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중국을 탄생시킨 지도자 마오쩌둥(모택동, Mao Tse Dong, 毛泽东)에 대해선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알렉산더 판초프와 스티븐 레빈이 쓴 <마오쩌둥 평전><폴포트 평전>의 저자 필립 쇼트(Philip Short)가 쓴 <마오쩌둥 1,2(Mao: The Man Who Made China)> 그리고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읽은 적이 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엮은 <마오쩌둥(Slavoj Zizek present Mao: On Practice and Contradiction)>도 읽어보았으며, 범우사에서 출간한 마오쩌둥이 쓴 철학서인 <실천론><모순론> 그리고 <신민주주의론>까지 읽어봤다.

 

마오쩌둥에 대해 제법 적잖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주로 서방의 학자들이 쓴 책들은 긍정의 시각보다는 부정의 시각이 앞서는 것 같다. 판초프가 쓴 책과 필립 쇼트가 쓴 책 두 권을 읽어봤지만, 마오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서방주의적 시각의 한계도 분명했다. 학술적이고 서술도 자세하지만, 서방 학자들 특유의 서구적 편향성은 피하기가 힘들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군복무 시절 에드가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을 감명 깊게 읽었었다. <중국의 붉은 별>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과 커밍스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과 더불어 군복무 시절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3권 중 하나다.

 

