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베트남 -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가다
이규봉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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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이나 되는 이번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이규봉 선생께서 집필한 미안해요 베트남을 읽었다. 기존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은 필자는 차례와 제사가 연달아 있었지만, 남는 시간에 이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필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좀 더 자세히 공부하고,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4년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감행했었다. 대략 8년간의 파병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연 5만 명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유지했었고, 대략 41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총 32만 명이나 되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은 대한민국에게 있어 한국전쟁 당시 일본 못지않은 경제적인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군은 대략 9000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베트남인들은 한국군 증오비를 설립하여 한국군의 만행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베트남 전쟁은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보단 경제적인 이익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뿌리 깊은 반성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을 감행한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 자체를 공산 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 정부의 끄나풀이나 다름없는 언론들은 베트남 전쟁을 그렇게 미화했다. 그들이 그 전쟁을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을 때 나온 한국의 뉴스 보도나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 9호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한국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1990년대 베트남에서 유학한 구수정 박사를 비롯한 양심 있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아주 조금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양심있는 지식인들과 학자 그리고 시민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박정희가 강요했던 시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적잖게 존재한다. 2015년 베트남 전쟁 종전 40주년에 월남 패망을 운운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그 폐해를 알 수 있다.

 

이규봉 선생의 책 미안해요 베트남에 따르면 8년이라는 베트남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은 대략 9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민간인 학살 대부분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꽝남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 성 일대에서 일어났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로 인하여 꽝남성에서만 4000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한국군의 학살을 보면 피해자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을 저질렀던 한국군은 학살을 저지르기 전 아녀자들을 강간한 뒤 죽였다고 한다. 그때 한국군의 학살을 목격하고 윤간당한 베트남 여성들은 베트콩에 자원하며 그들과 싸우기도 했었다. 이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미군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과 매우 유사하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죽은 피해자들 중엔 1, 2살짜리 유아들도 적잖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이런 잔인한 짓거리를 한 걸까?

 

그것은 바로 한국군의 뿌리가 일본 군군주의에 협력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책 저자는 설명한다. 책 저자인 이규봉 선생의 주장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이는 우리의 해방 전후사와 양민 학살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1948년에 일어났던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에서 대한민국 군경과 청년단들은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특히나 제주 항쟁에 경찰을 투입했던 조병옥의 제주도 전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모조리 죽이라는끔찍한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군경과 우익 청년단들은 인근 마을과 산을 불태우고, 대량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여순항쟁에선 김종원이라는 일본군 장교 출신 군인은 일본도를 가지고 민간인들의 목을 베 죽이는 것을 즐겼다.

 

더 나아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향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보도연맹원을 최소 30만 명이나 무차별 학살했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학살 당한 사람들 대다수가 여자 노인 어린이 그리고 유아였다는 사실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유사성을 보인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해방 후 양민학살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잔혹성은 전쟁이 끝나고 5년 뒤인 1980년에 제대로 발휘가 되는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랬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하나회 일당들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참전경력이 있었고, 광주민중항쟁에 투입된 많은 부사관과 장교들 역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경험을 쌓았던 군인들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학살도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보자면 당연히 유사성이나 연관성이 있다. 이규봉 선생이 책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곳곳에 있다. 작게는 나무위키와 인터넷 블로그들을 비롯한 곳에 있고, 크게는 고엽제 전우회나 어버이 연합이라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절대 있을 수 없고, 시민단체나 진보계열 쪽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죄다 근거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이규봉 선생이 집필한 미안해요 베트남또한 근거가 없다는 주장으로 일괄한다.

