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왕조 시대 베트남 영토)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대략 2천 년 동안 중국의 지배에 맞서 저항을 해왔는데이러한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투민족이라는 표현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련 있을지도전투민족일수록 축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으니베트남의 고중세사를 보면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군대 그러니까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적이 있다. 1288년 제3차 원정을 단행한 몽고군대가 박당강에서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는데이것이 몽고군의 마지막 침략이었다이로써 베트남은 세계 제패를 이룩했던 몽고의 침략을 무찌른(그것도 3번씩이나나라가 되었다.

(응오꾸옌 그림)

 

그러나 몽고군을 무찌르기 정확히 350년 전 베트남은 똑같은 장소에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가 있었다당시 응오꾸옌(Ngô Quyền, 한자로는 오권)은 그 곳에서 독립을 쟁취했다그 독립을 이루게 한 전투가 바로 938년에 있던 박당강 전투다그 이전의 베트남 역사는 사실상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그로부터 1,000년 전 쯩 자매가 코끼리를 타며 한나라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중국의 지배는 강력했다응오꾸옌이 중국에 맞서 대항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였다.

(하노이 썬떠이 시사에 있는 응오꾸옌 상)

 

900년대 당나라가 분열된 이후 중국 남부 지역에 나타난 남한은 베트남을 침략했었다남한의 침략을 받던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권 안에 머무르려는 세력과 중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루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이 중 33살의 응오꾸옌은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당시 그는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다이후 그는 봉기를 일으켜 남한에 대항하고자 했다이러자 중국의 지배권에 머무르려 했던 끼에우꽁디엔은 매국적인 행동과 더불어 남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이리하여 당나라의 후신인 남한은 바다와 육지 두 갈래로 나누어 침략에 나섰다.

(박당강 전투 당시 군대를 지휘하는 응오꾸옌)

 

남한이 침략하자 응오꾸엔은 대담한 작전으로 침략군을 각개격파에 나섰다응오꾸옌이 이끄는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북진해 다이라에 주둔하고 있던 끼에우꽁디엔의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그런 다음 그는 군대를 박당강 기슭에 매복시키고 남한군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기를 기다렸다물론 침략군에 맞서 준비도 철저히 했다그는 먼저 강바닥에 끝을 쇠로 덮은 나무기둥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남한의 수군이 나타나자 응오꾸옌은 전투를 벌였다그러다가 패해 달아났는데이것은 위장전술이었고 남한군을 강 상류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박당강 전투 상상화)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거짓 도망하던 베트남 수군이 반격했다이와 동시에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강바닥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한의 함선 수백 척이 불에 탔고남한의 병사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이로써 당나라의 후신 남한의 베트남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대월사기전서에는 응오꾸옌이 박당강에서 거둔 승리를 칭송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응오왕께서 군사를 모아 유홍조의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로 더 이상 남진을 못하게 하셨다화를 내심은 민을 안위함이요뛰어난 지략은 적을 단번에 물리치기 위함이시라왕이라 칭한 채 비록 칭제를 안 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박물관에 전시된 박당강 전투 모델)

 

박닥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베트남은 쯩 자매가 대중항쟁을 벌인지 1,000년 만에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이에 따라 응오꾸옌은 박당강 전투 승리 이후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939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이렇게 해서 베트남은 최초의 독립왕조인 응오왕조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전투다무엇보다 1,000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와 자주적인 왕조를 세웠기 때문이다비록 응오왕조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무너졌지만독립투쟁을 통해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다는 점에서 베트남 역사에 상징적인 의미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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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아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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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서평: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

나는 하워드 진을 좋아한다. 역사학자로써 그가 보여준 ‘아래로부터 역사 쓰기‘는 당시 미국역사 학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많은사람들이 배우는 미국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필그림 파더즈들의 정착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 미국건국 그리고 그 이후 서부로의 팽창 등이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교육된다.

이것은 대중적인 미국 교과서의 내용만은 아니다. 국내에 출판된 미국사 전공자가 쓴 책들도 그렇다. 내가 읽어본 이보형 교수의 ‘미국사 개설‘이나 뉴라이트 계열의 이주영 교수의 ‘미국사‘등도 앞에서 얘기한 프레임으로 미국사를 접근한다. 여기 더 나아가 미국의 제국주의와 팽창의 역사도 합리화 되고 ‘좌파는 개갞끼다‘와 같은 반공주의 도그마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랐다. 그는 1980년대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집필함으로써, 미국에서 존경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실은 대학살자이자 사리사욕을 채운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냈다. 그외에도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과 같이 미국 지폐에 들어가 있는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세운 ˝평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를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도 조명해냈다. 또한 이들이 부의 불평등을 조장한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쉽게 말해 하워드 진은 미국의 보수사관을 철저히 거부했고, 위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받고 차별받던 이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했다.

