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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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 이야기는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작은 고대의 그리스를 있게 만든 1차 페르시아 전쟁과 2차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에 대해서 민주주의, 델로스 동맹, 펠레폰네소스 동맬 정도만 알고 있다. 그들이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낸 것에만 집중하지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가운데 초반부에 속해 있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제를 떠 올리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가 역사 책으로 배워 왔던 고대 그리스의 정치 체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가장 먼저 이루어낸 스파르타가 아니라 비교적 후발주자인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창업자의 선견지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창업자란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렇지만 창업이라는 것은 일을 시작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그 일이나 시스템을 시대에 맞게 개조하는 것도 창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개조가 거의 개혁 수준의 변화라면 이 또한 창업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바뀌지 않는 스파르타와 시대에 맞춰서 새로운 창업자들이 나타나서 국가 체제를 거의 개혁에 준하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의 유무가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차이를 만들었다.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테미스토클레스를 거치는 시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1권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각 사람들이 창업자라고 불려도 무방한 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선견지명을 가지고 공동체를 마땅히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이끌어간 아테네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축복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준 전임자들의 시스템 개조의 덕이다. 법을 종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창업자의 유훈을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어 버린 스파르타가 시대의 흐름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겠기에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한때 이건희 회장이 주장했던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는 말이 있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는 강박관념이 우리 사회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했다. 삼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고, 한국 사회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말은 변화를 외치지지만 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정착시킬 수 있는 시스템은 부재했기에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지만 바뀐 것은 없다. 바뀐 것이라곤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열가지 편법이다. 말은 아테네를 지향하지만 행동은 스파르타를 지향했던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니 변화가 있을리가 없다.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일들만 수도없이 발생했을 뿐이다.


  이 사회가 정말로 변화하고 싶다면,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적용시키고 싶다면 변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격리시키고 추방하는 습성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창업은 변화라는 아이러니한 말이 이 시대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말이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변화를 향해 나갈지, 그리고 그 변화를 시스템으로 만들어낼 지 두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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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바다 - 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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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쐐기를 박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쐐기는 나무 못을 의미한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할 때 못이 아니라 나무를 가지고 못을 만들어 박는다. 그러면 나무가 물에 불어도 나무 못이 같이 불기 때문에 풀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쐐기는 바위를 쪼갤 때도 사용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들 때 돌을 깨기 위해서 쐐기를 박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고 여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물을 뿌려 주면 나무가 물에 불면서 바위를 쪼갰다고 한다. 특별히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계절의 변화가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서 쐐기가 물에 부는 것은 물론 단단하게 얼면서 팽창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힘도 없고 연약한 나무가 단단한 바위를 깨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고, 이러한 방법을 고안한 고대 인류들의 지혜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문명과 바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쐐기이다. 우리는 대항해 시대라는 것을 상당히 낭만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코에이의 대항해 시대라는 게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대항해 시대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 시기에 대한 낭만과 동경이 크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시기의 문명의 전파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지가 개벽하는 역사의 변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대항해 시대가 전 지구적인 문명의 변화에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유럽에 의한 아메리카의 지배라는 것도 영토적인 개념보다는 항로의 개척, 혹은 거점을 중심으로 한 지배일 뿐이지 영토의 확장이라는 의미에서 식민지배는 근대에 발생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고 대항해 시대의 영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대항해 시대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가? 견고한 문명의 벽에 쐐기를 박아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다라는 문명의 벽을 건너서 다른 문명에 유렵의 문명이라는 쐐기를 박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세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항해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그리고 인류의 모험심으로 인하여, 또한 무엇보다도 금전적인 동력으로 인하여 시작된 움직임은 당시 강고하던 세계 질서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다방면에서 다루고 있다. 물론 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들을 책으로 모은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던 내용들에 대해서, 그리고 간과했던 내용들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의외의 소득이고 즐거움이다. 은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환차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신선한 접근이었고, 고고려 인삼과 북아메리카의 인삼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 또한 소소한 재미를 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나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는 것이다. 쇄국 정책 때문이라면 그것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라면 그 또한 그것대로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매 한가지다. 


