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 66주년 글

지금으로 부터 66년 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디엔비엔푸 요새가 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1946년 프랑스가 함대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을때, 전쟁의 승자가 베트남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본적으로 장비와 무기면에서 프랑스군에 딸렸던 베트민은 프랑스군으로 부터 노획한 것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가 지원했던 무기를 들고 싸웠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그때부턴 중국에서 지원한 장비와 무기들이 들어왔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든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세워 방어선을 구축했고, 1600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투입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사와 이를 자발적으로 돕는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의 도움을 받아 디엔비엔푸 요새를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1954년 3월 13일 200대의 대포가 디엔비엔푸 요새에 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갔다.

5월 초 베트민군은 디엔비엔푸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했고, 5월 7일 베트민은 카스트리 장군과 수십명의 장교를 포함한 11000명의 프랑스군 정예부대를 포로로 붙잡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진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구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던 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프랑스에 빌붙었던 반공주의적 민족반역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들이 바로 남베트남의 지도부와 군관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던 프랑스가 물러나자 섬기는 주인을 미국으로 바꿨을 뿐이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후에 있을 베트남 전쟁이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대 반식민주의‘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기존의 강제 징용 관련 판결 이후 일본이 대한민국 국내 기업에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수출을 규제하면서 시작된 한일갈등은 대한민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일 불매운동에 참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반일불매운동이 한참이던 작년 여름 국내의 서점들에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서적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 책들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흥망을 다룬 존 톨랜드(John Toland)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도 있었다. 14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의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불매운동이라는 정치적 흐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책을 팔지 않은 서점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워낙 많은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보니 필자도 이 책에 흥미를 느꼈다. 지난 학기 대학 생활을 열심히 했던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압도적인 분량과 비싼 가격 그리고 학교생활에 밀려 읽지 못했고, 올해 2월이 되서 읽게 됐다.

 

필자가 태평양 전쟁이라는 주제를 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시절 필자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FPS 게임인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 Medal of honor Pacific Assault><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Call of Duty World at War>를 아주 재밌게 했었는데, 이 게임들은 태평양 전쟁의 신화화된 미군의 이미지와 태평양 전쟁의 분위기를 느끼는 데는 충분했던 것 같다. 10대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던 필자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생겨 영화로는 <진주만: Pearl Harbor>, <핵소고지: Hacksaw Ridge>,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 <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 <윈드토커: Wind Talker> 그리고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미드웨이: Midway>까지 해서 여러 편의 태평양 전쟁 영화를 감상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HBO에서 제작한 <더 퍼시픽: The Pacific>이다. 태평양 전쟁을 주제로 한 몇 편의 다큐멘터리로 감상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3부작짜리 다큐인 <태평양 전쟁 비사 일본침몰>이다.

 

위에서 상술한 대로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태평양 전쟁사를 알게 되었지만, 정작 이것을 주제로 한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소방서 공익 시절 영국의 전쟁 사학자 존 키건이 쓴 제2차세계대전사를 읽어보긴 했지만, 그 책 자체가 태평양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다른 주제들 보다는 훨씬 소홀히 다루었기에 태평양 전쟁을 공부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에서는 태평양 전쟁 자체를 통사로 다룬 책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쇼와 육군을 포함한 몇몇 책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일본인들 시각에서 일본의 패망을 분석한 책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거의 2~3달에 걸쳐서 읽은 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는 참으로 의미가 크다.

 

책은 1936년 기타 잇키를 포함한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주도했던 2.26 쿠데타부터 시작한다. 2.26 쿠데타의 실패에서 1937년 중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노구교 사건으로 넘어간 뒤, 난징 대학살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잠시나마 언급한다. 그 이후엔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해 달리던 국제정세 속에서의 일본의 외교관계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까지의 국내 및 국외적 상황과 이유를 조명했다. 이런 서술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는 과정, 일본과 소련이 중립조약을 체결하게 된 과정, 미국이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나빠지는 과정 등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일본의 외교활동과 미국과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존 톨랜드 특유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알기 쉽게 사건을 설명한다. 책의 1/3 내지는 1/4에 와서는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과정을 얘기하고, 그 이후 필리핀 전투에서의 패배와 자바 해전에서의 패배를 포함한 영미 세력의 패배를 박진감 있게 서술한다.

