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흙청춘 -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살아남기
최서윤 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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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을 넣고 네이버 검색을 해봤습니다. 연관 검색어 1위가 '알바'일거라고 추정했는데 '글자 수 세기'였습니다. 회사에 지원하는데 1000자 이내로 쓰라고 해서였습니다. 청년하면 떠오르는 게 젊은, 정열, 사랑, 욕망이 아닌 그런 모습으로 살게하면 안 됩니다." -은수미 전 의원 필리버스터 중에서

 

  청년 문제가 심각하다. 은수미 전 의원의 공이었는지 이제는 네이버에 청년이라는 말을 넣으면 '글자 수 세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더 알아보는 지식백과에는 '청년실업률, 삼포세대, N포세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뜬다. 청년의 처지가 좋아져서 연관 검색어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청년 문제의 심각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청년들은 아직도 수저 계급론을 이야기하고, 헬 조선을 외친다. 어른들은 언제 살기 쉬웠던 적이 있었느냐, 요즘 것들은 참을성이 없다는 말로 청년들을 나무란다. 이 책의 말미에 인용된 이어령씨의 글이 대표적이다. 이런 시각이 팽배한 기성 세대들은 모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요즘 청년들의 눈이 너무 높다. 눈을 낮추어야 한다."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혹은 현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게 할 뿐이다."는 생각으로 청년들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고 한다. 청년들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나라의 기둥이라는 식상한 생각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파트너로로 보지 않는다. 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들을 가지고, 청년들을 동정한다.

 

  그 어디에도 현재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다. 혼밥과 혼술을 하고, 대학 5학년이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에, 어쩔 수 없이 1인 가구로 내몰린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청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없다. 그저 계도의 대상으로, 그리고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연령대가 얼마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그저 선거철만 되면 몇몇 정치인들을 청년들을 위한 자리라고 배졍하고 끝이다. 그마저도 임기가 끝나면 토사구팽 신세가 된다. 청년들을 시혜의 대상, 생각이 어린 녀석들 정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전에 셋째 외삼촌께서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투표권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피력하신 적이 있다. 어른이기 때문에 반박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책임도 없는데 무슨 권리를 주냐는 논지의 말씀이셨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오셨고,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분이셨지만 청년 문제에서 만큼은 나와 격차가 너무 컸다. 청년들을 그저 본인의 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설령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스물이 넘은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불과 10-20년이 지나면 당신의 아들들이 뒷처리를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신했던 것, 그리고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88만원 세대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집필한 기성 세대가 아니라 헬조선의 상황을 감내하고 있는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년이라는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기성 세대와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청년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라면 청년이라는 대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는 글이 한두편쯤은 실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책에 청년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지금까지의 청년론과 오늘날의 청년론은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선에 멈추었기 때문에 아쉽다는 말이다.

 

  이 책의 결론은 청년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청년들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일 것이다. 청년은 불쌍히 여기고 시혜를 베풀 대상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내고, 10-20년 후에는 이 사회를 짊어져야할 대상임을 분명히 알아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맞는 대우와 발언권을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 변화와 발언권의 보장 없이 무슨 세대간 연대가 가능하겠는가? 흙흙청춘이라는 말이 왠지 "흑흑청춘(저자가 분명히 의도했으리라 본다.)"인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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