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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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성이라는 것이 있긴한가 보다. 고미숙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저평가받을 이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썩 내키지 않는 이름이다. 고전에 대한 해설과 평가를 기록해 놓은 책들은 특히 더하다. 임꺽정을 읽으면서 나랑 안맞구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확실해졌다.


  "고미숙과 나는 안맞는다."


  우리나라 학사 과정을 정상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라면(여기서 말하는 정상적이라는 것은 의무 교육을 말한다.) 대체로 한번씩은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것이 열하일기다. 한국사에 대해서 배우면서 정조 시대에 박지원이 어쩌구 저쩌구, 북학파가 어쩌구 저쩌구, 이용후생, 실사구시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꼭 언급되는 책이 박지원의 열하일기이다. 그만큼 유명한 책인데 문제는 이 책이 철저하게 고전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농반 진반으로 고전의 특징이란 모두들 제목은 알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아는데 읽어본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안 읽어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호질, 허생전, 양반전 같은 내용들이야 대입 준비하면서 읽어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어본 일은 없다는 말이다. 하긴 많은 학생들이 호질과 허생전과 양반전이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비교적 낫다고 자부해도 되겠지만...


  고미숙은 자신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만난 것이 클리나멘이었다고 말한다. 박지원의 해학에 대해서, 좋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마이너로 살아가면서 노마드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왕성한 지식 욕에 대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끝없는 상찬을 늘어 놓는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가 되어 자신이 살아가서 시대를 바라보던 박지원의 삶을 표현하기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만큼 훌륭한 것들은 없겠지만, 내가 고미숙과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역시 배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책에 집중을 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야기들, 인문학 용어들이 책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며 박지원의 해학을 박제로 만들어 버렸다.


  요즘 아재개그가 유행이다. 아재개그의 특징은 유치하지만 직관적이라는 데 있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고 웃게 만드는 아재 개그는 실패다. 유치해도 직관적이어야 듣는 순간 빵 터진다. 박지원의 해학도 그렇다. 일단 듣는 순간 웃는다. 한참 웃고 난 다음에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호질, 양반전, 허생전이 그렇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밑줄 긋고, 이 부분이 웃기고, 이 부분은 당시 상황이 이렇고 해설하고 분석하면 재미가 없다. 수험생들이 호질, 양반전, 허생전을 보고 웃지 않고 생사의 대적을 눈 앞에 둔 것처럼 심각한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일단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는 읽었다. 여러가지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도 많다. 고미숙은 역시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말이 너무 어렵다는 것, 그리고 박지원의 글이 웃기다는 것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강렬하게 드는 생각은, "젠장! 열하일기를 읽어야겠군."이다. 원전을 읽지 않고는 박지원이 얼마나 웃긴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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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의 리뷰를 오랜만에 봅니다. 저도 열하일기 완독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로 나온 열하일기를 가지고 있는데,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
 
스파르타 이야기 - 신화로 남은 전사들의 역사
폴 카트리지 지음, 이은숙 옮김 / 어크로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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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포드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컨베이어 시스템을 자동차 생산에 도입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 때문에 포디즘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생각은 단순하다. 각 가정에 자동차를 한대씩 팔겠다는 것, 이를 위해서 단가를 낮추어야 하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모델로 통일하고, 컨베이어 시스템을 통하여 노동자의 업무도 단순화했다. 이 시스템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점에 비하여 얻는 이익이 컸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모든 가정이 한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난 다음이 문제였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외면했던 시스템의 약점을 파고든 후발 주자들에 의하여 헨리 포드 왕국은 무너졌다.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일어났던 포드 왕국이 무너진 것은 그들이 자랑으로 여겼던 컨베이어 시스템 때문이다.

 

  스파르타를 어떻게 설명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전사들의 나라, 베일에 가려져 있고, 헐리우드에 의하여 발견된 300으로 포장된 스파르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리뷰를 작성한 분 중에 책이 산만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중심으로 풀어가다 보니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간 책에 비하여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읽어갈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던 스파르타의 시스템, 왕이 둘이 있고, 전사를 길러내는 시스템인 리쿠르고스 시스템에서 읽어야 한다. 초기의 인물들은 이 시스템에 충실했던 사람들이고, 후기에 갑툭튀한 영웅들은 이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던 시절에 돌발행동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조그마한 시골도시였던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육상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리쿠르고스의 입법이다. 스파르타를 보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시스템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리쿠르고스 법의 골자는 스파르타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것, 이로 인하여 강력한 군대를 길러내는 것에 있다. 실제로 존재한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전설적인 인물인데, 굳이 그러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스파르타를 이해하는데 무리가 되지는 않는다. 리쿠르고스라는 인물은 그를 굳이 개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스파르타의 시스템을 통칭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이해하도 무방하다.

