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1930년대 중후반부부터 한반도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물적수탈에 이어 이때부터는 지원병제ㆍ국민정신총동원령 등 인적 수탈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4월 일본이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24살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혼과 연령이 초과되어 입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인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습니다!’라는 혈서를 써 입학했다. 그가 바로 소위 국내 수구세력들이 황제나 신을 다루듯이 모시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다.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0년대 교사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형 박상희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을 지낸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성향의 지역 엘리트였지만, 자신의 형과는 다르게 박정희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 당시 일본 육사는 침략전쟁의 기간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고, 박정희가 지원한 만주군관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이 학교에 지원하면서 쓴 혈서의 내용은 친일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조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출처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p.60~61

1940년 박정희가 입교한 만주군관학교는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든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 교외 라라툰에 있었다. 당시 제2기생은 만계와 일계가 각각 240명씩 도합 480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박정희를 포함하여 모두 11명이었다. 그리고 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 이주일ㆍ김동하ㆍ윤태일ㆍ박임항ㆍ방원철 등 5명이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신진군관학교 예과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제3련 제3구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3월에 졸업했다. 당시 만선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보면 다카키 마사오라고 불리는 인물이 240명의 졸업생 중에서 수석졸업의 우수성을 보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 다카키 마사오가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있으면서 1936년 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군으로 밀려난 일본인 장교 간노 히로시 소령과 만났었다. 2.26 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인 노나카 시로 대위와 청년 장교들이 14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했던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는 이런 2.26 사건의 주모자랑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나중에 1961년 5.16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튼 당시 만주군관학교 우등생이었던 박정희는 그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과 2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가 졸업할 때는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견습사관으로 임관되어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됨으로써, 2개월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박정희가 속해 있던 부대는 일본군과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토벌하는 일에 나섰고, 박정희도 그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의 팔로군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중국공산등 주력군이었고, 이들 중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팔로군에 합류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분명한건 중국의 팔로군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군이었고, 조선 청년들 또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팔로군에서 활약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정희는 그들을 토벌하는 일본군이었다. 심지어 국제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을 인터뷰 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출처 : 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p.71

 

당시 일본군으로 글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에는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항일군대를 토벌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그는 명백히 친일 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4년 중국 팔로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박정희는 승승장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그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병 8단 예하 부대와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항려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그러나 독소전쟁에서 단련이 된 소련군은 8월 9일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공격한 이래로 1주일 만에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박정희의 군대는 소련군과 교전을 치르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이래로부터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의 삶을 보냈다. 그는 혈서를 써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걸 성취해냈다. 또한 1944년부터는 중국 항일군대인 팔로군을 토벌함으로써, 친일행각을 보였다. 따라서 박정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 낸 친일 인명 사전에 나오듯이 명백한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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