1991년 냉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었다. 1970,80년대 부터 세력을 키운 네오콘들은 1990년대 당시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고자 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 당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와 그의 부인 린 체니는 실제로 그러한 기관을 양성했고, 그 과정에서 일종에 반미주의적 인사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하워드 진도 포함됐다. 물론 진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워드 진이 가장 훌륭한 점을 뽑자면, 바로 실천하는 운동가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워드 진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에 B-17 폭격수로 참전했던 진은 반전주의자로써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1950년대 스펠먼 대학 교수 시절에는 흑인차별에 분개하여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학교 도서관 출판운동, 식당칸 공동사용 투쟁등 항상 압장섰다.

진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부터 미국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5년 당시 총 3만 명이 참가했던 반전운동에도 진이 있었다. 또한 그는 1967년 ‘베트남 철수의 논리(Vietnam The Logic of Withdrawal)‘를 집필했다. 그의 반전운동은 1990년대 미국의 유고 내전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드러났다.

진은 빈부격차와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체제에 저항적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가 얘기한 계급사회임을 인지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는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미국의 그런 모순적 구조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역사적으로 논증해냈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역사가 아닌 노동자의 역사도 보고자 했다.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인생을 다룬 소책자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아 몇시간이면 충분히 다 완독할 수 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책들은 국내에 많이 번역된 편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인생사를 타인이 정리한 책은 없었다. 소책자임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워드 진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났다. 한국의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던 연도에 그 또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한국에 리영희가 있다면 미국에는 하워드 진이 있다고! 세상을 실천으로 변혁하고자 하는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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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네비이 씰이 전개했던 넵튠 스피어 작전 전개도)

 

2011년 4월 30일 오후 11(아프가니스탄 현지 시각),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블랙 호크 헬기 두 대가 활주로를 이륙했다두 대의 헬기는 미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 대원 24명을 태우고 있었다헬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영내로 진입했다. 3대의 치누크 수송헬기도 활주로에서 이륙해 블랙호크 헬기의 뒤를 따랐다이들이 목표물인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 가옥으로 접근했던 시점은 밤 12시가지나 5월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목표물에 도착한 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자신들이 계획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비록 작전 중 가옥으로 접근한 헬기 한 대가 꼬리를 담에 부딪치는 바람에 마당 안으로 불시착했지만작전자체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마당에서 현관 철제문을 파괴하고 안으로 진입했고두 번째 헬기에 있던 요원들도 정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진입한 특수부대는 목표물을 살해했다그 목표물은 바로 9.11 테러를 주도했던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프레디터 드론, 드론 중에 가장 유명한 드론으로 미국이 21세기 중동분쟁에서 많이 사용한 최신식 무기다. 물론 이 최신식 무기는 무고한 양민학살을 불러오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라덴을 추적해왔다그리고 10년 뒤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네이비 씰이 작전을 전개할 당시 수도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에선 대통령 오바마를 포함한 각료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당시 이 현장을 중계한 것이 바로 무인정찰기 RQ-170이었다무인정찰기 RQ-170은 미국이 개발한 무기인 드론 중 하나였다이 드론들은 중동분쟁에서 최신식 무기로써 많은 임무를 수행했었다그러나 이 드론들은 중동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소이기도 했다왜 그런 것일까?

 

앞에서 서술한 네이비 씰의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의 공식 명칭은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이었다넵튠 스피어 작전이 성공한 이후 대통령 오바마는 방송에 나와 정의는 승리했다라고 하며 미국국민들과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그러나 작전이 진행되었던 파키스탄에선 이 사건 전체가 극도로 치욕스럽게 다가왔다왜냐하면 이런 작전 자체가 파키스탄 정부의 어떠한 허가나 사전얘기 없이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파키스탄 정부와 국민이 이런 작전을 벌인 미국에게 반감을 느꼈던 것에는 작전 당시 사용했던 RQ-170과 같은 드론의 공격이 파키스탄에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락 오바마, 버락 오바마는 미국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의 외교 정책은 미국의 이익을 네오콘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이었다. 특히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병력을 증강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바로 알카에다와의 접촉을 의심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초반에는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면서 승리하는 것으로 보여줬지만결국 수렁으로 빠졌다무엇보다 미국 편이었던 부패한 군벌들을 대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따르게 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였다거기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은 탈레반들의 게릴라전에 적합하였고테러전도 동반되었다이러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병력은 2007년 기준으로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또한 2만 6,000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물론 이 상황에서도 진전이 없었기에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미군을 더 증강하고자 했다.

