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서남 교외의 노구교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고, 그해 8월 13일에는 상하이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지만,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 탱크)
그해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도달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 난징의 청부청사가 함락되면서 일본군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난징을 완벽히 점령한 일본군은 이 시점부터 약 2개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인한 학살과 강간등의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쟁범죄는 당시 일본군의 주도로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난징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이 했던 전쟁범죄들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자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의 목베기 시합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즉 ‘100인 참수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전쟁범죄가 당시 일본의 언론에 의해 스포츠 특보마냥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목베기 시합에서 희생됐다.
(파놓은 땅에다 몰아넣고 중국인을 학살하는 일본군)
2개월간의 과정속에서 일본군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런 피해에 있어서 중국인 여성들 또한 무수히 많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이에 반항하면 일본군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난징 지역 곳곳에서 일본군의 강간과 살인 학살 그리고 방화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전투기들로 난징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만들었다.
(목을 배놓고 기뻐하는 일본군)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자 당시 나치당원이던 존 라베(John Rabe)를 포함하여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하여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존 라베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 기업과 그리고 외교관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상하이 안전구’를 본떠서 안전지대를 형성했고, 대략 25만 명 이상이 중국인이 이 피난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시합 기사)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로 인해서 살해된 사람은 비전투원 1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시민 5만 명 등을 합하여 13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소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수치의 정확성을 떠나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에 의해 죽었고,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난징 대학살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전개했다. 이 결과 총 15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중일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