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니 퐁넛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 퐁니 퐁넛 학살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고, 본인 또한 총에 맞았다.)


1968년 원숭이의 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약 120개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성과 부의 중심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라는 명칭을 가진 이 공격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 전환점이었다. 이 한 번의 대공세로 1달 동안 베트콩 37,000명이 전사했지만, 미군 또한 2,500명이 전사했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린든 B.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의 반전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남베트남에 주둔한 54만 9,000명의 미군은 충격에 휩싸이는 1968년의 해였다.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12km 떨어진 곳에는 퐁니 퐁넛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1968년의 해는 베트남 전쟁에서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1968년 3월 16일 손미(Son My) 지역에 착륙한 찰리 중대(Charlie Company) 소속 병사들은 마을로 들어가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성, 노약자, 아이가 학살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했고, 학살당한 이중 1/10은 유아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 현(Điện Bàn)에서도 있었다. 그게 바로 한국군 청룡 부대가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Phong Nhi Phong Nhat Massacre)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1968년 구정 공세는 미군과 그 동맹국 군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박정희 정권은 전쟁 기간 연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했었다. 1968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숫자는 총 4만 9,869명이었다. 이들 또한 구정 공세 이후 반격에 나섰고, 이러한 작전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디엔반 현에 있는 퐁니와 퐁넛 촌에서도 한국군 청룡부대가 반격에 나섰다. 대략 청룡 부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반격 작전인 괴룡 1호 작전을 벌여 베트콩 수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68년 2월 12일 소탕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군 본 상병이 찍은 사진, 그는 퐁니 퐁넛 학살의 현장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 베트콩이 게릴라전을 하고,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하는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들을 보면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소위 자유 사격 지대(Free Fire Zone)으로 설정한 곳이 많았고, 그 지역에서는 보이는 건 무조건 쏴 죽여도 됐다. 그러나 퐁니 퐁넛 마을은 달랐다. 퐁니 퐁넛의 경우 미구니 ‘발포제한 구역(Control Fire Zone)’으로 설정해놓은 곳이었다. 거기다 인근 1번 국도의 끼엠루(Kiem Lu) 초소엔 남베트남군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퐁니 퐁넛에 살았다. 그러나 이런 지역 근처에서 작전을 벌이던 한국군은 퐁니 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학살 당한 어린 아이, 이 어린아이는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6~7살 정도 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1968년 2월 12일 청룡부대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사 150명이 수색정찰에 나갔었다. 그날 오전 한국군은 퐁니와 퐁넛 마을 측면을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한 병사가 지뢰를 밟았고, 1소대원 한 명이 저격당했다. 여기서 청룡부대 중대장은 마을 진입을 지시했다. 1소대가 진입했고, 그 뒤를 2,3소대가 따랐다. 즉 여기서부터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은 8살이었다. 응우옌티탄은 퐁니 퐁넛 학살 당시 언니 응우옌티쫑(Nguyen Thi Trong), 남동생 응우옌득쯔엉(Nguyen Duc Truong), 이모 판티응우(Phan Thi Ngu), 엄마 판티찌(Phan Thi Tri)를 포함하여 전 가족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또한 학살의 현장에서 한국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살 당시 그는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엄마 또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5살짜리 그의 동생 응우옌득쯔엉은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그것도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8살의 응우옌티탄 또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며,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1년 동안 입원한 뒤에 퇴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희생된 응우옌티탄, 퐁니 퐁넛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응우옌티탄 중에는 19살 짜리 소녀도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기간에 일어난 퐁니 퐁넛 학살에서 총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17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19살의 소녀 응우옌티탄(동명이인)은 유방이 잘렸고, 무차별 폭력에 희생된지 2일 후에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영유아도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장보러 가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나이는 6살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있는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에는 1,2살짜리 아이의 이름도 3~4명 정도 있다. 

(퐁니 퐁넛 학살 자료를 기록한 미국의 공식 문서)


이 참혹한 학살의 현장은 미국의 한 군인인 본 상병은 퐁니 마을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이후 오후 쯤에 마을에 들어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자료들은 주월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고, 주월한국군 사령부를 포함한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다. 이렇게 되자 퐁니 퐁넛 학살은 한국과 베트남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채명신은 “한국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참전용사의 양심고백, 2000년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는 학살에 가담했던 일에 대해 고백증언을 남겼다.)


퐁니 퐁넛 학살 1년 뒤 한국 정부는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건을 조사 하게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한국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 최영언 중위 등 3명을 조사한 뒤 작성한 문건 목록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반공선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공론화하지 않았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이야기는 설사 박정희 시기 한국 언론에 보도 된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정권 입장에 맞게 편집되고 왜곡되어 보도됐다. 

(고경태 기자, 고경태 기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인 퐁니 퐁넛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특히나 1990년대부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공론화에 압장섰던 구수정 박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조사한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80여 개 마을에서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2000년 한국군이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가 양심고백을 했다. 김석현을 비롯한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장교 출신들은 “모두 그날 그곳에 갔다.”고 인정했고, 이 1중대 장교들에 대한 인터뷰는 《한겨레21》을 통해 기사화 됐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 학살 사건은 양심적인 참전용사의 고백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2018년 당시 한국군의 범죄를 묻는 피해자 응우옌티탄씨, 한명은 퐁니 퐁넛 생존자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물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데 주력해온 구수정 박사와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모의법정을 열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고, 그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하였다. 원고로서 참여한 두 명의 응우옌 티 탄(한 명은 퐁니 퐁넛 피해자이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다.)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있었던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여 제주 4·3 항쟁의 생존자와 만나기도 했다.

(구수정 박사,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 시킨 구수정 박사는 현재 한베평화재단 이사로 지금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이 책은 고경태 기자가 집필한 책이다.)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중 제법 공론화 된 사건이다. 또한 사진자료와 미국의 공식문서 그리고 학살 가담자의 증언 고백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모의법정까지 열어 그 사건의 국가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흐름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한국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치 이것을 베트남 전쟁에 빗대어 경제성장의 기회라는 말이 안되는 논리로 파병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마치 돈을 번 전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퐁니 퐁넛 학살과 같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고경태, 보림, 2016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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