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77일 베이징의 서남 교외의 노구교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고, 그해 813일에는 상하이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지만,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 탱크)

 

그해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도달한 일본군은 19371213일 난징의 청부청사가 함락되면서 일본군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난징을 완벽히 점령한 일본군은 이 시점부터 약 2개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인한 학살과 강간등의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쟁범죄는 당시 일본군의 주도로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난징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이 했던 전쟁범죄들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자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의 목베기 시합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100인 참수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전쟁범죄가 당시 일본의 언론에 의해 스포츠 특보마냥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목베기 시합에서 희생됐다.

(파놓은 땅에다 몰아넣고 중국인을 학살하는 일본군)

  

2개월간의 과정속에서 일본군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런 피해에 있어서 중국인 여성들 또한 무수히 많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이에 반항하면 일본군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난징 지역 곳곳에서 일본군의 강간과 살인 학살 그리고 방화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전투기들로 난징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만들었다

(목을 배놓고 기뻐하는 일본군)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자 당시 나치당원이던 존 라베(John Rabe)를 포함하여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하여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존 라베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 기업과 그리고 외교관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상하이 안전구를 본떠서 안전지대를 형성했고, 대략 25만 명 이상이 중국인이 이 피난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시합 기사)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로 인해서 살해된 사람은 비전투원 12000,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시민 5만 명 등을 합하여 13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소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수치의 정확성을 떠나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에 의해 죽었고,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난징 대학살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전개했다. 이 결과 총 15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중일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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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단상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공부하면, 일각에서 알려진 수천만명 학살자의 이미지는 지극히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2천만을 죽였네˝, ˝4천만을 죽였네˝와 같우 소리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돌고 하루에 4천명 혹은 한달에 4만명씩 학살했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극히 악마화된 수치다.

1980년대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에 수용된 인원은 약 200만 명이었고 그중 실제 정치범은 4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영미권 보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300만에 훨씬 못 미치는 16만 명이었으며, 그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 만이 아닌 약 10만 명이었다. 굴라그 수감자도 최대가 250만이었고, 이것은 1990년대 미국의 감옥보다 300만이나 적은 수치다. 즉 솔제니친 같은 허장성세들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최소 10배 이상은 과장한 것이다.

물론 스탈린 또한 대숙청 도중 과오도 있었고, 무고한 희생도 있었다. 근데 왜 이러한 과오가 있음에도 우익들과 수꼴들은 만족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본인들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악마새끼 스탈린˝의 이미지에는 뭔가 부적합한 수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평가는 그렇다 쳐도 그가 이룩한 무상 복지체제만큼은 세계적인 업적이고 재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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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기 동유럽과 서유럽)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에 맞서 인민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19세기부터 전 세계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쇠락을 의미했고,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급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미국은 자본가들의 기업과 이윤축적이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 국가였던 반면, 소련은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공공분야에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45년간의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서로가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문화적으로 경쟁했다.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역사 학계에선 미국의 개입보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과 노골적인 폭력이 더 많았다고 주장하고, 그 사례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러할까?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은 1946년 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했던 한 연설이었다. 처칠은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같은 윈스턴 처칠의 발언이 증명하듯이, 미국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시작으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 특히나 1945년 루스벨트 사망 후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발언이 있은 지, 1년 뒤인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한다.

(트루먼과 스탈린)

 

트루먼 독트린의 내용은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렇게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이에 소련 또한 반발하게 되자,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체제로 거듭났다. 미국은 소련을 단지 경쟁자가 아닌 직접적인 위협으로 제시했지만, 그러나 이 냉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과 개입을 행사했던 것은 스탈린(Stalin)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우익 군주독재국가였던 그리스는 나치가 물러난 직후 영국이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좌익 민족해방전선을 제제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리스에선 좌익 게릴라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리스 좌익은 대략 25만 이상이나 되는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사태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그리스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영국은 미국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트루먼 독트린’에 의거하여 그리스의 우익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아테네 우익 정부에게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만 4000톤에 달하는 군사장비를 보내줬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미군사고문단을 전투현장에 보내 1949년 그리스 좌익을 붕괴시키고 우익독재 정부를 세웠다.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수송하는 미항공기)