 

  리쿠르고스의 법에 충실한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사를 길러냈고,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그리스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아테네가 해상제국으로 성장하기 전에도 이미 스파르타는 그리스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었는데, 이는 스파르타에 존재했던 시스템이 아테네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위에서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맞지 않게 된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고 해도 시간이라는 변수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시스템을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러한 시도들은 시스템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그런데 스파르타는 이 부분을 무시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유지했던, 그들을 강국으로 만들었던 시스템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보수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미련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스템을 초기의 시스템으로 다시 돌려보려는 반혁명을 추구했고, 어떤 사람들은 시스템을 뜯어 고치는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다만 이러한 변화들이 꾸준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결국 시스템으로 일어난 스파르타는 그 시스템으로 인하여 도태되었고, 로마 시대에는 테마파크로 전락해 버리게 되었다.

 

  스파르타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우리도 스파르타처럼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의 한 부속품으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처럼 강대한 군사강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멍청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결국은 유통기한이 있으니 시대에 맞추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않는다면, 이 책은 재미도 없고, 산만하기만 한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한국은 박정희 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동을 했던, 혹은 박정희 개인의 역량이었던, 그것도 아니면 재수가 좋았던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당시 발전을 주도했던 시스템이 이제는 먹히지 않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이 오늘날 적절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는가? 낡은 집을 고쳐주고, 마을에 작은 다리를 놓고, 도로를 깔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그러한 시스템들이 오늘날 한국에 적절한가? 혹은 재벌 기업을 중심으로 온갖 특혜를 주면서 키워내는 시스템이 과연 오늘날에도 적절한가? 시장 중심 주의, 혹은 국가 주도형 산업 등등 여러가지 시스템들이 난무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한번 해봤던 경험들이 있으니 그렇게 다시 해보자는 말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가면서 스파르타가 왜 멸망했는지를 다시 점검해 보길 권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면서 우려 섞인 시선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들은 의혹이 아니고, 기우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아버지가 했던 그 시스템을 다시 끌어들어 부활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역사 교과서까지 바꿔가면서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도 눈물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면, 더 이상 그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한번쯤은 멈추어서 생각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개돼지처럼 우매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새마을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바르게 살자라는 비석을 세운다. 박정희 동상을 세우면서 이 길만이 살길이라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대생이라서 그런지 산소 가스는 알지만 스파르타라는 역사는 잘 모르는가 보다.

 

  오늘날 한국을 바라보면서 박정희 시스템으로 재미를 봤던 우리 나라가 그 박정희 시스템으로 인해 몰락할 것 같아 두렵다. 헨리 포드의 독선과 자신감이 자꾸 생각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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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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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관련 콘텐츠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2012년 영화 광해가 나왔을 때 왜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까? 명량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왜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영화에 열광했을까? 대조영, 광개토대왕이 드라마로 방영되었을 때에 왜 많은 사람들이 그 드라마에 열광했을까? 그저 국뽕이라는 말로 치부해 버리면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 국뽕이라는 한마디 말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이 영화가, 혹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비결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박탈감, 분노, 안스러움, 절망과 같은 감정들이 그 콘텐츠에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지도자와 자존심, 희망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정조가 인기를 끈다. 기승전연애로 끌고가기 정조가 가진 스토리는 힘이 딸린다. 주변에 변변찮은 러브 스토리 하나 없고, 책과 정사에만 매진했던 정조인지라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전개하는 방식을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불가능한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라는 캐릭터가, 그리고 그 시대가 조명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정조의 시대에 열광하고 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암울한 시대가 오늘날 우리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본다. 정조의 시대는 영조의 오랜 치세를 겪었지만, 그 오랜 치세가 독이 되어 돌아온 시대이다. 왕조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이 왕을 택하는 택군이 일어나고, 그렇게 노론과 손을 잡은 영조의 치세가 오래되면서 노론은 탄탄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관록이 붙어 있는 영조마저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급기야는 아들 사도세자마저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어야 하는 암울한 시대, 민족과 나라의 이익보다는 당파의 이익이 우선시 되는 시대가 바로 영조의 시대였다. 정조는 영조가 가지고 있던 관록마저 없어졌으며, 자기 외가가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안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할아버지로부터 왕권과 더불어 물려받았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복잡한 시대, 요즘말로 하면 혼용무도의 시대라고 하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혼용무도는 전 지도층을 포함하지만, 정조의 시대는 정조를 제외한 지도층들을 포함한다는 정도? 정조가 어리석지 않으니 혼용무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복잡했다라는 정도로 넘어가주길 바란다. 게다가 정조 즉위 당시 임금은 정조가 아닌 노론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니 혼용무도라는 말이 썩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이런 혼용무도의 시대에 정조가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도 크게 넘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정조가 혼용무도의 시기에 그나마 희망을 빛을 던져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리박빙의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태한 시대, 위험한 시대 속에서 한발 한발 조심하면 근신하는 것, 그것이 정조가 자기 외로운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다만 여리박빙이라는 말이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모호하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밝혀둔다.