 

그러다가 이 책은 19424월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단행했던 두리틀 공습을 다루더니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 해군의 대패를 설명하고, 솔로몬 군도 즉 과다카날 전투에서의 일본군 패배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룬다. 과다카날 전투를 끝낸 뒤, 책은 빅3(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테헤란 회담을 다루면서 이들의 흥미진진한 협상과 개인적 대화를 아주 흥미롭게 파헤쳤다 그다음부터는 1944년으로 넘어가 마리아나 상륙과 사이판 전투, 레이테만 해전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전투를 상세하게 다룬다. 일본의 패망해가는 시점인 1945년에 있던 얄타회담과 이오지마 상륙작전, 도쿄 폭격, 오키나와 전투, 포츠담 회담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까지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19459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책은 내용은 끝난다.

 

오래전부터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본이 자신들보다 훨씬 경제 및 군사적으로 강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는지는 정말 의문이었다. 그 이유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지도부도 자신들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질 거라는 사실을 대체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것 하고는 분명히 달랐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것은 본인들이 질 거라는 예상 및 전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6개월 내지는 1년 내외로 소련은 독일군의 우수한 화력에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런 전망을 내놓은 것은 비단 독일 뿐만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영국이나 미국도 이와 같은 전망을 내놓기도 했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패배를 예상하고 감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패배를 전망하며 천운을 걸고 감행한 짓이었다. 심지어 일본의 해군 함대를 이끌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미국과의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 질 거라는 생각했다. 거기다 일본이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아래 일으켰던 아시아에서의 침략 전쟁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에 의존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에서 고전하던 일본군은 1940년과 1941년에 이르러 미국으로부터 석유 수입에 경제적인 제재를 받았다. 미국이 일본에게 행한 석유 수입 제재는 일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일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아예 미국을 굴복시켜 유리한 조건을 얻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미국 또한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로 있던 조셉 그루는 1941년 당시 미국에게 일본이 미국과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보로 보냈다.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진주만 기습 공격의 진정한 목표는 미해군을 무력화 시켜 태평양 일대를 단기간에 장악하고 더 나아가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여 일본이 유리한 조건을 차지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본은 하와이에 정박해있던 미해군의 주력 함대들을 격파해야 한다 생각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군 함대 18척이 침몰하고나 심하게 파손되었고, 항공기는 188대가 파괴되었으며 159대가 손상되었다. 이 공격에서 2403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의 손실은 항공기 29대와 소형 잠수정 5척 파괴 항공기 승조원 45명과 잠수정 승조원 9명이 전사했고, 사카마키라는 일본군 소위 한 명이 미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진주만 기습 공격은 일본측에게 대대적으로 선전거리가 되었다. 일본은 이를 국민들에게 우리가 미국과 영국에게 혼쭐을 내줬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를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가장 큰 패착을 놓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주력 항공모함 3척을 파괴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은 주력항모 3척 중에 요크타운호 1척이 침몰당했지만,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지름길이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군은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한 집단이었다. 예를 들어 과다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물에다 독을 타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고, 무모한 반자이 돌격(Banzai Charge)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폭탄을 매고 미군에게 뛰어들어 자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상전에서도 미군에게 밀렸다. 예를 들어 과다카날에서 있던 한 전투에선 일본군 전차 9대가 미군 포병들의 반격으로 파괴됐는데, 그중 강을 건너 살아남은 한 대도 75mm 대전차포에 파괴됐으며, 600명의 일본군 보병이 전사했다. 과다카날에선 일본군 8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 35명이 전사하고 75명이 부상당한 전투도 있었다. 드라마 <더 퍼시픽>에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194210월 일본군은 야간에 대대적인 반자이 돌격을 감행했지만, 수천 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과다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25000명이나 전사했고 이것은 미군의 전사자 비율보다 몇 배는 훨씬 더 많은 수치였다.