 

미국의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불안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다. 특히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서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서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1948년 이탈리아가 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것 같자 미국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만일을 대비해 과거의 파시스트들을 끌어모아 무장 지하 조직인 글라디오(Gladio)를 건설했으며,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을 계획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철수하자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선 다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에 조지 C. 마셜 장군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화해 및 중재를 시도했었지만,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내전이 시작되자, 태도가 급변했다. 중국 민중은 부패한 관료집단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선택하기보단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싸웠는데,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이어졌다. 미국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을 실시한 이래로, 한반도 이남의 자주적인 조직과 단체들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에따라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들이 통일 운동과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방해함에 따라,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인 결정권은 무시됐다. 이렇게 해서 미군의 탄압으로 대구와 제주도 여수순천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 통일 당시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도 개입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 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 해방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써 접근했고, 프랑스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1950년 초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000만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신 감당했지만,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이러한 전쟁 비용은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에 이르렀다. 미국은 필리핀 문제에도 개입했었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인 총선으로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가 미국에 의존된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아르벤스의 반대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었다. 1951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와 미국 관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경우는 이보다 확장력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소련이 자신들의 체제를 전파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였는데, 이들의 경우는 스탈린의 조언에 거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당시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안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 군대가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냉전 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형성한 사회주의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붉은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 국한됐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미국의 반공정책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조처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미국은 소련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개입과 간섭을 했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논리가 절대로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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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1930년대 중후반부부터 한반도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물적수탈에 이어 이때부터는 지원병제ㆍ국민정신총동원령 등 인적 수탈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4월 일본이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24살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혼과 연령이 초과되어 입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인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습니다!’라는 혈서를 써 입학했다. 그가 바로 소위 국내 수구세력들이 황제나 신을 다루듯이 모시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다.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0년대 교사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형 박상희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을 지낸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성향의 지역 엘리트였지만, 자신의 형과는 다르게 박정희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 당시 일본 육사는 침략전쟁의 기간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고, 박정희가 지원한 만주군관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이 학교에 지원하면서 쓴 혈서의 내용은 친일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조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출처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p.60~61

1940년 박정희가 입교한 만주군관학교는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든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 교외 라라툰에 있었다. 당시 제2기생은 만계와 일계가 각각 240명씩 도합 480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박정희를 포함하여 모두 11명이었다. 그리고 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 이주일ㆍ김동하ㆍ윤태일ㆍ박임항ㆍ방원철 등 5명이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신진군관학교 예과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제3련 제3구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3월에 졸업했다. 당시 만선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보면 다카키 마사오라고 불리는 인물이 240명의 졸업생 중에서 수석졸업의 우수성을 보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 다카키 마사오가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있으면서 1936년 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군으로 밀려난 일본인 장교 간노 히로시 소령과 만났었다. 2.26 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인 노나카 시로 대위와 청년 장교들이 14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했던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는 이런 2.26 사건의 주모자랑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나중에 1961년 5.16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튼 당시 만주군관학교 우등생이었던 박정희는 그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과 2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가 졸업할 때는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견습사관으로 임관되어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됨으로써, 2개월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박정희가 속해 있던 부대는 일본군과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토벌하는 일에 나섰고, 박정희도 그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의 팔로군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중국공산등 주력군이었고, 이들 중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팔로군에 합류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분명한건 중국의 팔로군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군이었고, 조선 청년들 또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팔로군에서 활약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정희는 그들을 토벌하는 일본군이었다. 심지어 국제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을 인터뷰 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출처 : 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p.71

 

