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르메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추축국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폭격을 진행했다. 나치 독일과 일본은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됐다. 드레스덴 폭격이나 도쿄 폭격은 미공군의 폭격이 얼마나 많은 대량살상을 불러일으키고, 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폭격의 양상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며,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의 사용 빈도도 급증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대량 37만 5,000톤의 네이팜 폭탄을 동남아시아에 투하했다. 이들이 베트콩 게릴라를 붙잡는다는 명분을 들어, 남베트남의 농촌과 밀림에서 했던 행위들은 사실상 전쟁범죄나 다름없다. 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곳들 대부분은 마을과 농촌 그리고 숲이 우거진 밀림이었고, 대부분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이었다. 한 마디로 미국은 아시아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가 속출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전 미국은 또 다른 전쟁에서 이러한 잔혹행위를 자행했다. 바로 한국전쟁이다.
(B-29기의 폭격 장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대로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현재까지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억 속에서, 그 본질이 왜곡되어 왔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은 쉽게 외면 받는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폭격의 책임이 있는 커티스 르메이는 절대로 저평가 받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을 폭격해서 군사적 효율성을 높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극우들의 기억 속에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침략자 북괴군을 몰아내자.”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가까운 수준이다.
(작렬하는 네이팜 폭탄)
극우세력들의 믿음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인명피해는 공산주의 진영이 아닌 미국에 의해 발생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전쟁 3년 동안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미군의 B-29 폭격기가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폭격했고, 당일 폭격으로 6,000~7,000명의 평양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1만여 통의 네이팜 폭탄과 6만 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조사활동 및 국제연대 활동을 벌였던 국제여맹 인사들은 이후 자신들이 북한에서 본 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충분히 보았다.(We had seen enough)”
출처: 냉전의 마녀들 p.154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한이 겪은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0만 명에서 많게는 15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략 90만 명에서 100만 명의 북한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폭격의 피해는 남한 안에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서울수복 이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의 지역별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공중폭격과 총포격 등 원인별로 조사한 결과, 공중폭격이 4,250명이 나왔다. 서울 용산에서만 미군의 폭격으로 1,587명이 사망했고, 7월 16일의 경우 미군의 B-29 폭격기 47대가 225kg짜리 파괴폭탄 1,504발을 철도공장과 차량, 철로 등에 투하됐다.
(폭격으로 파괴된 현장)
글쓴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안양이나 수원도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1950년 11월 말 중국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후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1951년 2월 말 킬러작전(Killer Operation) 이전까지 약 3개월간 미 공군은 한국전쟁 전 시기에 소요된 폭탄의 40%와, 네이팜 폭탄의 2/3를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이 기간에 사용된 폭탄의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 사용되었지만, 남한 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실제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네이팜 폭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초토화 작전(Wildness of Scorched Earth)’을 시행했다. 미군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반격에 밀리자, 북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의정부·원주 등에서 네이팜 폭탄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51년 1월 19일에는 실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에선 미군 공수부대의 요청으로 공중폭격이 실행됐다. 작전상 이는 성공적인 사례로 보고됐지만, 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물론 이 폭격 과정에서도 네이팜 폭탄이 사용됐으며, 전투기들은 50구경 기관총으로 기총소사를 마을에 갈겼다. 이 폭격으로 136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사상자 중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폭격 당시 남자들은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나무를 하러 갔지만, 여자들은 마을에 모여 명주를 짜다가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빨치산들 또한 미군의 폭격과 소탕작전을 경험했다. 1951년 당시 미군이 지리산 인근 지역에 항공기를 투입한 이후 적잖은 빨치산 대원들이 재귀열이 발병했으며, 미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에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 네이팜 폭탄 투하로 죽은 빨치산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미군은 상주군 화북면 운홍리에서 동네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사건을 벌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잠시 들어온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신고당하지 않았었다.
(네이팜 폭탄을 투하한 미군 무스탕 전투기)
이처럼 남한 내에서도 미군 폭격은 항상 있었다. 특히나 한국전쟁 초기 미군은 남한의 무수히 많은 지역을 폭격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이러한 폭격은 있었으며, 당시 북한의 종군 기자였던 리태준은 1950년 8월 16일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경북 칠곡에 있는 왜관에서는 농장과 주택이 있는 마을에 폭탄이 떨어졌고, 최소 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당시 리태준이 묘사한 폭격에 대해 진상조사에 나섰고, 당시 폭격으로 죽은 최소 131명 이상의 희생자 수를 파악했다. 이 공식적인 희생자 외에도 피난민의 피해까지 합하게 되면 200명이 죽었다는 리태준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950년 9월 2일 미군의 B-29 25대는 김천과 고창 그리고 진주에 225kg 폭탄 803발을 투하했으며, 다음날에는 안동과 성주, 의성, 합천, 고령, 상주, 영동, 제천 전선 부근의 병력과 장비를 공격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들을 폭격했다. 1950년 9월 14일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B-29기 17대는 전선과 무관한 대전과 안동을 폭격했으며, 인민군이 점령했던 포항 또한 네이팜 폭탄의 폭격을 받았다. 1950년 8월 29일 포항 칠포리에서는 미군의 네이팜 폭격으로 최소 수백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됐다. 이 폭격은 미공군의 기록에 따르면 마을을 성공적으로 파괴했다고 나온다. 당시 죽은 민간인들 대다수는 여성과 노인 아이와 같은 인민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들이었다.
2000년대 당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진상규명해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기 위원회 활동 조사 기간 동안 접수된 미군 폭격 관련 사건은 530건이었다. 하지만 이중 진실규명된 경우는 120건으로 규명률은 22.6%에 불과하며, 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들의 규명률에 비하면 가장 낮은 수치다. 예비검속과 대구 10.1 사건은 100%,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98.9%, 부역혐의 학살은 87.5%, 군인·경찰에 의한 학살은 80.1%, 인민군·좌익에 의한 학살은 80.3%, 여순사건은 75%,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45.9%의 규명률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전쟁기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 사건의 규명률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도쿄 폭격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전쟁범죄에 크나큰 책임이 있는 인물인 커티스 르메이는 의외로 한국 내에서 큰 비판이 나오고 있지 않다. 한국전쟁 시기 커티스 르메이가 실행한 폭격에 의해 무수히 많은 남한 민중이 살해되고 학살당했지만, 현재 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범죄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미국이 한국을 구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남한의 국토 대다수를 폭격으로 대량 파괴한 것이 과연 한국을 구한 것일까? 나는 이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반드시 규탄해야 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시기 남한 민중을 폭격으로 대량 살상한 미국은 자신들이 자행한 역사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기광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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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폭격』, 창비, 2013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김동원 안광획 이정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 1945~1979』, 4.27시대, 2021
「[4K UHD]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화 : 초토화 폭격」, 『뉴스타파』, 2021.07.27. https://www.youtube.com/watch?v=keasLxTpL9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