 

그 외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일본군이 섬에 상륙한 미군에게 아주 처참하게 패배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1943년 타라와 전투에선 미군 1000명이 전사했지만, 일본군은 최소 5000명이 전사했다. 필리핀 탈환 작전에서도 일본군은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밀렸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마에다 능선에서의 교전에서 미군은 탱크와 장갑화염방사차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기서 500명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초반에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전사하더니 병력 1/3을 잃기도 했었다. 이처럼 일본군은 지상전에서 미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고, 이것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던 미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이 책은 일본군의 잔인한 전술이나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를 생각보다 아주 잘 다루고 있다. 위에서 잠시나마 언급했던 난징 대학살에 대해 20~30만 명이 중국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언급하며 일본군의 잔인함을 강조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맥아더가 경험했던 필리핀에서의 패배는 수천 명의 미군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는데, 여기서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포로학대 및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다 죽어나갔다. 일본군은 총검으로 지쳐서 쓰러진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데 어떠한 인간적인 고민이 대체로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전세가 역전되면서 자국 국민에게도 미군을 상대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대표적으로 사이판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그랬다. 2200여 명이나 되는 일본의 민간인들이 사이판 전투에서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무모한 짓거리를 보던 한 미군 장교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그녀에게 시체들을 보고 싶은지 물었다. 그리고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두 흑인 병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절벽으로 데려갔다. 절벽 아래로 시체들이 무리를 지어 물가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여자는 자기 몸에 두 아이를 끈으로 묶은 채 죽어 있었다. 혼잣말을 하듯이 장교는 일본인들은 왜 자살을 하죠?”라고 물었다. 그의 볼에는 눈물이 흘렀다.

 

출처 : 일본 제국 패망사 p.801

 

대략 2달간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은 자국 민간인들에게 미군을 악마로 그렸는데, 이러한 선전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군을 아주 두려워하게 만들며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 수만 명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미군과 일본군이 전개한 전투에서 사망했고, 일본군의 잔인한 수법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나갔으며 자살을 하게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르게 된 마지막 전투는 정말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고, 미군 또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게 됐다. 물론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는 죽기보단 미군에게 항복을 한 민간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기 보단 살고자 했다. ‘일본 제국 패망사에선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투항한 사람은 나카소네 외에도 많았다. 다음 주가 되자 최소 3천 명의 군인과 노무부대가 미야기 오장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오장과 같이 자원한 다른 일본인들이 동료들을 구하러 계속 땅속 깊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부한 이들은 화염방사기와 폭약으로 동굴에 갇혔다. 9000명의 군인들이 죽었다. 72, 오키나와 작전은 끝났다. 3개월 동안 12520명의 미 육군, 해병대, 해군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태평양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일본은 11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 수도 유례없는 비율이었다. 양국의 군대 사이에 낀 약 75000명의 무고한 남성, 여성,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헛된 희생이었다. 일본은 본토 밖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전투에서 패배했다.”

 