당시 일본군으로 글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에는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항일군대를 토벌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그는 명백히 친일 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4년 중국 팔로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박정희는 승승장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그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병 8단 예하 부대와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항려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그러나 독소전쟁에서 단련이 된 소련군은 8월 9일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공격한 이래로 1주일 만에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박정희의 군대는 소련군과 교전을 치르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이래로부터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의 삶을 보냈다. 그는 혈서를 써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걸 성취해냈다. 또한 1944년부터는 중국 항일군대인 팔로군을 토벌함으로써, 친일행각을 보였다. 따라서 박정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 낸 친일 인명 사전에 나오듯이 명백한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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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2019년 남미에서 가장 긴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 칠레는 대규모 항의시위에 휩싸였다. 수많은 칠레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였고, 그 시위는 2020년인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되고 있다. 칠레는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나라다. 유엔 중남미ㆍ카리브경제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가 전체 국가 부의 26.5%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가 차지하는 부는 전체의 2.1%에 불과할 정도로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칠레의 최저임금이 한국 돈으로 49만원 정도이지만, 민중의 53%62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있고 231만원 이상을 버는 샐러리맨은 칠레 인구 전체의 6.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다 대학 등록금은 비싸고 의료보험과 약값도 비싸기에 일반 민중의 부담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칠레의 상류 계급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축적을 하고 있기에, 칠레 민중들은 이에 분노하여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빈부격차와 기업의 착취적 이윤창출로 인하여 민중의 불만이 극심한 칠레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사회주의자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 칠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살바도르 아옌데는 참으로 매력적인 생애를 가진 인물이다. 1908년 칠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처럼 의대에 입학했고, 군복무와 의대시절의 경험 그리고 각종 반정부 시위를 통해 사회 비판적 의식을 길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칠레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쳤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부터는 칠레의 상원의원을 지냈다. 칠레 사회당에서 정치경력을 쌓은 그는 3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1952년과 1964년 대선에선 칠레 좌파계열의 분열과 보수진영의 방해공작으로 패배했었다. 1970년 그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칠레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그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다.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고,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초기 아옌데의 정책으로 칠레 경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호황을 누렸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정책이었다. 따라서 아옌데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진보적인 조치들을 단행해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바로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반공의식을 가진 미국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들이었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미국과 CIA였다.

 

결국 미국은 1973년 우익 출신 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이용하여 군사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수도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되었다. 피노체트 휘하의 반혁명 세력들은 아옌데가 있던 대통령궁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를 보내 아옌데 측 군대를 진압했다. 아옌데 또한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47 소총을 들고 반혁명 군대와 총격전을 벌였지만,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 19739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아옌데는 반혁명 군대와의 대치속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중 일부를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긑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검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36에서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일부 발췌

 

아옌데가 죽고 난 이후 칠레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피노체트와 그의 주구들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새 수십만 명이 체포, 구금됐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병사들은 총살되었으며,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은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살해됐다. 칠레 좌파 정당의 평당원이나 노동조합 조합원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살해됐고, 이들 중 어린이 수십 명도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살해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 보복을 가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더 나은 미래와 이상적 사회를 꿈꾸던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이들도 삶을 마감했다. 피노체트가 아옌데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또한, 그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이렇게 피노체트는 친미주의를 유지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피노체트부터 시작된 칠레의 정부는 무능했고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칠레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초과이윤을 위한 소수 자본가들의 극심한 민중 착취 체제다.

 

칠레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심한 불만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은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남긴 유산을 지우려 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칠레 사회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면서 아옌데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존재는 미국이라는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정권을 어떻게 파멸 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주기도 한다. 아옌데의 비극적 죽음과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악랄함과 사악함이 칠레를 어떤 비극으로 몰고 갖는지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옌데의 존재는 사회주의자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비록 아옌데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사회주의자가 민중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았을 때 가지고 올 변화가 무엇인지 집권 기간 3년을 통해 보여줬다. 그는 칠레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노후연금과 질높은 교육, 외세의 기업적 착취 및 인권유린 종결,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질높은 소비재 보급을 추구했고, 실제로 짧은 기간에 그걸 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칠레 우익 부르주아 계층의 도움 없이 이룩한 아옌데의 업적이었다. 아옌데가 추구했던 정신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누려야할 당연한 인권이기도 하다.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집필한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혁명가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민중의 인권과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명저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사회주의적 열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글 앞부분에서 상술했듯이 현재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적 내부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아옌데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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