 

필자는 그들에게 진지하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당장이라도 편견을 버리고 이 책을 읽어보라!”라고 말이다. 나무위키, 밀덕 블로그들, 어버이 연합 그리고 고엽제 전우회 사람들은 피해자의 증언은 신빙성이 부족하다.’라고 한다. 이는 피해자의 존재와 피해사실을 부정하는 파렴치한 행위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은 과거 제주 4.3항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부정, 보도연맹 학살 부정, 광주 학살 부정,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논리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예를 들면 베트남 피해자들이 증언이나 증오비로 남긴 내용들 중에, 탱크가 와서 시체를 짓밟았다던지, 최류탄을 뿌렸다든지 하는 내용들이 거짓이라는게 나무위키나 밀덕 사이트들의 주장인데, 이런 것들은 확실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그들이 쉽게 부정못하는 보도연맹 학살의 수치도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진상규명하며 확실하게 밝혀졌고, 광주항쟁시기 그저 루머로만 떠돌던 전투기 폭격 계획이나 헬기 기총 소사와 같은 것들이 최근에 와서 진실로 밝혀진 사실에서 필자는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용병 논란에 관해 얘기하자면, 필자는 한국군이 미제국주의의 용병으로써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맥락을 공부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책에서도 다 나오는 내용이지만, 소위 박정희 정부가 내세웠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인민 입장에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하등 다를게 없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베트남에서의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내세웠다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반민족 친제국주의적인 응오딘지엠과 그의 사후에 정권을 잡은 남베트남의 부패한 친제국주의적인 지도자들을 내세웠다. 그해 반해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우던 호치민과 공산당 세력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결사 항전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엄연한 침략전쟁이었고, 베트남 인민들은 자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는 그런 전쟁에서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을 돕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했고, 베트남 인민들 입장에서 한국군은 미국에 협력하는 용병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그 베트남 파병이 미국의 요청보단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점과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부가 보낸 군대는 미국의 용병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추석 연휴기간 동안 정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자명하다. 비록 우리가 전쟁에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이었고, 우리는 그곳에 군대를 보내어 대략 9000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연히 이런 학살은 우리가 반성해야할 일이고, 우리가 베트남에게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야한다. 일각에서는 베트남이 입을 닫자고 했기 때문에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은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덮자는 것이 아닌 어느정도 현실을 보고 미래를 나아가자는 뜻이다. 따라서 사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베트남과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며 서평을 마친다.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에 우리가 참전하여 그런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합니다! 다시한번 베트남인들에게 고개 숙여 우리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깊이 사죄합니다!! 정말 죄송하고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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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아침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보스턴과 뉴욕을 출발한 네 대의 여객기를 거의 동시에 공중 납치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 40초, 아메리칸 항공 11기가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WTO) 북쪽 빌딩에 충돌했다. 20여 분 뒤인 9시 3분 11초, 유나이티드 항공 175기가 다시 월드트레이드센터 남쪽 빌딩에 충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두 건물은 모두 붕괴되어 구조대원을 합쳐 대략 3000명이 사망했다.


잠시 뒤 9시 38분에는 세 번째 여객기가 수도 워싱턴 근교의 국방부 건물 펜타곤에 충돌했고, 이어 10시경에는 아마도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이 목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지막 네 번째 비행기가 승객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펜실베이니아 시골 들판에 추락했다. 이른바 전 세계를 경악시킨 9.11 테러가ㅣ 발생한 것이다.


최소 3000명의 민간인을 단기간에 죽게한 9.11테러로 인하여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자신들의 영토가 공격받은 일이었고, 그것도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뉴욕과 수도 워싱턴이 공격받았기에 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미국을 겨냥한 테러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알카에다(Al Qaeda)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19명의 지도부가 계획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테러 조직인 알카에다를 아프가니스탄이 숨겨주고 있다고 의심했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더 나아가 2003년 신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명분을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여 얻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전쟁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전쟁터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들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은 중동의 반미 정서를 자극했고, 특히나 이라크에서 최소 6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공중 폭격으로 학살했다. 9.11 테러 이후부터 오사마 빈 라덴을 추격했던 미국은 2011년 아프가니스탄의 인접 국가 파키스탄에 네이비 씰(Navy Seal) 특수부대를 보내어 오사마 빈라덴을 암살함으로써 파키스탄의 국가적인 체면을 아주 무참히 짓밟았다. 이게 바로 미국이 9.11 테러의 분노를 해결한 방법이었다.