출처 : 일본 제국 패망사 p.1100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이해하기 힘든 작전들과 무모한 인명 피해를 강요하고 초래하기도 했지만, 항복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던 일본군들 중 살아서 포로가 되길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1944년부터 일본은 미군 함대를 상대로 소위 가미카제(Kamikaze)’라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게 됐다. 이 전술은 항공기에 탑승한 일본군 조종사가 폭탄과 기름을 실은 비행기를 미군 항공모함이나 군함에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이들도 분명 있었다. 자살 돌격하려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공중에서 낙하산을 매고 탈출한 이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그 외에 지상에서 싸우던 일본군들도 포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소위 명예로운 죽음(Honorable Death)’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지휘가 높은 사람들은 명예로운 죽음이라 하여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검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죽어갔고, 머리에다 권총을 쏴서 죽기도 했다. 이러한 죽음은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자살 방법이었다. 이런 자살 방법은 19458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책의 후반 부분에 와선 포츠담 회담과 일본이 항복하기 까지를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고 위에서 상술했다. 후반부를 읽다보면 계속 드는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은 바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것이다. 미국이 떨어뜨린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최소 20만 명이 사망했다. 아무리 태평양 전쟁을 끝내기 위한 방법이었다지만, 원자폭탄 투하는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군사 시설이 거의 없는 도시에다 투하했다는 점에서 도덕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위에 상술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인한 미해군의 피해도 극심했다. 실제로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처럼 일본 본토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상륙작전에서 최소 50만에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잃을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 기준으로 일본에는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존재했다. 비록 대부분이 훈련기에서 급하게 개조된 것이었지만 10,000대가 넘는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53개의 보병 사단과 25개의 여단 그리고 총 235만 명의 병력이 일본 본토에 남아 미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들은 특수 위수부대 25만 명 그리고 민간의용대 2800만 명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용대의 경우 사용할 무기들은 화승총과 죽창, 봉건시대의 활과 화살이 전부였다. 쉽게 말해 민간의용대는 무장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미군이 일본에 상륙했더라면 시간은 오래 걸릴지 모르더라도 분명히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빨리 투하한건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을 때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 사망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한 이후 미국과 소련의 사이는 보다 멀어졌다. 여기서 미국은 소련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유를 떠나서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본 제국은 19458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공식적인 항복 절차는 9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밟게 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은 참으로 참혹하고 잔인했으며, 양측의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에서 상륙작전을 했던 미군은 쥐, 거미, 모기, 지네, 거머리, 대형 도마뱀, 전갈 그리고 악어까지 있는 악조건 속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미군은 일본군 양측은 말라리아같은 질병에 노출되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더 퍼시픽>의 분위기가 다른 것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경우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징용으로 끌려가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여성들의 경우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팔려가 끔찍한 성범죄를 경험했다.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으로 태평양 전역에 끌려갔다. 미크로네시아와 같은 남양군도와 파푸아뉴기니 같은 태평양에 있는 섬들부터 시작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심지어는 사할린까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우리에게도 상처를 준 전쟁이었다. 그래도 책 마지막에서 시게미쓰 마모루가 언급된 구절에서 수년 전 상하이에서 한 암살자의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다.”라는 구절은 참으로 반가웠다. 이것은 윤봉길 의사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감수자의 주장대로 태평양 전쟁 통사로써 나온 책을 찾아보긴 어려운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많은 분량과 방대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저자 특유의 매끄러운 필력으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쉽다. 번역도 아주 좋다. 책을 읽는데 거의 2~3달이 걸렸다. 이 책을 읽어가며 다른 책들도 읽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존 톨랜드 특유의 매끄러운 필체와 흥미진진한 전개 때문에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지금까지 해본 태평양 전쟁 게임과 감상한 영화들 그리고 다큐멘터리까지 다 생각이 났었다. 그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을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일을 기념하는 베트남측 포스터, 대다수의 북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73123일 북베트남의 외무장관인 레둑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파리평화조약(Paris Peace Accords)’을 맺었다. 이들이 맺은 파리평화조약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철수하는 것을 뜻했다.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트남에 있던 미군은 완벽히 철수하게 됐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에 포로로 잡혔던 미군들은 전부 다 석방됐고, 1973329일에는 마지막으로 몇 안되는 미군이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에는 20년 전 미국이 거부했던 제네바협정에 따라 대략 50명의 미군사고문단만이 베트남에 남았다. 즉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년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미군을 철수시킨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민족 영웅인 호치민(Ho Chi Minh)이 평생을 이루고 싶어 했던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어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정권을 경제 및 군사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412월 중순 수도 하노이에서 14명 이상의 노전사들이 팜구라오가 33번지의 한 건물에 모였다. 이들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반티엔둥 장군, 반티엔둥 장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로 1975년 호치민 캠페인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전설적인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은 남베트남 인민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해방투쟁에 차질이 없도록 조심하자고 당부했다. 북베트남군 총사령관인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장군은 최근의 군사 상황을 보고했고, 이 보고를 들은 참석자들은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가 남베트남의 푹롱(Phuoc Long) 성에 대규모 공세를 취할 것에 대해 거론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예비 점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남베트남 내부에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평화 조약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한달에 평균 1000명씩 전사했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무능함을 보였다.