 

  정조와 같은 혼용무도의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정조가 했듯이 근신하면서 여리박빙의 심정으로 조심하면서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요즘 차기 대선 주자들, 차기 정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조심하기만 한다. 너무 조심하다 보니 자기 생각도 없고 그저 보신에만 급급하다. 뚜렷한 자기 생각도 없고, 소신도 없다. 정조가 허탈해 했던 것처럼 머리 속에 든 것도 없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을 찍찍 해대면서 왜 MS오피스를 마이크로 소프트사에서 사오냐고 사퇴하라고 큰 목소리를 외치는 사람들만 많다. 사드가 어떻고, 북핵이 어떻고 할 말이 많은데 국방위는 김제동 국감을 하고 있다. 혼용무도의 시대에 여리박빙의 심정이 아니라 지붕이 푸른 집 눈치만 보고 있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지도자들이 여리박빙이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에는 이덕일의 책 답지 않게 평가와 해석이 거의 없다. 드라이하게 역사적인 사실만 늘어 놓았다. 이 책이 이덕일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감흥이 없고, 읽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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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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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과 함께 엮어서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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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흙청춘 -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
최서윤 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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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을 넣고 네이버 검색을 해봤습니다. 연관 검색어 1위가 '알바'일거라고 추정했는데 '글자 수 세기'였습니다. 회사에 지원하는데 1000자 이내로 쓰라고 해서였습니다. 청년하면 떠오르는 게 젊은, 정열, 사랑, 욕망이 아닌 그런 모습으로 살게하면 안 됩니다." -은수미 전 의원 필리버스터 중에서

 

  청년 문제가 심각하다. 은수미 전 의원의 공이었는지 이제는 네이버에 청년이라는 말을 넣으면 '글자 수 세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더 알아보는 지식백과에는 '청년실업률, 삼포세대, N포세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뜬다. 청년의 처지가 좋아져서 연관 검색어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청년 문제의 심각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아직도 수저 계급론을 이야기하고, 헬 조선을 외친다. 어른들은 언제 살기 쉬웠던 적이 있었느냐, 요즘 것들은 참을성이 없다는 말로 청년들을 나무란다. 이 책의 말미에 인용된 이어령씨의 글이 대표적이다. 이런 시각이 팽배한 기성 세대들은 모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요즘 청년들의 눈이 너무 높다. 눈을 낮추어야 한다."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혹은 현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게 할 뿐이다."는 생각으로 청년들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고 한다. 청년들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상한 생각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파트너로로 보지 않는다. 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들을 가지고, 청년들을 동정한다.

 

  그 어디에도 현재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다. 혼밥과 혼술을 하고, 대학 5학년이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에, 어쩔 수 없이 1인 가구로 내몰린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청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없다. 그저 계도의 대상으로, 그리고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연령대가 얼마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그저 선거철만 되면 몇몇 정치인들을 청년들을 위한 자리라고 배졍하고 끝이다. 그마저도 임기가 끝나면 토사구팽 신세가 된다. 청년들을 시혜의 대상, 생각이 어린 녀석들 정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전에 셋째 외삼촌께서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투표권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피력하신 적이 있다. 어른이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책임도 없는데 무슨 권리를 주냐는 논지의 말씀이셨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셨고,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셨지만 청년 문제에서 만큼은 나와 격차가 너무 컸다. 청년들을 그저 본인의 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설령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스물이 넘은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불과 10-20년이 지나면 당신의 아들들이 뒷처리를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신했던 것, 그리고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88만원 세대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집필한 기성 세대가 아니라 헬조선의 상황을 감내하고 있는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년이라는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기성 세대와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청년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라면 청년이라는 대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는 글이 한두편쯤은 실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책에 청년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지금까지의 청년론과 오늘날의 청년론은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선에 멈추었기 때문에 아쉽다는 말이다.

 

  이 책의 결론은 청년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일 것이다. 청년은 불쌍히 여기고 시혜를 베풀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내고, 10-20년 후에는 이 사회를 짊어져야할 대상임을 분명히 알아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맞는 대우와 발언권을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 변화와 발언권의 보장 없이 무슨 세대간 연대가 가능하겠는가? 흙흙청춘이라는 말이 왠지 "흑흑청춘(저자가 분명히 의도했으리라 본다.)"인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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