서유럽인들을 상대했고전쟁 때 국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다그들은 프랑스에 협력했고전쟁으로 이권을 챙겼다응오딘지엠은 외국에 있어서 어느 편도 고를 수 없었다남쪽에는 옛 봉건 질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이는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남쪽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대하기보다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의 전통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었다응오딘지엠 정부는 친족 정부였고따라서 지엠이 몰락하던 시기에 오로지 친족만 신뢰했다처음부터 한 베트남 친족만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리더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북쪽은 외국인을 쫓아낸 사람이 이끌었고남쪽은 외국인이 추대한 사람이 다스렸다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주의가 한창인 시기에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명했고지엠은 해방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던 시기에 베트민을 인정하지 못하고 망명했다호찌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그래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농민층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지엠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한 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미국의 정치적 필요성과 야망이 만들어낸 미국의 피조물이었다베트남 기준에서 볼 때 그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지엠은 불교 국가의 가톨릭교도이자 남부의 주류 베트남인이었지만무엇보다도 혁명이 휩쓸고 간 국가의 봉건 귀족이었다.”(최고의 인재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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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보았을 것이다. 1985년 6월 1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92만 5천 명이 보았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물론 이 영화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 운동권들의 저항을 억누르고반공의식과 반북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상영된 것이었다즉 캄보디아 폴포트 공산정권의 이런 만행을 보라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전두환 정부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다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관점들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어 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영화 킬링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Pol Pot, Salot Sar)와 크메르 루주(Khmer Rouge)의 학살과 만행을 다루고 있다영화는 미국의 반전기자 시드니 스켄버그(Sydney Schanberg)와 캄보디아의 디스 프란(Dith Pran)의 우정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따라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본질은 분명했다캄보디아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반공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려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유골, 캄보디아는 폴포트 집권 시기 수많은 인명이 학살로 희생됐다.)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자 폴포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했다그의 정권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통치기간 4년 동안 학살을 자행했다이 학살로 최소 200만에서 300만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즉 크메르 루주 정권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그만큼의 인명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다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한다실제로 폴포트 집권 시기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80만에서 150만 사이이며사망자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 및 수용소 생활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이 중 실제 즉결 처형으로 사망한 자의 수치는 7만 5,000명에서 15만 명으로 되며나머지 학살굶주림질병과로로 숨진 사람들이 10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폴포트 집권 시기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그리고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당했다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크메르 루주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의 국경지대을 의도적으로 침공했으며적잖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살던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캄보디아 내의 베트남인들도 그저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크메르 루주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알아도 그 이전의 학살은 모른다그 이전의 학살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미국의 닉슨(Nixon) 행정부가 저지른 캄보디아의 제1차 킬링필드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형식적으로 독립을 얻은 캄보디아는 다시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베트콩 물자를 차단할 목적으로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더 증가했다실제로 1967년 2월 24일 미군남베트남군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크락 크란의 크메르족 마을에 집중 포격을 가한 적이 있었으며미국의 항공기들은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었다.

(B-52 폭격기,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

 

1969년 3월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이른바 비밀 폭격을 시작했고, B-52를 포함한 미군의 폭격기가 거의 매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거기다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블록에 가담하였고캄보디아 국경지대 내에 베트콩 주둔을 허용했다따라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1970년 미국은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론놀(Ron Nol)을 동원해서 캄보디아에서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고베트콩 소탕을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대규모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이에 따라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는데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미군의 폭격과 공군력에 의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폭격한 캄보디아 지역을 나타낸 지도,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을 폭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1월 캄보디아 정부가 공식 백서를 통해 사진과 날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덧붙여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수천 건의 사건들을 공개했다여기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과 지상공격에 관한 것을 담고 있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나 지상공격 이후에 발견된 시체 중 베트콩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즉 이들의 공격이나 폭격으로 죽은 이들은 다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침공을 설명하고 있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은 결국 미군의 철수로 끝났다그러나 강도 높은 폭격은 지속됐다. 1971년 말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의 조사낟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 난민과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난민의 수를 인구 700만 명 중 약 1/3로 추정했다심지어 미국의 정보기관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폭격의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파괴행위는 역효과를 만들어 냈다그것은 바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크메르 루주의 급부상이었다크메르 루주는 미군의 폭격이 격화됨에 따라캄보디아 내부의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게 됐고이는 결국 론놀 정부군과 크메르 루주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미군의 폭격을 목격한 미국의 통신원 리처드 더드먼(Richard Dudma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격과 사격은 캄보디아 농촌 사람들을 급진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으며농촌을 대규모의 헌신적이고 효율적인 혁명 기지로 변모시켰다.”