3자의 입장에서 마오쩌둥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쓴 책은 없을까? 최근에 읽은 책 만화 <모택동>은 내가 읽고 싶어했던 그런 책이었다. 리우스는 제3세계 입장에서 서술하는 멕시코의 만화 작가다. 그의 만화는 1980년대 국내에 제법 많이 번역됐다. 이번에 읽은 <모택동>도 그러한 입장에서 집필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을 하면, 학살과 문화재 파괴 등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마오쩌둥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어야 하는지 다소 의문이 있다. 물론 그가 저지른 과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악마화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리우스가 쓴 <모택동>은 거의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제3세계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이기에, 마오쩌둥의 생애를 다루면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는 점이 내 생각과 많이 겹쳤다. 170페이지 밖에 안되는 만화 책이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제법 부실하게 들어간 점이 좀 걸리긴 한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은 고작 2페이지만 할애했다. 2차 국공내전의 과정은 마오의 대장정만큼이나 감동적이고 혁명적인 과정인데, 그 점 장제스의 부정부패로 망했다는 서술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서술로만 끝낸점은 아쉽다. 또한, 냉전의 과정에서 중국이 소련 대신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던 한국전쟁 참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한계지만, 마오쩌둥의 생애를 누구든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은 만화의 큰 장점일 것이다. 저자 리우스는 대약진 운동과 문혁에 대해 긍정적인 의의를 강조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중국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아마도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단락을 본다면, 많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점도 하나의 담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이 혁명가가 되어 중국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은 여러 모로 대단하다. 군사적으로 10배의 전력을 가진 장제스군에 맞서 포위전을 견뎌내고 대장정을 완수하며, 중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통해 공산당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러한 혁명사적 과정은 분명 감동적인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마오의 노선은 몇몇 오류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수정주의 논쟁에서 소련을 비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옳았다. 그러나 당시 제3세계 인민의 투쟁을 지원한 세력은 중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나 존 F. 케네디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평화공존을 추구한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마오는 1972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과 화해공존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의 닉슨 정부는 중국의 동맹이었던 북베트남에서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자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은 칠레의 친미 피노체트 세력과 앙골라의 제국주의 용병 세력을 지원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마오의 중국은 흐루쇼프가 했던 실책만큼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위대한 혁명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혁명가였고, 그의 이데올로기 마오이즘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자리 잡기도 했다. 즉 마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몇몇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오에 대해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 리우스의 말대로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1842년 아편전쟁 이례로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침탈당하던 중국을 더 이상 그들로부터 침탈당하지 않는 중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여성해방과 글자 간소화 그리고 신분제 철폐 등의 인민해방을 실천했다. 그러한 점에서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리우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필자도 앞으로 중국이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확실한 판단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분명합니다. 모택동이 중국인민을 위해 일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의 삶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중국인들이 그가 죽었을 때, 마치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출처: 모택동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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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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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요즘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은 바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로 유명한 임승수씨가 공동집필한 저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이다. 사회주의자가 되고 난 이후 베네수엘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베네수엘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었던 것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았다. ,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이들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는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바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우고 차베스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여러 성과들을 만들어 냈고, 성과들은 고무적이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과거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베네수엘라를 억압받고 착취 받던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고,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세웠으며, 문맹 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차베스는 과거 굶주리던 빈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했고,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했으며, 또 건설한 주택들을 가난한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차베스의 정책은 분명 진보적인 정책이었고, 자본주의적 양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띈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차베스는 빈민 계급이 권력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이 아닌 공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생산자가 일하고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는 평등한 생산관계를 유지한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소위 미국에서 주장하는 위선이 가득 찬 민주주의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로 포장한 미국식 민주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1998년 선거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집권 시점부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사악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에게 있어서 차베스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방해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축출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미국은 베네수엘라 내에 있는 우익 부르주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차베스 정부를 내부에서 흔들고자 했다. 이런 수법은 과거나 현재나 미국이 항상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브라질의 골라르트, 칠레의 아옌데 등이 그렇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당했다. 2002년에만 해도 차베스를 축출하려는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실제로 차베스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염원과는 달리, 베네수엘라 민중은 차베스편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우익 세력들이 온갖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해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민중들이 차베스를 지키고 수호한 이유는 자명했다. 그것은 차베스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베네수엘라 빈민들과 인종차별을 받던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없었다.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차별받던 원주민들도 권리라는 것이 생겼고, 공장과 사회에는 인민들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탐욕과 이윤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집단과 공동 그리고 대다수 민중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가 자리 잡았다. 과거 아주 극소수만 소유하던 집을 빈민들이 소유하게 됐고, 치료비가 없어서 못 가던 병원을 공짜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혁명적인 변화들은 차베스가 대다수 인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우고 차베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생겼다. 사회주의를 향한 그의 원대한 꿈과 정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하다. 195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발걸음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이들의 혁명과 진보가 아름다운 건, 인간적이고 당연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과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가치를 부정하고, 범죄와 학살 그리고 폭력을 동반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이런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을 보고만 있으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실패했다고 말한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가난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미국은 차베스가 집권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무려 20년간 베네수엘라에게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 문제도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자본과 부, 권력, 달러를 독점한 기업들이 우익들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자주적인 시스템에 사보타주를 가해서 생긴 일이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이 의도적으로 망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제재와 사보타주 및 테러를 당하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보지 않고, 그저 서방이 주장하는 말말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왜곡된 신념이 진실의 눈을 가린 것이다.

 