(드론 공격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비판하는 현지 주민들이 쓴 벽화)

 

이와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이웃나라인 파키스탄까지도 번졌다특히나 국경지대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그리고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도 암암리에 활동했다이를 군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2004년부터 또 다른 전략전술을 사용했다그것이 바로 드론을 이용한 공습이었다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CIA는 주로 정찰에만 사용되었다그러나 2004년이 되면서 드론 공습을 개시하기 시작했고, 2007년과 2008년에는 그 숫자가 예전보다 증가했다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결국 임기를 마쳤고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그 자리를 이었다.

 

2009년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병력을 증강했다. 2010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가 10만 명을 돌파했다이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의 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했다미군 특수부대와 CIA가 운용하는 대테러 추적팀은 파키스탄 정부가 꾸물거리는 사이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시켰다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드론 공습으로 사망했다드론 공습의 비율로 따져 보았을 때오바마는 취임 첫 9개월 동안 부시 대통령이 퇴임 직전 3년 동안 재가한 것만틈의 드론 공격을 재가했다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 숫자도 급증했다.

(드론 공격 풍자 만화)

 

2006~2008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게릴라 소탕전담당 보좌관으로 일한 데이비드 킬컬렌과 2002~2004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한 앤드루 액섬은 2009년 5월 파키스탄인들의 분노를 실감나게 소개했었다두 사람이 인용한 파키스탄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민간인은 700명이 살해된 반면 테러조직 지도급 인물은 14명밖에 죽이지 못했다이는 게릴라 1명당 민간인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명중률 2%”밖에 안됐다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공동으로 집필한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뉴욕 타임스 스퀘어 차량폭탄 테러범으로 널리 알려진 샤하자드는 체포 직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미국을 공격한다면 당신들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당신들은 지금 주권국가 파키스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어떻게 무고한 여성과 어린이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을 꾸몄느냐고 묻자 그는 미국의 드론 공격은 어린이를 가리지 않는다그 누구도 가리자 않는다여성과 어린이를 죽이고누구든 죽인다고 답했다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드론 공격의 희생자들은 인간이지만 드론 조작 요원들에게는 때려잡은 벌레였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96~397

 

파키스탄인들이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 이후에 미국과 오바마에게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부시부터 오마바까지 행한 드론 공격은 2017년에 이어받은 트럼프 행정부 또한 끝나지 않은 중동전쟁에서 사용했다아무튼 이런 무자비한 드론 공격은 중동에서 반미정서를 자극하는 자극제였다무엇보다 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에 중동사람들이 분노했다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했듯이중동의 민중 또한 반미를 내세우는 저항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다.(물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싸우던 베트콩과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한 집단은 질적으로 다르지만.)

 

정리하자면 중동전쟁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이란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지속되는 이유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주체가 이 지역에서 전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여기서 설명한 드론 공격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중동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고당연히 이점에 있어서 미국은 크나큰 정책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이슬람 전사의 탄생정의길한겨레출판, 2015

 

전쟁 국가의 탄생레이첼 매도박중서갈라파고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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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퐁넛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 퐁니 퐁넛 학살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고, 본인 또한 총에 맞았다.)