 

출처여론조작 p.439

 

1973년 초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핀란드조사위원회가 사용한 대량학살(Mass Genocide)’라는 말에 걸맞는 규모로 증가했다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5개월 동안에도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지속됐으며, 8월이 되어서야 폭격이 중단됐다즉 1969년 3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미국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그 결과 캄보디아의 농촌은 폐허로 변했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공포의 장소가 된 프놈펜으로 탈출했다많게는 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도 추정하며,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핀란드 조사위원회는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으로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으며최소 3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서 이에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노엄 촘스키의 주장)

 

공산계 반정부 무장조직 크메르루주는 급속히 세를 불렸다젊은 크메르루주 조직원들의 광신적인 행태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장악했다그들은 곧바로 국민들을 상대로 다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그 결과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미국의 폭격으로 이미 50만 명이 죽음을 당한 터였다미국은 캄보디아의 주요 우방인 중국과 화해 무드 상태에서 폴 포트가 이끄는 잔학한 크메르루즈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3

 

이처럼 우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해 편향적으로 알고 있다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기억하고 있지만정작 폴포트의 킬링필드 못지 않게 캄보디아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미국 닉슨 정부의 대량 학살 프로그램은 완벽히 잊혀졌다또한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이유가 미국 때문이라는 사실도 가려졌다왜 그런 것일까그것은 바로 서방 사회가 편향되고 조작된 여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따라서 캄보디아 대량학살을 논할 때미국의 제1차 킬링필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며비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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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2022년 새해가 밝았다. 2020년과 2021년의 COVID-19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고지금도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그런 와중에 중남미에선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났다그것은 바로 칠레 좌파 후보인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가브리엘 보리치는 35살의 젊은 나이에 56%의 득표율로 칠레 대통령이 됐다. 2019년부터 전개된 칠레의 반정부 투쟁은 사회주의와 진보를 향해 전진했고, 2020년에는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으며, 2021년에 좌파연합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그리고 2022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서로 협력하고 지지하는 관계였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것을 들어사회주의가 완벽히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편향적인 관점이라 생각한다물론 소련과 동유럽은 붕괴했다그러나 그것이 사회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즉 우리 인류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고귀한 정신(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본가에게 착취 받지 않고노동자가 생산을 주도하고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는 것 등)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중국이나 소련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권이 내부적 요인 및 모순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내부적 요인만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다미국의 경제적 봉쇄도 한 몫 한다.

 

현재 쿠바나 북한과 같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유를 상세히 들어다보면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이 크다대표적으로 카다피의 리비아만 봐도 그렇다리비아의 경우 핵 포기 선언 이후 미국이 경제제재를 해제함에 따라, 2009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7,000불까지 상승했을 정도였다거기다 전기도 병원도 교육 무상이었고자동차 구입 시 정부가 자동차 가격의 절반을 부담했다실감이 안 된다면 당시 한국 경제를 예로 들 수 있다당시 경제대국 11위던 한국의 GDP는 2만 불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다그러니까쿠바나 북한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도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제제재가 한 몫 한다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보지않은 채 그들의 경제사정을 미국 프로파간다에 따라 욕한다면그것은 그저 미국 지배계급식 가치관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동상, 그는 오늘날 칠레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에서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유나이티드 푸르트 검퍼니(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한 미국의 기업들은 중남미의 경제를 약탈하고 있었고이러한 폭압에 맞서 여러 곳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고 혁명이 발발했다대표적으로 1959년에 성공한 쿠바 혁명(Cuban Revolution)은 60년간 지속된 미국의 쿠바 식민지 통치를 종식시킨 사건이었다물론 미국은 이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지금도 쿠바에게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을 가하고 있다그 때문에 지난 2021년 7월 쿠바에서는 미국이 사주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물론 쿠바는 인민의 단결력과 쿠바식 민주주의를 통해 이 반혁명을 진압했다.