사실 9.11 테러를 자행했던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에 맞서 싸우던 탈레반 병사들은 과거 미국이 후원하고 지원했던 세력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이 죽인 사담 후세인 또한 마찬가지다. 즉 그들은 냉전 말기 미국의 지원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1990년대 이후 미국이 짐짝처럼 버렸다. 9.11 테러의 부당함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필자가 9.11 테러에 있어서 가장 분노하는 점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다. 9.11테러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은 당연히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 죽음이 안타깝지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굴욕을 회복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 나라 민간인들을 수도없이 도륙했던 미국의 행위는 많은 미국인과 전 세계인들에게 잊히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더 황당한 것은 9.11 테러범 19명 중 16명이 사우디아라비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충실한 충견이자 동맹국 그리고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국 여행 중이던 지난해 10월 말 필자는 뉴욕에 있는 9.11 메모리얼을 방문했었다. 그날은 주중이었음에도 그곳을 방문하여 추모하는 미국인들과 “9.11 테러를 잊지 말자”는 옷을 입은 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직접 보았던 필자는 굉장히 마음이 아팠고 분노했다. 그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것만 생각했지 정작 그들이 중동에서 어떠한 야만적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선 1% 반성조차 안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과 사실을 알고보면 9.11 테러를 통해 자신들의 분노를 수백만의 중동 인민을 학살하는 것으로 되갚은 미국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저지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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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단결! 투쟁!!

전국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냅시다.

1. 손글씨 릴레이
˝톨게이트 노동자가 이긴다. #톨게이트 #직접고용 #우리가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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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증샷 올리고 SNS에 함께 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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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페북 페이지

#톨계이트 #직접고용 #노동자 #우리가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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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9-12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NamGiKim 님~

NamGiKim 2019-09-12 09:58   좋아요 0 | URL
네 선생님도 추석 연휴 잘 보새시길 바랍니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였기에, 생산수단(공장, 기업, 마트, 철도 및 공공시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가가 소유한 형태였다. 그게 자본주의와의 차이였다. 그 안에서의 사고 파는 행위, 식당가서 밥먹는 행위, 그외의 여가즐기는 행위가 없고, 항상 배급줄만 서고, 여가 및 휴가는 없으며, 과로사로 인민들이 죽어가던 사회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살만한 나라였고, 특히나 인민대중의 복지에 있어선 현재 미국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좋았다. 무상의료, 주거 보장, 무상 교육, 일반 노동자 연금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소련이 인민들을 개돼지 노예처럼 부렸다는 대한민국 반공 쓰레기들의 망언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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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의 책 21
유인선 지음 / 이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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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익근무 시절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 주석의 생애에 심취했던 필자는 주로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 주석을 중심으로 독서를 했었다. 당시 필자가 알고 있던 베트남의 역사는 주로 베트남 전쟁(The Vietnam War)과 호치민(Ho Chi Minh) 주석에 관한 것이었고, 따라서 전반적인 베트남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내년 1월에 베트남에 놀러 가기 전 베트남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생각한 필자는 국내의 베트남 역사학자 유인선 명예교수가 쓴 대중 서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읽게 되었다.

 

흔히들 베트남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많이 유사하다고 한다. 이 말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다. 외세의 침입에 맞서 중국에 저항했던 것과 19세기와 20세기의 베트남 역사를 보았을 때 우리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분명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시작된 서구 세력들의 간섭,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 이후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던 역사를 보면 그러하다. 또한 베트남도 유교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점도 많은 듯하다. 그러나 베트남은 우리의 역사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우선 베트남 역사의 시작부터 얘기하겠다.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0년경 우리 역사의 고조선과 유사한 반랑(Văn Lang)이 건국되면서부터 시작한다. 워낙 고대 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다 보니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건국설화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고조선 역사처럼 확실하게 시대를 입증할 근거 자료가 풍푸하지는 못하다. 그저 기원전 7세기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다는 동 썬 문화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청동기나 토기들이 푸토성이나 타인호아 지방에서 발견된 것 정도가 대부분이다.