(푹롱성 전투 지도, 푹롱성의 함락은 남베트남에게 있어서 1972년 부활절 공세 이후 처음 있는 성 함락이었다.)

  

197412월 중순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푹롱 성을 공격했다.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공격한 푹롱 성을 공격한 지 3주만인 197517일 성도 푹빈(Phuoc Binh)을 점령하면서 승리했다. 푹롱 성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미 국무부는 하노이가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했다.”라고 하며 비난했지만, 미국의 군사적인 개입은 전혀 없었다. 남베트남측이 성 하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1972년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베트남군의 푹롱 성 점령 이후 몇 주일 사이에 대략 15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을 통해 내려와 남베트남 국경지대에 주둔했고, 남베트남의 44개 성의 중심지 대부분은 베트콩이 장악한 상태였다. 또한 푹롱 성을 장악함으로써 북베트남군의 사령부는 남쪽 깊숙이 호치민루트 근처에 산재해 있던 30만 명의 병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지도, 중부고원지대 닥락 성에 있는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핵심 거점이었다. 부온마투옷의 함락은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병력을 모은 북베트남군은 19753월 남베트남군의 거점인 부온마투옷(Ban Me Thuot)를 점령하고자 했다.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이 함락되면 남베트남군의 전반적인 방어선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대략 3만 명 이상의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에서 몇 마일 외곽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1975310일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는 부온마투옷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북베트남군의 대포와 로켓포가 공격을 가하자 남베트남군 23사단 본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북베트남군은 비행장을 점령했다. 북베트남군이 공격하자 포위당한 남베트남군은 포위당한 지 30여 시간 만에 항복했고, 공격 시작 5일 만인 315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을 완벽히 장악했다.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인 부온마투옷이 공격 5일 만에 함락되자, 북베트남군은 중부 해안 지역의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부온마투옷을 향한 공격이 시작된 지 5일 만에 중부 고원 지대를 포기한다고 통보했다. 이런 통보가 있은 지 2일 후 남베트남 정규군은 명령에 따라 플레이쿠와 콘툼을 버리고 후퇴했다. 이렇게 되자 북베트남군은 전투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197532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공격했다. 이들은 옛 황궁의 보존된 도시인 후에를 포위했고, 325일 후에를 점령했다.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이 28일간 후에를 점령했던 이후 6년 만에 다시 점령한 것이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당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군 전차)

 

반 티엔 둥 장군은 10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다낭에 3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다낭에는 피난민들이 몰렸는데, 미 국무부는 민간 비행기를 이용해서 10만 명의 남베트남군과 피난 가는 민간인들을 인솔했다. 후에가 함락된 이후 남베트남군 사령관은 도주해 버렸고, 나머지 장교들도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1975330일 다낭도 후에처럼 함락되었고, 다낭을 지키고 있던 10만 명의 남베트남군 병사들 대부분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

 

19754월이 되었을 무렵 남베트남 국토의 절반은 북베트남에 점령당했고, 남베트남 병력 15만 명은 전투부대의 기능을 상실했다.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한 지 1달도 안 되어 남베트남의 절반을 차지한 북베트남측은 호치민의 생일인 519일까지 수도 사이공에 입성할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4월 첫째 주에 접어들자 해안 거점들이 하루에 하나씩 함락됐다. 처음에는 퀴논(Qui Nhon)이었고, 다음에는 투이호아(Tuy Hoa) 그 다음날에는 나짱(Nha Trang)을 북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북베트남군의 진격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남베트남군은 중부고원지대의 끝자락 중심에 있는 쑤언록(Xuan Loc)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쑤언록 전투, 쑤언록은 베트남 통일 전쟁에 있어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이다.)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레민다오 장군, 남베트남의 레민다오 장군은 쑤언록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은 무너졌다.)