 

신자유주의를 중남미에서 최초로 실현한 칠레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략 3년간 사회주의 국가였다. 1970년 칠레의 좌파 정치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아옌데는 부의 재분배와 통신회사 ITT를 포함한 미국 기업들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9월에 있던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4번의 대통령 선거 도전 끝에 아옌데는 칠레의 대통령이 됐고총 36.6%의 득표율을 받았다반면 그의 경쟁자였던 우파 후보인 호르헤 알렉산드리는 34.9%의 득표율을 받았다아옌데는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 개혁을 실행했다.

(영화 칠레 전투,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1부 부르주아지의 반란, 2부 쿠데타, 3부 민중의 힘으로 구성됐다. 칠레에서 사회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첫해에 입법 차원에서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당시 폭등했던 칠레의 물가는 제법 안정적으로 잡혀 30%대였던 물가인상률이 15% 이하로 하락했다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전 정권은 3%였지만아옌데 정부는 8%까지 올렸다산업 생산과 광산·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으며이 덕분에 1971년 4월 지방선거 결과 아옌데 측의 인민연합은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칠레의 근본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전국민 생활임금제사회보장제도 확대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포함됐다대규모 신규 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차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로 했으며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국가 차원의 공교육 제도가 입안됐으며성인 문맹을 뿌리 뽑기 위한 문해교육에 박차를 가했다또한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의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중소기업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으며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고자 했다.

 

칠레의 모든 지역 및 동네에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더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1971년 7월 아옌데 정부는 케니코트와 아나콘다 구리세로광업(Cerro Mining)을 국유화하고 ITT 경영권을 접수했다토지개혁과 국유와 복지정책을 통해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로 향해 전진했다그리고 대다수의 칠레 민중은 이를 따랐다그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미국에 빌붙어 자신들의 이익을 채웠던 기득권 세력들뿐이었다아옌데는 민중과 소통했다집권 당시 그가 했던 연설을 발췌하겠다.

 

나는 사회주의 전사로서그리고 칠레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걸고 국민의 충정에 답하겠습니다나는 인민연합의 계획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겠습니다우리는 생산물 유통에 있어 보다 더 발전된 그리고 보다 큰 통제가 필요합니다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내가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우리는 민중의 권력을 강화시켜야 합니다어머니들을 위한 센터지역단체공급과 가격조절위원회 그리고 지역 민병대 등이 강화되어야 합니다산업연대도 강화되어야 합니다산업부문은 정부와 평행선을 달리는 그런 세력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인 민중들과 결합한 인민정부의 힘으로써 존재해야 합니다.”

 

아옌데의 진보정치와 개혁은 대대적으로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이 경제제재였다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시점부터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온갖 공작에 착수했다또한 미국의 기업들도 이런 방해공작에 협력했다수출입은행국제개발처미주개발은행 그리고 로버트 맥나마라가 총재로 있는 세계은행 등이 칠레에 대한 경제원조와 차관을 끊었으며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 정부를 빈곤으로 내몰아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이들이 먹는 분유를 경제제재했다이에 따라 칠레의 경제는 궁핍해졌다. 1972년에는 아옌데 정권의 국민적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했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아옌데 정권은 민중의 지지만 받았을 뿐 무너지지 않았다그렇게 해서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2019년에 다시 전개된 칠레 전투,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이 2019년 칠레에서 일어났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은 피노체트를 동원하여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친미정부를 세웠다사실 닉슨이나 헨리 키신저에게 칠레의 민주주의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아옌데를 제거하고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반대파 3,200명을 정권 초기에 학살하고수만 명을 구금했으며집권 기간 동안 총 3만 명에서 6만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피노체트 정부가 만든 칠레의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로 도망친 나치 인사들이 개발한 수용소들이 있었으며수많은 인민들은 그런 공포와 억압 속에서 피노체트 독재 17년을 경험했다.