 

반랑 왕국 이후 중국 촉나라의 왕자로 전해지는 툭판이 반랑을 멸망시킨 뒤, BC 207년 경 남월(Nam Viet)이라는 나라가 등장했는데, 남월은 베트남판 위만조선으로 초한전쟁시기 중국 군웅 무제 조타가 중국 광둥 성 지역을 거점 삼아 건국하였다. 그러나 남월은 BC 111년부터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며 대략 1000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1000년이라는 기간 동안 베트남인들은 중국에 맞서 끝없이 저항해왔다. 대표적으로 쫑 자매(Trung Sisters)라 불리는 쫑짝(Trung Trac)과 쫑니(Trung Nhi) 자매들의 대한투쟁이 그러했다. 코끼리를 타고 군대를 지휘하는 그림으로 묘사된 그들은 한때 현 북부베트남의 일정지역을 통치하기도 했으나 한나라 군대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쫑 자매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핫 강(Sông Hát)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이후에도 중국의 통치는 계속되서 베트남은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기도 했지만,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베트남에 있어서 유고의 국가적인 수용 및 보급은 대략 1800년대에 있던 19세기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 부분에 있어서 베트남이 우리보다 유교 수용이 더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의 역사를 저항의 역사로만 아는데, 그저 베트남이 외세의 저항만 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 역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베트남의 역사는 경쟁국 참파(Champa)와 경쟁하고 그곳을 정복해 나가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를 정리하자면 베트남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와 참파 문명과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이 존재했던 베트남 남부는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인종적으로 엄연한 구분 점이 있고, 그런 구분은 현재 베트남에도 적용이 가능할 정도다. 우리의 역사에서 정복의 역사는 대마도 정벌과 나선 정벌로 끝이 난다면 베트남은 최소 17, 18세기까지 남부로 향하는 정복의 역사가 있으며 남북이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으로 확연히 구분이 된다.

 