 

197549일 반 티엔 둥 장군 휘하의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마지막 거점지라고 할 수 있는 쑤언록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4만 명의 북베트남군 병력이 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쑤언록을 지키고 있던 남베트남군의 제18사단장 레민다오(Le Minh Dao) 준장은 전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북베트남군은 쑤언록을 단기간에 함락시킬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421일까지 계속됐다. 쑤언록이 함락된 이후 북베트남군의 총 공세가 시작된 지 44일 만인 23일에는 남베트남 측 44개성이 완전히 함락되거나 포위됐다. 즉 수도 사이공만이 남았던 것이다

(후퇴하며 남베트남군이 버리고 간 군복과 군화들)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 당시의 남베트남 지도, 부패하고 무능했던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서 상대가 안됐다.)

 

1975421일 남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응우옌반티에우는 몰래 떠났다. 과거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모은 금괴 2톤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26일에는 1963년 응오딘지엠을 축출했던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정권을 이어받게 됐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군은 425일 사이공 근처 30마일에 펼쳐진 방어선을 휩쓸었고, 남베트남에 있던 각국의 대사관들도 하나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각 방면에서 포위를 좁혀가며 수도 사이공을 압박했다. 이렇게 사이공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미국은 소위 속풍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전개하여 남아 있던 미국인들을 헬리콥터에 태우고 도망쳤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떠나는 미국측의 헬리콥터)

 

1975430일 오전 75311명의 미국 해병대원이 마지막 미군으로서 대사관의 성조기를 가지고 베트남을 떠났다. 반 티엔 둥 장군의 병력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입성했다. 사이공에 입성한 북베트남군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사이공 시민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거리를 행진했다. 오전 11시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Type 59 tank)’ 한 대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들어섰다. 여기서 병사 1명이 발코니로 뛰어올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게양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서방 언론에 의해 생중계됐다. 이날 대통령궁에 있던 두옹 반 민 장군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렇게 해서 10000일간 지속되던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은 혁명 군대와 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고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이유 중 하나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에 따른 동남아시아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도미노 이론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이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1963년 응오딘지엠 정권이 내부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이처럼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는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를 막으려고 1964년에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었기에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첫번째 탱크를 따라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측 탱크들)

 

이는 현재의 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학계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일반적인 평가다. 이를 보여주듯이 남베트남 정권은 미군이 철수한지 2년 만에 붕괴됐고, 북베트남군이 전면적인 총공세를 가한지 1~2달도 안되어 방어선이 붕괴됐다. 1972년 북베트남군이 소위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을 때도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붕괴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었지만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이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미군의 항공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절대로 남베트남군이 잘 싸워서가 아니다. 거기다 남베트남 정권과 군대의 핵심인사들은 변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프랑스 식민지 시기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인물들이었다. 남베트남군 장교나 사령관들 대다수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들이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언론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리영희는 남베트남 정권과 북베트남 정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75년 5월 7일에 열린 베트남 전쟁 승전 기념 퍼레이드, 통일을 이룬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기억한 인물은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었다.)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 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콩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 운동가, 간호사, 각급 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단 한 사람도 식민지 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 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출처 : 대화 p.349~350

 