 

피노체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칠레가 민주화를 이룩하고 난 이후에도 지속됐으며오늘날 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2019년에 시작된 칠레 전투는 좌파 정치인을 당선시킴으로써현재로서는 큰 성과를 달성했다가브리엘 보리치의 발언대로 2022년의 칠레는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되길 바란다신자유주의를 완벽히 타파한 칠레에서 사회주의의 바람이 불어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미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인민들의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나는 칠레가 쿠바 베네수엘라와 더불어 성공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전적으로 지지한다.

(칠레의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 2021년 12월 좌파인 그가 당선되면서 칠레는 또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쿠바-베네수엘라-칠레로 이어지는 21세기 사회주의의 꿈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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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문화기행 - 참전 수병 유교수와 함께 가는
유일상 지음 / 하나로애드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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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해가 끝나간다. COVID-19가 멈추질 않아 많은 이들이 힘든 해였고, 나 또한 그러했다. 전염병 전파로 항로가 막히게 됨에 따라, 해외여행은 그저 추억이 됐다.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되니, 해외로 나가고 싶어지는 마음만 굴뚝같이 쌓이는 중이다. COVID-19 초기인 20201월과 2월에 나는 베트남 여행을 갔었다. 군 복무 시절 소방서에서 공익으로 근무하며 베트남의 역사와 호치민에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게 된 나는 전역 후 베트남에 가고 싶었지만, 가족 사정 때문에 20201~2월이 돼서야 가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갔다 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베트남에 못가 봤을 것이다.

 

나는 베트남의 역사를 높이 평가한다. 2천년에 걸쳐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프랑스 식민주의에 저항했고, 일제의 침략과 프랑스의 재침략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그들의 역사는 민중사적 시각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유일상 교수님과는 몇 년 전부터 페이스북 친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심취해있던 나는 네이버에서 자료를 검색하던 중 유일상 교수의 블로그 글을 보게 됐다. 이후 페이스북을 통해 내 페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자료들을 얘기하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최근에 그 분이 책 한권을 내게 된 사실을 알게 됐고, 나는 이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책은 저자가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한 글을 정리한 것이다. 책은 베트남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부분부터 시작하여, 저자가 여행한 베트남 북부(하노이, 디엔비엔푸, 박닌, 까오방 등), 베트남 중부고원지대(달랏, 부온마투옷, 플레이쿠 등), 베트남 중부(다낭, 후에, 호이안, 케산 등) 그리고 베트남 남부(호치민, 비엔호아, 미토, 푸꾸옥 등)의 여행 이야기와 각 지역의 역사 및 문화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여행 가이드 서적이 아닌, 베트남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사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국내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이 현저하게 적다. 그러나 유일상 교수의 저서는 베트남 전쟁을 포함한 베트남 근현대사 역사를 많이 다뤘으며, 국내 서적에서 찾기 힘들거나 없는 내용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저쟁에 대해 제법 공부해본 나 또한 많은 공부가 됐다.

 

예를 들면,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 관련 내용이나 1968년 구정 대공세와 더불어 전개된 케산 포위전(Seige of Khe Sanh) 관련 내용들이 그러했다. 서방측 자료와 베트남측 자료를 동시에 비교하면서, 전투의 전개 과정 및 성과를 정리한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책에 나온 관련 자료들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관련 자료는 최근에 국내에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디엔비엔푸로 가는 길과 디엔비엔푸 합본)를 열심히 필기해가며 읽었지만, 마찬가지로 유 교수님의 책에 쓴 내용들도 호치민(Ho Chi Minh) 주석과 베트남 민중의 독립을 향한 투쟁을 알 수 있어서 공부가 됐고 기뻤다. 무엇보다 디엔비엔푸의 전개 과정을 비교적 읽기 쉽고 간략하게 정리하여 제법 공부가 됐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8년간의 항전을 통해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종결시켰다. 독립을 향한 이들의 영웅적 투쟁은 정말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이며, 이후 알제리 독립 전쟁을 포함한 제3세계 반식민지 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이 56일 간의 포위 끝에 승리한 전투다.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되었던 프랑스군 16,200명 중에 11,721명을 포로로 붙잡고, 2,293명을 사살했으며, 6,650명의 부상당하면서, 베트민은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5만 명의 병사와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열정 하에 모인 25만 명 이상의 민중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다. 나는 이 디엔비엔푸 전투가 프랑스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 그리고 프랑스군에 빌붙어 친불 매국노 짓을 일삼던 남베트남 반동 세력에 맞서 승리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지압 장군 지휘 하에 19545월 베트남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와의 오랜 저항 전쟁을 끝내는 분기점이 마련되었다. 이 승리로 1954721일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체결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의 군대 철수에 합의했다. 므엉팡의 사령부에서의 귀로에 므엉팡 전승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화강암으로 웅장하게 조각된 승전기념 석조기념물이 해 질 녘에 그 위용을 더한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07