베트남의 경우 우리와 달리 대략 54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가장 세력이 강한건 베트남 인구의 87%를 담당하고 있는 킨족(비엣족, Kinh)이다. 다수의 종족인 킨족 이외에 소수민족으로는 캄보디아 쪽인 크메르족(Khmer)과 참파왕국의 참족(Chams) 그리고 중국인 화교가 평지에 살고 있고, 북부베트남 지역에도 눙족(Nung)을 비롯하여 여러 중국계 소수민족들이 존재한다. 그 외에도 라오스 쪽에 가까운 라오족(Lao)과 몽족(Hmong) 그리고 베트남 중부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에데족(Ede)과 자라이족(Jarai) 바나족(Bahnar)으로 대표되는 산지민(Montagnard)들이 존재한다. 즉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우리와 달리 소수민족들이 동화가 되면서 자신들만의 종족성을 유지하며 살아온 사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의 역사에서 우리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외세를 자력으로 무찔렀다는 점과 무찌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국가를 자주적으로 통일했다는 점과 통일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선 베트남인들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나온다. 그 독립운동 역사에는 우리 역사에서 백범 김구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Phan Bôi Chau)같은 인물부터 개혁가 판쭈찐(Phan Chu Trinh),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전설 호치민(Ho Chi Minh)등이 있었고, 이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 보다 사회주의 계열이 중심이 되어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와 유사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국의 독립을 주체적으로 이룩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베트남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베트남내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시기 국내 혹은 국외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이론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해 필자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베트남의 경우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 현재 베트남 남부인 코친차이나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에서도 독립운동사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민을 이끌던 호치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전한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항복식 날짜에 맞춰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가 들어와 식민지화의 야욕을 드러냄에 따라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지만, 8년간의 항쟁 끝에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승리함에 따라 100년 간의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통치를 종결시켰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 들어와 남베트남 괴뢰정권을 지원했지만, 대략 15~20년이라는 기나긴 독립 투쟁 끝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이점에 있어서 일제 패망 이후 외세가 들어와 분단된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분단의 비극을 겪고, 지금까지도 통일되지 못한 우리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베트남의 역사는 대략 1000년간 중국에 맞서 투쟁을 해온 저항의 역사다. 물론 참파와의 경쟁에서 남진(Nam tiến)이라 하여 남부 지역을 평정하기도 했지만, 당시 베트남은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 이를 전력을 다해 방어했고 물리쳤다. BC 111년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베트남은 938년 응오꾸옌(Ngô Quyền)이 바익당 강 전투(Battle of Bạch Đằng)에서 승리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됐다. 응오꾸옌을 중심으로 응오 왕조가 설립되었다. 즉 베트남은 서기 938년에 바익당 강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된 것이다. 응오 왕조 이후 968년에 대월국이 만들어 지면서 대략 900년간 지속되었다. 900년 기간 동안 딘 왕조, 쩐 왕조, 레왕조 등이 있었지만, 대월국은 응우옌 왕조가 나타나 국호를 베트남이라고 하기 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1200년대 몽골에서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그 몽골족들이 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설 때, 베트남도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다.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와 같은 베트남의 명장들과 민중들이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몽골군의 침입은 대략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287년에는 대략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베트남을 침공했었다. 물론 그들은 게릴라 전을 비롯한 탁월한 전략전술로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로부터 200년 뒤인 1400년대 중국의 명나라(Ming Dynasty)가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레 러이(Lê Lợi)와 같은 인물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고, 궁극적으로 명나라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다. 이처럼 베트남의 역사를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은 베트남의 역사와 싸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맞서 승리한 베트남은 이후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고립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했던 사회주의적 강제 집산화 정책을 남베트남에서 실행했는데, 오히려 생산성은 높아지지 않았고, 남부 농민들의 저항과 불만에 직면했었다. 그런 집산화 정책을 실행한지 10년이 되던 1986년 베트남 공산당 간부들은 도이머이(Đổi Mới) 정책을 실행하여 시장경제를 수용했고, 199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적이었던 대한민국과 미국하고 수교를 맺는다. 또한 베트남은 1978년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을 겪으며 캄보디아의 폴포트(Pol Pot) 정권을 전복시켰고, 1979년 중국하고도 전쟁을 벌여 대략 1980년대가 되어서 진정한 평화를 얻었다. 이런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베트남이 평화롭게 살게 된 것은 불과 40년도 안 되었다. 현재 베트남은 계속 성장중이다. 앞으로 베트남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베트남을 좋아하는 필자로선 베트남이 평화로운 시기를 거치며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번창하고, 균형 있게 발전했으면 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최근 박항서 열풍이 불면서 한국인들도 베트남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베트남의 휴양도시 다낭을 비롯하여 하노이와 하롱베이. 호치민 그리고 달랏등과 같은 관광지를 방문하게 되는 한국사람들이 2000년대 보다 훨씬 많아졌다. 즉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또한 적잖은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고 공부하며 또 결혼을 목적으로 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과 베트남은 많은 부분에서 교류가 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동남아시아인들을 일종에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에서 편견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그 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의 부재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알면 그렇게 판단할 수가 없다. 필자는 이번에 베트남의 전반적인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들의 대단한 역사에 많이 감탄했다. 유인선 교수가 집필한 이 책은 베트남도 굉장히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매우 높다. 아무튼 베트남의 역사를 잘 알수 있는 기회였다. 내년에 베트남 갈 때 이 책도 같이 들고 갈 생각이다. 베트남을 알고 싶어하거나 베트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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