차베스는 201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까지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그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 현재는 그의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지도자로 있다.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에보 모랄레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인류가 COVID-19를 겪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 러시아 보다 자본주의 미국의 책임이 훨씬 더 크긴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21세기에 사회주의를 시도한 베네수엘라의 붉은 별 우고 차베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전진은 COVID-19라는 위기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야만주의라는 사실은 미국을 통해서 숱하게 봐왔다. 20세기에는 베트남 21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까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대로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준 야만주의 그 자체다. 그 침략전쟁으로 돈을 벌고 이윤을 축적하는 것도 미제 그 자체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보는 건 결과적으로 미국일 것이다. 2013년 유로마이단 색깔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탈산업화가 가속화되며, 미국과 서방의 기업들만 이득을 보았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야만주의고, 제국주의의며 신식민주의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류가 선택해야할 길은 사회주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지만, 19세기 마르크스가 분석한 모순은 본질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적잖은 영감을 주는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제에 맞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우고 차베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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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과 나토가 당초 구소련과 했던, 단 일인치도 동독의 동쪽으로 나토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어기며 급기야 이젠 우크라이나까지 나토로 묶으려 한다는 사실...그 우크라이나에 러시아를 표적으로 하는 치명적 군사자산을 전개해 왔다는 사실...미국과 서방이 그런대로 중립을 유지해 오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선동,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에 적대하게 만들고 이 흐름에 반대하는 동쪽의 러시아 사람들을 8년 동안 군사적으로 공격, 8년 동안 무려 15,000명을 살해해 왔다는 사실...이 살해행위를 중지하기로 했던 약속을 우크라이나가 계속 위반해 왔다는 사실...이 흐름을 주도하는 게 나찌를 숭앙하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이 문제에 대해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 왔다는 사실...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번에 뜬금없이 발생된 게 아니다. 가깝게는 8년 전에 개전된 것이고 멀게는 독일 통일되었던 시점으로부터 갈등의 에너지가 쌓여온 것이다. 러시아가 전쟁 책임을 독박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뉴스 보니 러시아 목 조르려 나머지 온 유럽과 미국이 나서는 모양이다. 각종 첨단 군사장비와 돈으로 우크라이나를 원조하고 미국은 러시아 탱크 때려잡는 아파치 헬기까지 파견할 모양이다. 게다가 경제제재까지.

세상에 옳고 그름을 따지려면 양측의 사정을 공정하게 봐야 한다.

미국이 가는 곳마다 내전이 벌어져 멀쩡한 정권이 무너져 나라가 파괴되고 숱한 인민들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진 복지국가에서 졸지에 비극의 땅으로 되어버린 리비아 ,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베네주엘라 멀게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월남...에서 미국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 처참한 비극들과 관련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을 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까지 누가 진짜 타국을 공격하고 침략해 왔는가?
러시아가 그랬는가, 미국과 나토가 그랬는가?‘‘

세계 각 나라의 내란, 쿠데타, 전쟁, 살상..등에 거의 빠짐없이 관여해 온 미국과 그 추종국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등장하는 꼬라지를 봐 주기 힘들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에 대해 결연하게 저항하고 러시아를 저주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 보는 견해는 다양한 법. 우크라이나 정부를 비판하고 서구의 간섭을 못 마땅해 하는 우크라 인민들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장면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소식은 미국이 장악, 통제하는 통신사들이 걸르고 선택한 후에 내보내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전쟁 좋아하는 사람 없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 국가들이 끼어들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첨단무기 지원하며 간섭하는 것은 역사를 공유해 온 애증적 형제 관계의 두 슬라브 국가 인민들이 서로를 극한으로 증오하도록 싸움 부추키며 공멸하게 하는 행위다.

미국 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 폴투갈,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심지어 한국까지 우크라이나를 편들며 껴들고 있다. 확고한 논리적 근거와 정당한 명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푸틴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패배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중에 핵무기를 쥐고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배경으로 두고 있는 푸틴의 러시아를 과도하게 궁지로 몰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거냐?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4650097655096939&id=10000290250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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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3-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고작 한다는 비판이 이거인가요? 그래서 민간인 지역에도 폭격을 가하는 건가요? 제가 봤을 때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반미 반제)를 위해서 우크라이나를 구실로 삼은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ㅋ

NamGiKim 2022-03-02 17:54   좋아요 0 | URL
민간인 지역에 대한 폭격은 당연히 잘못됐죠. 그리고 러시아가 정의도 아니고요. 푸틴의 지나친 야심과 패착도 당연히 문제 있고, 깔 필요도 있죠. 하지만 이중적이었던 언론의 태도는 충분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NamGiKim 2022-03-02 17:57   좋아요 0 | URL
그리고 얘기가 나온 김에 이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민우님은 아니지만, ˝미제가 <오폭>으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죽이는 건 ˝그럴수도 있다.˝라고 하셨던 친미 전쟁광들이 러시아 욕하시는 것도 종종 보입니다.˝ 전 그런 분들이 러시아를 욕할 자격 없다 봅니다.