 

최근에 밝혀진 내용들이나 몇몇 연구 성과들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앞에서 언급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CIA를 통해 비밀리에 참전한 미군 병사 2명이 전사한 사실이나,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대만을 통해 미국으로 도망친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의 실질적 금괴 액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이름이 “1943년 국민당군의 감옥에서 그를 석방하는데 힘써준 중국 국민혁명군 제4전구 정치부 부주임인 후지밍(Hou Zhiming) 장군의 이름이라는 사실 등이다. 우선 티에우가 금괴를 들고 도망친 사실은 예전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책에서는 티에우가 가진 금괴가 2~3톤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캐나다 출신 미국 CBS 기자 세이퍼가 밝힌 사실에 따르면 티에우가 가지고 있던 금괴는 2~3톤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16톤이었다. 이걸 보니 남베트남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인지 다시 실감하게 된다.

 

책에 나온 호치민 이름의 기원이 중국 국민혁명군 제4전구 정치부 부주임인 후지밍이라는 사실은 이 책에서 정말 처음 알게 됐다. 윌리엄 J.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을 여러번 탐독했지만, 호치민 이름의 기원이 어딘지는 책에서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것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전에도 알고 있었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에서 이들이 항공 폭격과 전술핵 투하도 고려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 했다는 사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특히 2004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전사한 이의 이름은 맥거번 2(James B. McGovern Jr),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였다.

 

책 제목이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이다 보니, 당연히 베트남의 소수민족 관련 이야기도 나온다. 베트남의 경우 54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 87%가 킨족(베트족)이다. 이런 점은 56개의 소수민족을 이루면서 95%가 한족인 중국의 소수민족 구성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미국-베트남 전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과 소수민족들의 공동투쟁이었다. 앞서 언급한 디엔비엔푸 전투도 타이족과 같은 지역 소수민족들이 베트민을 도와서 승리에 기여했었다. 대다수의 소수민족이 베트민과 베트콩 그리고 공산당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와 미국 편에 섰던 이들도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수민족 자치를 요구하며 독자적인 반군을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의 소수민족들이 그러했다. 1960년대 남베트남에 있던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선 참족이나 에데족 등등의 산악부족들이 모여 이른바 FULRO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베트남인들을 학살했으며, 캄보디아가 이를 은근슬쩍 방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92년 캄보디아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무장해제 당하면서 항복했다고 한다. 이것과는 별개로 미국은 중부고원지대에서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베트콩이 두려워 미군 특수부대는 이들을 반공 민병대로 조직하여 이용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이후 2000년대 들어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들이 현 베트남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조용한 걸로 봐선 베트남 정부가 그쪽 소수민족들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중국의 티베트, 위구르 갈등이나 미얀마의 로힝야족 문제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문제 등을 생각해 봤을 때, 베트남은 소수민족 문제를 확실히 잘 풀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책 저자가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다 보니, 책도 주로 베트남 전쟁 관련 내용을 많이 할애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도 많이 공부가 됐다. 원래부터 이승만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비판을 많이 했던 인물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남베트남의 초대 지도자 응오딘지엠은 정말로 변론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꼭두각시이자, 민중을 대량 학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따르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반대파 약 12,000명을 살해했고 집권초기부터 1960년까지 9만 명을 학살했으며, 80만 명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19만 명을 고문하여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친미주의에 빠져, 미국이 지원하는 국가는 민주적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보여주듯이 이는 허구적인 상상일 뿐이다. 미국이 지원한 지엠 정권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없었으며, 빈곤과 부패 그리고 대량 학살과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마치 한국의 이승만 정부와 매우 유사하다.