  이 책과 더불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시리즈이다. 1권을 읽고 아직 2권과 3권을 읽지 않았는데 이 책과 더불어 읽는다면 왜 그렇게 유럽에서 신대륙을 찾기에 목을 매었는지를 더 입체적으로 알게 된다. 여튼 저자는 개인적으로 판단하자면 바다덕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과 한 시대를 살면서 그의 책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것은 꽤나 유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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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뒷조사 - 한국교회에 던져진 엄중한 질문에 요한복음이 답하다 복음서 뒷조사
김민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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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번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축출된다는 것은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하는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택한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펜을 들어 그들의 선택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7개의 선언을 통하여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른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우리는 오늘날 어덯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메게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과 용기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위로를 던져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이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 내가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는 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고리타분하다는 것 같은 인신 공격에서부터, 교회가 썩었다는 합리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감당하고 손해를 보아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예전에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성경에 말한대로 산다는 것은 망하기로 작정한 것과 같다. 맞는 말이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고 세상에서 바보 취급 받기 딱 좋다. 그렇다고 명색이 그리스도인인데 약삭빠르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맘모니즘, 종교다원주의, 유사 종교와 같은 여려가지 복잡한 가치나들이 혼재하고 이로 인하여 우리가 택한 길이 정말 옳은 길인가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한복음의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 길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두번째는 우리가 세상에 파송받은 제자라는 것이다.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딛고 살아간다. 보수적인 교회 혹은 진보적인 교회는 우리에게 양단간에 결정하라고 한다. 세상인지, 아니면 교회인지. 그런데 이러한 강요는 잘못된 것이요 부당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세상으로 파송된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우리의 직장이고, 가정이고, 삶의 자리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교회 속에서 성경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던지는 이들이 실상은 세상 속에서 전혀 구별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너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묵직한 물음이다. 문득 이 책을 보면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건이 생각났다. 강남의 모 교회에서 담임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출교조치를 하고 교회건물 무단 점거로 고발한 사건 말이다. 왜 이리 묘한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세상 속에서 적절한 균형과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거하지도 못한다. 파송받은 사람이라면 파송한 이를 위해서 온전하게 맡은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우리는 보낸 이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이 기승전연애라는 패턴으로 끝난 것이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요한복음에 대해서 묵직한 깨달음을 던져주는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꽤 재미 있어서 한번 잡으면 끝까지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가독성과 재미, 그 사이사이에 녹여 놓은 신학적인 고민과 신앙적인 물음들이 꽤나 유익했다. 다만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요한복음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깊이는 그리고 신학적인 논란들은 한권의 책으로 끝내기에는 꽤나 방대하기 때때문입니다. 저자라든지 기록 장소라든지 여러가지 신학적인 배경에 대해서 저자가 택한 학설을 중심으로 끌어가고 있음을 알고 읽는다면 꽤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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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가는 향기 정채봉 전집, 생각하는 동화 2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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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가 남녀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안다는 말은 이 문구가 씌여있는 곳이 남자 화장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여자 화장실에도 씌여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본 일이 없으니 알 방법은 없다. 그 글을 볼 때마다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인가? 내가 머문 자리는 어던 모습일까?

 

  종이에 무엇을 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종이의 냄새를 맡아보면 안다는 불경의 구절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불경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안다.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 또한 너무 유명하기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안다. 그런데 알기만 한다. 그 구절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지는 않는다.

 

  어느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는가? 내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나의 말과 행동 속에서는 악취가 날까 아니면 향기가 날까? 멀리가는 것은 향기만이 아니다. 악취도 멀리간다. 그런데 멀리가는 향기라는 말을 쓴 것은 마땅히 그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서 향기가 나야한다는 매우 계몽적인 교훈이리라.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고 하는데 나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그리고 알라디너들에게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을까? 문득 지난 알리딘의 생활들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이 왔었고, 많은 사람들이 갔다. 초창기부터 알고 지냈던 분들 가운데에는 여러가지 안좋은 이유로 알라딘 생활을 접으신 분들도 있고, 오랫만에 다시 돌아오신 분들도 있고,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의 글을 오랫만에 읽어보다 보면, 그리고 요즘은 북플에서 나의 지난 독서 기록을 보여주는데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무시하고 싶을 때도 있다. 여기에 끄적거리고 있는 나는 10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나는 과연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날 때 무슨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내 삶에 대해서 겸허해지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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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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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인가부터 신문을 보면서 기사를 보고 신문사를 추측해 보거나, 신문사를 보고 기사의 내용을 추측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완전히 드러맞지는 않지만 70%의 비율로 맞추기 시작했다. 특별히 조중동은 거의 90%까지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신문의 곳곳에 나오는 특정 단어들과 논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룬다고 해보자. 대체로 조중동에서는 남북관계=안보불안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반면에 한경오는 남북관계=평화시대라는 내용의 기사를 쓴다. 같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그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느 쪽의 기사를 택하든지 계속 그쪽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내 생각이 그들의 사고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조중동을 선호하시는 나이드신 어른들은 남북관계를 말하면서 안보불안, 남침의 위협, 핵전쟁을 이야기하신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이 분들이 남북통일을 하시자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나도 어느새 한경오의 프레임에 갇혀버렸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예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토론회를 본적이 있다. 정동영 당시 후보를 보면서 도대체 저 양반은 왜 저러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도대체 인물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냐 아니면 선거 참모들이 무능한 것이냐 안타까워 했었다. 자꾸 이명박 후보의 경제 논리를 따라간다. 그럴수록 돋보이는 것은 이명박 후보의 경제 논리 뿐이다. 할 이야기가 그것만은 아닐텐데 그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한다. 경국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만약 당시 선거 참모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조금은 나아졌을까? 아니다. 그 사람들도 경제 논리를 우선시 했으니 나아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는 꽤 선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남북통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온갖 프레임이 난무하고 있다. 누가 먼저 논쟁의 주제를 선점하느냐에 따라서 우위가 결정된다. 그렇게 본다면 정치력이란 끊임없이 논쟁을 생산하고 자기에게 맞는 프레임을 가져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약간 불안한 구석이 있다. 보수에서 경제 이야기를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진보에서 슬슬 따라간다. 최저임금=경제위기라는 프레임을 떠들어 대는데 진보에서 국민들에게 어필할만한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딴지걸기를 하고 있다고 반박하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최저임금은 위험하다는 경고밖에 주지 못한다.

 

  진보 정치를 꿈꾼다면 보다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프레임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당에 이러한 태도를 기대할 수 없어서 정의당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기대는 헛된 기대가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마음이 더 답답한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책을 읽은 만족감(4년 동안 책을 읽었으니....)과 더불어 암울한 정치 무능에 답답한 마음을 괜시리 끄적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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