1968년 원숭이의 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약 120개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성과 부의 중심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라는 명칭을 가진 이 공격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 전환점이었다. 이 한 번의 대공세로 1달 동안 베트콩 37,000명이 전사했지만, 미군 또한 2,500명이 전사했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린든 B.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의 반전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남베트남에 주둔한 54만 9,000명의 미군은 충격에 휩싸이는 1968년의 해였다.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12km 떨어진 곳에는 퐁니 퐁넛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1968년의 해는 베트남 전쟁에서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1968년 3월 16일 손미(Son My) 지역에 착륙한 찰리 중대(Charlie Company) 소속 병사들은 마을로 들어가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성, 노약자, 아이가 학살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했고, 학살당한 이중 1/10은 유아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 현(Điện Bàn)에서도 있었다. 그게 바로 한국군 청룡 부대가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Phong Nhi Phong Nhat Massacre)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1968년 구정 공세는 미군과 그 동맹국 군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박정희 정권은 전쟁 기간 연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했었다. 1968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숫자는 총 4만 9,869명이었다. 이들 또한 구정 공세 이후 반격에 나섰고, 이러한 작전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디엔반 현에 있는 퐁니와 퐁넛 촌에서도 한국군 청룡부대가 반격에 나섰다. 대략 청룡 부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반격 작전인 괴룡 1호 작전을 벌여 베트콩 수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68년 2월 12일 소탕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군 본 상병이 찍은 사진, 그는 퐁니 퐁넛 학살의 현장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 베트콩이 게릴라전을 하고,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하는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들을 보면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소위 자유 사격 지대(Free Fire Zone)으로 설정한 곳이 많았고, 그 지역에서는 보이는 건 무조건 쏴 죽여도 됐다. 그러나 퐁니 퐁넛 마을은 달랐다. 퐁니 퐁넛의 경우 미구니 ‘발포제한 구역(Control Fire Zone)’으로 설정해놓은 곳이었다. 거기다 인근 1번 국도의 끼엠루(Kiem Lu) 초소엔 남베트남군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퐁니 퐁넛에 살았다. 그러나 이런 지역 근처에서 작전을 벌이던 한국군은 퐁니 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학살 당한 어린 아이, 이 어린아이는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6~7살 정도 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1968년 2월 12일 청룡부대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사 150명이 수색정찰에 나갔었다. 그날 오전 한국군은 퐁니와 퐁넛 마을 측면을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한 병사가 지뢰를 밟았고, 1소대원 한 명이 저격당했다. 여기서 청룡부대 중대장은 마을 진입을 지시했다. 1소대가 진입했고, 그 뒤를 2,3소대가 따랐다. 즉 여기서부터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은 8살이었다. 응우옌티탄은 퐁니 퐁넛 학살 당시 언니 응우옌티쫑(Nguyen Thi Trong), 남동생 응우옌득쯔엉(Nguyen Duc Truong), 이모 판티응우(Phan Thi Ngu), 엄마 판티찌(Phan Thi Tri)를 포함하여 전 가족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또한 학살의 현장에서 한국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살 당시 그는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엄마 또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5살짜리 그의 동생 응우옌득쯔엉은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그것도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8살의 응우옌티탄 또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며,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1년 동안 입원한 뒤에 퇴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희생된 응우옌티탄, 퐁니 퐁넛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응우옌티탄 중에는 19살 짜리 소녀도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기간에 일어난 퐁니 퐁넛 학살에서 총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17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19살의 소녀 응우옌티탄(동명이인)은 유방이 잘렸고, 무차별 폭력에 희생된지 2일 후에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영유아도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장보러 가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나이는 6살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있는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에는 1,2살짜리 아이의 이름도 3~4명 정도 있다. 

(퐁니 퐁넛 학살 자료를 기록한 미국의 공식 문서)


이 참혹한 학살의 현장은 미국의 한 군인인 본 상병은 퐁니 마을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이후 오후 쯤에 마을에 들어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자료들은 주월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고, 주월한국군 사령부를 포함한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다. 이렇게 되자 퐁니 퐁넛 학살은 한국과 베트남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채명신은 “한국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참전용사의 양심고백, 2000년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는 학살에 가담했던 일에 대해 고백증언을 남겼다.)


퐁니 퐁넛 학살 1년 뒤 한국 정부는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건을 조사 하게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한국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 최영언 중위 등 3명을 조사한 뒤 작성한 문건 목록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반공선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공론화하지 않았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이야기는 설사 박정희 시기 한국 언론에 보도 된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정권 입장에 맞게 편집되고 왜곡되어 보도됐다. 

(고경태 기자, 고경태 기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인 퐁니 퐁넛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특히나 1990년대부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공론화에 압장섰던 구수정 박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조사한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80여 개 마을에서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2000년 한국군이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가 양심고백을 했다. 김석현을 비롯한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장교 출신들은 “모두 그날 그곳에 갔다.”고 인정했고, 이 1중대 장교들에 대한 인터뷰는 《한겨레21》을 통해 기사화 됐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 학살 사건은 양심적인 참전용사의 고백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2018년 당시 한국군의 범죄를 묻는 피해자 응우옌티탄씨, 한명은 퐁니 퐁넛 생존자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물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데 주력해온 구수정 박사와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모의법정을 열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고, 그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하였다. 원고로서 참여한 두 명의 응우옌 티 탄(한 명은 퐁니 퐁넛 피해자이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다.)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있었던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여 제주 4·3 항쟁의 생존자와 만나기도 했다.