따라서 북베트남 측이 승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베트남이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크고 참혹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에 헌신했던 호치민은 1969년 투사로서의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호치민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그가 사망한 지 6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는 결코 패망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계승한 미국과 싸워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Ten Thousand Day War in Vietnam 1945~1975)’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책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책 마지막 장에 쓴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베트남 해방 승리 기념 포스터)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811월 자유한국당(현재는 미래통합당) 대표인 홍준표가 대통령인 문재인에 빗대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홍중표는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들먹이며 경제정책도 로베스피에르가 취했던 방식 그대로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국가 갑질 경제, 국가 간섭 경제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가 폭망한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라는 망발에 가까운 주장을 했었다. 더 나아가 그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온건 보수파가 완성했듯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막말로 입장을 마무리했다.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된 사례지만 수구세력의 연합체인 자유한국당 그것도 그 당의 대표를 맡는 사람 입에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써 로베스피에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로베스피에르는 매우 안 좋은 의미로써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가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다. 그는 1789714일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됐을 때부터,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민중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출판된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서술은 그리 자세하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이 봉기했다는 사실에는 강조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끌던 자코뱅에 대해선 독재나 처형이라는 수식어로 일괄하는 것이 한국에 나온 대다수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반영받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 귀족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봉건 귀족에 반대한 이유에는 본인들의 부르주아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함이라는 주목적이 있었다. 이런 부르주아의 열망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진보적인 가치들을 지향했다. 그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흑인 노예제와 식민지화에 대한 구제국주의적 움직임에 분명히 반발했고, 소위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인권과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국가 없이 떠돌며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주장했고, 옹호했다. 17929월 의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식민지 탄압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175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은 그가 노예제와 식민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유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록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153

 

자코뱅 독재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가 주장하던 방토즈 법 즉 유죄를 선고받은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방토즈 법을 통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다. 아쉽게도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업적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선 당대로서는 보기 드물 만틈 아주 대담하게 모든 사람의 노동권을 주장했다. 그는 권리의 평등을 원했고, 지나친 재산 축적이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권리의 평등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자유도, 사회적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재산에 대해서는, 일단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노동을 통해 생필품과 식량을 확보할 수만 있게 해준다면 자유의 벗들은 재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티테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을 시샘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들에게 아리스티데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재산이다. 재산은 흔히 타락으로 이어지므로 그것을 잃은 사람들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해로운 것이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278

 

노동권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부르주아나 봉건 왕조로부터 착취받던 민중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설이나 교과서들은 프랑스 혁명이 결과적으로 봉건세력의 잔재인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을 숙청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철저히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괴롭히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이 처형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한다.

 

인류의 눈으로 볼 때 그보다 더 파렴치한 자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그보다 더 비겁한 자들에게만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유용성입니까? 그것은 더 서둘러 그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 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의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공화국, 그리고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368~369

 

1793421일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자신이 작성한 인권 선언 초안을 낭독했는데, 그가 낭독한 36개 조항에는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헌장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가치들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36개 조항을 다 옮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자연적이고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자연권의 유지와 인간의 모든 능력의 발전이다.

 

2조 인간의 중요한 권리들이란 그의 생존과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들이다.

 

5조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는 힘이다. 자유는 정의를 모범으로, 타인의 권리를 한계로, 자연을 원칙으로, 그리고 법을 보호자로 삼는다.

 

10조 소유권은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에 의해 제한된다.

 

11조 소유권은 우리 동포들의 안전, 자유, 생존, 재산을 해칠 수 없다.

 

13조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수단을 확보해줌으로써,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생계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18조 민중은 원한다면 자신의 정부를 바꾸고, 자신의 수임자들을 해임할 수 있다.

 

35조 자유와 진보를 방해하고 인간의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한민족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예사로운 적이 아니라 살인자이자 반도로 기소되어야 한다.