Redman 2022-03-02 20:5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남기님 생각 잘 알았습니다.

newdvs117 2023-06-2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언론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반소련 반공 극우주의자들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ex: 오데사 학살, 노동법 개악 등)에 대해 전혀 보도하지 않죠. 그래서 제가 국내언론을 끊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언론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민간인 352명이 사망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이게 너무 편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침공 그 자체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보도들은 미국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탈레반 진격으로 인한 난민들과 민간인 피해 상황은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정작 탈레반 진격과정에서 미군의 화력 지원을 하여 생긴 사망자들에 대해선 침묵했다.

과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군 화력에 학살당한 민간인들에 대해선 외면하던 언론이 지금은 러시아를 까기 바쁘다. 여기서 나오는 이중성과 위선은 언제까지 반복되야 하는 걸까?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때도 그랬지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답답할 따름이다. 그리고 미국이 살인적인 경제제재 때리는 거에 대해선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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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2-02-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쯤 되면 진짜 병이다 병…러시아가 주권국가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해서 사망자 다수 발생했다. 여기서 팩트 아닌 게 있나? 여기에 어떤 자극적인 보도와 미국 중심 편향이 있는가? 님의 스탈린 사랑과 러시아 사랑은 알겠지만 적당히 좀 합시다.
 

1789714일 무장한 시민 군중이 프랑스 파리에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며칠이지나 왕은 파리를 방문했고, 혁명 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왕 스스로가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파리의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지방 도시에서는 주로 부르주아로 구성된 시정 상설 위원회와 국민 방위대가 조직되어 행정과 치안을 맡았으며, 그해 8월에는 이른바 인권선언문을 채택되어 봉건제도를 폐기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다.

 

1791년에 이르러 왕권의 권력은 완전히 붕괴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 공포를 안겨줬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경멸을 드러냈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됐고,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과 네덜란드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전쟁이다. 유럽이 프랑스를 두려워 한 것은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특히나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초기 프로이센군의 전진은 거셌지만, 프랑스군은 발미 전투에서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200명이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300명 전사했는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막아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은 혁명 열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프랑스 시민과 군대는 보다 더 단결했다. 더 나아가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강경파들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게 됐는데, 이들은 혁명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 1793823일 징집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혁명군의 규모는 1794년에 대략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대략 10년 동안 이 혁명전쟁을 치러야 했다. 플랑드르 전역과 스페인 전역 그리고 네덜란드 점령 및 제1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어졌으며, 그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또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은 1801년까지 전개됐다. 17983월 프랑스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350척의 함선과 54,000명의 병사를 싣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여기서 큰 활약을 떨쳤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에서 터키 제국과 러시아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고, 영국과 더불어 이들을 상대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네덜란드 방면과 독일의 라인강 방면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방면이었는데, 동맹국의 총공격 앞에 크게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상륙하려는 영국군 3만 명을 격퇴시켰으며, 179910월 러시아의 반불 동맹 탈퇴 후에 연합세력의 공격을 국경에서 막아냈다. 이집트 원정에서 본국 귀환을 선택한 나폴레옹은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바로 브뤼메르 18일이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1800년에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출정했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 입성했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12월에는 독일 라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측은 9,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나폴레옹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801년 결국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했고, 이에 따라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국가는 영국만 남게 됐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이집트에 있던 프랑스 원정군을 항복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고립 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2년 종신 통령을 선포했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어떤 면에선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쟁은 엄밀히 따져서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였고, 나폴레옹 개인의 정복욕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을 선포하며 황제의 길을 걸었던 것은 1802년으로 그 전까지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성향이 강했다. 나폴레옹이 정복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였다. 특히 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영토 팽창을 가속화했는데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전쟁은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개인이 추구한 정복전쟁로 성질이 바뀌었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 선포와 황제 등극 이전까지를 혁명전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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