(구수정 박사,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 시킨 구수정 박사는 현재 한베평화재단 이사로 지금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이 책은 고경태 기자가 집필한 책이다.)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중 제법 공론화 된 사건이다. 또한 사진자료와 미국의 공식문서 그리고 학살 가담자의 증언 고백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모의법정까지 열어 그 사건의 국가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흐름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한국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치 이것을 베트남 전쟁에 빗대어 경제성장의 기회라는 말이 안되는 논리로 파병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마치 돈을 번 전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퐁니 퐁넛 학살과 같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고경태, 보림, 2016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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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냉전이 한참이던 1950년대 두 진영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했던 국가들이 있었다. 당시 이런 국가들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3세계(The Third World)였다. 제3세계 국가들 중에 아랍 국가들을 상징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된 인물로 1950년대 이스라엘의 견제를 받고 있던 아랍 국가들에게 있어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جمال عبد الناصر)다.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등과 더불어 제3세계 진영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Arab Socialism)라는 이데올로기를 중동 지역에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랍 사회주의는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쉽게 말해 나세르는 중동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제3세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의 근현대사는 3세기 동안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였다.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19세기부터 산업 혁명으로 제국주의 국가가 된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답게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를 무력으로 식민지 지배를 했었다. 영국의 지배에 놓인 19세기 이집트에선 독립운동이 일어났었고, 영국의 폭압적인 통치에 많은 이집트인들이 반영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1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세르였다.


1937년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나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독립 국가의 탄생을 목표로 했고, ‘자유 장교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나세르는 1946년 육군 참모 대학에 들어가 2년 과정을 마쳤고, 1948년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에서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 이집트에는 군주제가 유지된 국가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파루크는 부정부패와 더불어 말도 못하는 사치를 부리는 인물이었고, 그로인한 이집트의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결국 나세르가 자신의 조직인 자유 장교단을 이끌고 혁명을 계획하게 되는 이유였다.


1952년 7월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을 동원하여 혁명을 실행했고, 궁극적으로 혁명에 성공했다.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나세르는 초반에 나기브라는 인물에게 명목상 지도자 자리를 맡겼지만, 이후에 자기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며 명실상부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나세르가 집권한 이집트는 과거하고 달랐다. 물론 초기의 나세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둘다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후 서방과 갈등하면서 소련의 흐루쇼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친소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토지개혁과 더불어 각종 개혁을 실시했고, 1960년대에는 이집트의 산업체와 기업들을 국유화 했다. 또한 반동적 자본가들을 체포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은행, 보험회사, 기타 많은 기업들이 국유화 됐다.


이처럼 나세르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많이 실행했다. 나세르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1956년에 단행한 수에즈 운하를 완벽히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에 완공된 수에즈 운하는 당시 영국 프랑스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나세르에게 수에즈 운하는 당연히 식민지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는 대다수의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이었다. 따라서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을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


물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48년에 무력으로 남의 나라 땅을 강탈하고 탄생한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여 수에즈 운하를 접수했다. 당시 혼자서 싸우던 나세르는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연합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영국을 반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행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수에즈 사태에서 국제적인 여론은 이집트의 나세르 편이었고, 외교와 정치적인 부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에즈 운하를 다시 되찾았다. 이에 따라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나세르의 가장 큰 업적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이집트를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67년에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인해 개전 초기에 300대 이상의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를 포함해서)를 잃고, 이집트의 영토 또한 이스라엘에게 빼앗기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패전의 책임을 묻고 사퇴하려고 하자 민중들은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왜쳤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이웃국가인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적이고 매우 폭력적인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저질렀고, 나세르는 이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개혁들이 민중에게 성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혹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나세르 사후 정권을 계승한 사다트(Sadat)가 되찾았다.


이집트의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죽기 직전 미국의 평화 협상안을 받아들였고, 이집트 입장에서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70년 9월 28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2세였다. 나세르가 사망하자 이집트는 추모의 물결로 휩싸였다. 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수많은 아랍 국가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나세르가 남긴 유산은 분명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책에 나온 그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나세르는 국가 독립의 건설자였으며, 다른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역사적 유산에 자긍심을 가지고, 아랍의 영향력을 드높이기 위해 함께 협력할 것을 주장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소리 높이 외친 선지자였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그 결과로 야기된 서구의 압력(이를테면 영불 연합군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굽힐 줄 모르던 그의 용기는, 아랍인들이 식민 종주국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여설히 보여준 쾌거였다. 1950년대 이래 중동 정치 역학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온 투쟁적 아랍 민족주의는 그가 남긴 유산이다.”


출처 :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 p.156


나세르는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혁명을 통해 봉건왕조를 타도했으며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탄생시켰다. 1950년대 당시 그는 영국을 몰아내려 했고,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었다. 거기서 NATO의 가입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영국과의 동맹은 있을 수 없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더 나아가 그는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치 체제를 탄생시켰다. 나 또한 나세르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한 시대를 살다간 자주적인 지도자였다. 앞으로도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지킨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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