 

이처럼 로베스피에르가 작성한 인권 선언은 진보적인 가치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상술한 홍준표와 같이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며 그의 시기를 폄하한다. 그러나 1793년 그와 자코뱅 세력들이 소위 혁명재판소를 창설하여 민중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부패한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행위는 순수히 민중의 염원을 따르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열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민중과 하층민 가진 것 없는 이들 추방 당한 이들, 유대인과 노예를 위해 싸웠다. 책에서 나온 그의 연설들 대다수가 민중을 생각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발언들이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숙청되고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다. 소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수천 명이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자신과 지지세력들이 설정했던 목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소위 반혁명적 사상을 가진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단두대라는 형벌을 끊임없이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 분노한 이들은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생쥐스트, 쿠통과 더불어 그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지만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은 민중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열정과 혁명정신이 아주 많이 느껴지게 한다. 그가 했던 연설 곳곳에 민중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사랑이 담겨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 혹은 악인으로 왜곡해온 로베스피에르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명저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유럽의 봉건 국가들이 혁명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소위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은 프랑스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는 이 반동의 무리들이 저지르는 침략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전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휴머니스트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어린 혁명정신과 민중애를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한 연설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여러분의 주권자는 민중입니다. 끊임없어 그들을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며 타락한 존재로 부름으로써 그들을 중상하고 모독하는 일을 그만둡시다. 정의롭지 않고 부패한 자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의 권력을 부유한 특권계급에게 넘겨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인내심 강하고, 관대한 것은 민중입니다. 우리의 혁명이, 그리고 적들의 범죄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울 뿐인, 최근의 수천 가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민중은 단지 평화, 정의, 그리고 생존권을 요구할 뿐입니다. 권력자들, 부자들은 차별, , 쾌락만을 갈망합니다.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입니다. 부자들의 이익과 소망은 야심, 탐욕, 기괴한 망상,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가장 치명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민중의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민중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습니까? 부자들입니까? 권력자들입니까?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민중만이 한결같은 이성에 의해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민중이 다시 쟁취한 권리를 민중으로부터 강탈할 것을 우리에게 제안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국민을 두 계급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중 한 계급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한 계급을, 오직 그 계급을 제압할 목적으로만 무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계급은 모든 독재자들, 모든 압제자들, 모든 공공의 흡혈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은 민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민중이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 여러분이 만약 민중에게 자유를 맡긴다면 민중은 자유의 가장 튼튼한 벋짐목이 될 것입니다. 부당한 힘으로, 말하자면 민중을 절망에 빠뜨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대의를 배신하도록 만들려는 자들은, 잔인하고 야심에 찬 궤변가들인,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민중을 더는 비난하지 마십시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35~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

  

1492년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고, 그 결과 미국이 탄생했다는 믿음을 미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세계사 교육이 미약한 한국인들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보면 미국인들이 찬양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에로 삼았던 침략자이자 제국주의자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에서 양모 직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행적은 1477년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인이 선장이었던 콜럼버스는 바다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고, 그 과정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는 동생과 함께 항해에 들어갈 비용을 댈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격던 중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세발 여왕(Queen Isabel)을 만났고, 비록 몇 번의 거절을 당했지만, 1492년에 뜻을 이루게 됐다.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 섬의 이름을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고 붙였고,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고 하여 인디언(Indian)’이란 의미에서 인디오(Indio)’라고 붙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들에게 보답해 준 것은 학살과 노예화 뿐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보았을 때부터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을 했다. 아라와크족(Arawaks)이 마을에서 나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들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미국민중사 I p.15

 

당시 콜럼버스가 무엇보다도 원했던 정보는 황금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갈 수가 없어 원주민들을 납치하고 포로로 붙잡아 배에 태운 뒤,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터무니 없는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구였고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런 과장 및 왜곡 보도를 하면서 자신들이 포로로 붙잡았던 원주민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고, 그 대가로 다음 항해에서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원하는 만큼의 노예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항해에서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투입하여 노예와 황금을 가져오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들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차례로 돌며 원주민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황금을 약탈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성적 노리개와 노예로 사로잡았다. 현재 아이티 섬 근처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가운데 200명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콜럼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라고 하며 기록을 남겼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콜럼버스의 학살과 수족절단으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498년과 1501년 콜럼버스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3, 4차의 항애세서 트리니다드섬과 베네수엘라 해안 그리고 파나마 일대를 탐색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신대륙 개척자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토착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2009년 당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꿈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았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일삼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제는 그가 저질렀던 잔혹한 침략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