 

그 외에도 이번에 유일상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에 대해 많이 공부할 수 있었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의 발전상이라든지, 필수 관광 명소는 어떤 것이 있는 지 등이다. 베트남 여행 북부 파트에선 동당 기차역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2019년 나는 4.27 남북회담과 6.12 1차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평양공동선언을 보면서 한반도 종전과 평화의 꽃이 필 줄 알았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회담은 아쉽게도 결렬됐다. 비록 아쉽지만 역사적인 일이었고, 앞으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움직임은 반북 반공주의를 넘어 지속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당 기차역은 201922일 김정은 위원장이 베트남 열차로 환승한 역으로 과거 김일성도 이를 거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당 기차역은 2019226일 베트남 시간 오전 815분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미정상회담에 참석하기위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특별열차로 이 역에 도착하여 내렸다가 베트남 열차로 환승한 역이다. 이 역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 역에 하차했을 때 베트남 정부가 최상급 의전을 베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베이징-난닝-하노이(북경-남녕-하내) 국제열차는 하노이 기차역을 출발하여 베트남에서는 마지막 역인 이 역을 경유해 중국의 베이징 서역까지 운행된다. 3일에 한 번씩 운행되는 베이징과 하노이 간의 철도 여행 총 시간은 36시간이다.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되면 중국을 거쳐 하노이까지 쉬엄쉬엄 중간에서 쉬면서 철도편으로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호찌민시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18

 

저자 유일상 교수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겠다. 나랑 페친이자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의 저자인 유일상 교수는 젊은 시절 고려대학교 불문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에 파병됐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베트남에서 군복무했으며,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도 직접 경험했다. 이후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박정희 정부에 의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9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적도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여러 글들을 인터넷과 뉴스기사에 올리고 있으며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직을 역임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그의 참전 경험은 책에 잘 나타나 있다. 20대인 나에겐 몇 십 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유일상 교수가 들려주는 내용이 마음속 깊게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전했던 이야기와 더불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어른 세대들의 무지함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용기에는 정말 감동했다. 이 책은 단순히 참전 수기만은 아니다. 책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자의 반성도 들어가 있다. 예를 들면, 전쟁 시기 미군과 한국군의 명령을 받고 고엽제를 뿌려, 저자 또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이야기나, 이후 1990년대 들어 국내에서 공론화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그러하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 상당히 동의하고 공감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유일상 교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꾸이년박물관에 전시된 집단학살 증오비의 기록들을 보면서 나는 국가가 먼저 사과하고 병역의무자들을 그 전쟁터에 용병으로 보낸 당시 한국 정권실세의 비자금을 찾아내 배상을 해줘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을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자금의 실태와 사용처를 밝히고 이를 횡령한 자의 재산이 개인명의든, 재단명의든 몰수하여 이제는 노구의 몸으로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는 특히 병역 의무 복무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2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이세호 장군이 생전에 밝혀 보려던 일이기도 하다. 꾸이년을 방문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서라도 이 증오비만은 딴 곳으로 옮겨 줄 것을 교섭하면 어떨까? 이제는 70대 이상 할아버지가 된 참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후손들에게 비록 국가의 요구에 따랐다 하더라도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이 경제 발전의 신화를 이룩했다는 것만으로 결코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 참전 노인들도 베트남 파병이 한국 경제 부흥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만 되풀이 주장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일어났을 수 있는 전쟁범죄에 대해 깊이 회개할 것을 소망한다.”

 

출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391~393

 

유일상 교수의 베트남 역사문화기행은 나에게 있어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말 많은 부분에서 공부가 됐다. 앞으로 베트남을 공부할 나로썬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책을 읽고 나니 20201~2월에 갔던 베트남 여행 시절이 그립다. COVID-19가 완화되면 베트남에 놀러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거나 베트남의 자랑스러운 역사 무엇보다 독립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2021년을 마무리 하며,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2022년에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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