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심리 상담 - 병든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내면을 어떻게 파괴했는가
김태형 지음 / 다시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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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참 괜찮은 녀석들이다.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꽤나 반듯한 아이들이 많다. 요즘 젊은이들은 생각이 없고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내가 만나본 녀석들은 그렇지 않다.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판단을 하는 어른들이 문제이지, 그들은 결코 생각이 없지 않다. 오히려 요즘 녀석들은 생각이 없어라고 말하는 그들이 젊었을 때보다 생각이 더 많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그래서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들이 생각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 한 녀석이 생각이 난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외국에 나가 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어디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외모도 그 정도면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고, 성격도 모난 곳이 없다. 학교도 괜찮은 곳을 나왔고, 책임감도 있다. 공동이 해야 할 일을 맡길 때에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인턴을 몇번 하면서 면접을 보다가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어학연수라는 스펙을 쌓기 위하여 외국에 1년간 나갔다. 잘 다녀오라고 축하해주고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얼마나 청년들을 몰아 붙여야 하는가? 이런 안타까움 때문이다.

  처음 이 녀석과 대화를 했던 때가 생각이 난다. 커피 한잔 사주면서 요즘은 어떻게 살아가니로 시작하여 대화를 나누다가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그날은 작심하고 만났기 때문에 일부러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그 녀석의 사촌들이 꽤나 잘나간다. 의사도 몇 있고, 취업해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래서일까? 그 녀석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컸다. 자기도 모르고 있지만 부모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부모가 자신이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자랑스럽게 밝히도록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처음 들어간 학교는 그러한 기준에 모자랐기 때문에 반수를 했고, 이름을 내밀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한동안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가 되어서 문제가 발생했다. 취업도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선택을 하는데 쉽지가 않다. 매일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그 녀석의 자신감이 계속 추락을 한다. 그 녀석의 부모도 그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데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자신을 계속 몰아 붙인다. "괜찮니?"라고 물어보면 "괜찮아요."라고 답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한잔 하면서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내가 보기에 너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큰 것 같아.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거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다. 당황했다. 커피숍에서 비록 그녀석하고 10살 이상 차이가 나지만 남녀 둘이 앉아 있다가 여자가 무슨 말을 듣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오해하기 딱 좋은 그런 그림이다. 게다가 괜시리 그 녀석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참을 말없이 울더니 냅킨을 가져다가 눈물을 닦고 "창피하게 울었네요. 아! 창피해!" 이러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그 녀석의 부모님이 조심스러워서 지금까지 살면서 한 마디하지도 않고, 눈치도 주지 않지만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이 녀석이 이후에 참 고마워한다. 그날 내가 그 녀석에게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커피 한잔 사주고, "넌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 한마디 해준 것 밖에는 없다.

  이 녀석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럴 때마다 같은 이유로 힘겨워 하는 녀석들을 만났다. 내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데, 자꾸 스스로를 몰아 붙인다. 그나마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녀석들은 회복이 빠른데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다. 군에 있을 때에는 그러다가 자살한 녀석도 몇 명 봤다. 

  요즘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더 이상 유행어가 아니다. 일반 명사가 되었다. 왜 그럴까? 어느새 이 나라에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시대를 지나면서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라는 것이 서열화 되는 것이 아닐진대 수능 점수로, 혹은 학교로, 혹은 직장으로 사람을 서열화 한다. 누구는 금수저, 누구는 흙수저로 분류가 된다. 그 사람의 조건이, 그 사람이 처한 서열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는 것인양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러니 상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굴러떨어질까 두려워서 하위 그룹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인색의 낙오자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여서 살아간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리라. 이 책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이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 특별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케이스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를 보자. 이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한트럭은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야,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야, 지금의 아픔이 너의 인생에 귀중한 밑거름이 될거야 이런 식상한 말을 하지 말다. 그냥 진심을 담아 한마디만 해주자.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그 무슨 말보다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에게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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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도시, 베네치아 - 500년 무역 대국
로저 크롤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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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유럽이 열리기 전에 낭만의 도시는 베네치아였다. 도시를 연결하는 수로, 곤돌라, 아름다운 건축물 등등. 지금이야 낭만의 도시 하면 프라하를 꼽지만 내겐 아직도 베네치아다. 게다가 코에이사의 대항해 시대를 통해 세계 지도를 외운 나에게 베네치아는 남다른 도시다. 안드레아 도리아라는 제독, 지중해를 가로질러 달리는 베네치아 갤리온. 대항해 시대2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최강의 범선 쉽과 최강의 전투선 철갑선이 나오기 전에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전함은 베네치아 갤리온이다. 게임을 시작하면서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해서 베네치아 갤리온을 뽑아서 지중해를 누비면서 해적들에게 삥뜯기를 시작할 때의 감격이란...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여튼 내게 베네치아는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도시였다. 그러다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통하여 베네치아의 역사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에 대해서 약간은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야만족을 피하여 도망간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가던 베네치아가 어떻게 그렇게 강국이 되었는가?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지만, 베네치아에 관련된 책들은 대개 강국이 된 베네치아, 그리고 몰락하는 베네치아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 베네치아의 시작과 그들이 해상 제국으로 성장할 때의 시대를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도대체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해상 강국으로 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그 작은 도시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유럽의 강대국들과 오스만 제국과 전투를 하면서도 쉽사리 멸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강국, 로마 시대 뒤를 이어 해상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베네치아가 선택했던 묘한 정치 제도에서 찾는다. 베네치아는 겉으로야 어떻든 간에 권력이 대물림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집안의 부와 권력은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지만, 국가의 권력은 사유화될 수 없다.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는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간혹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서 오랜 세월동안 베네치아를 이끌어 간다고 해도, 막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해도, 정치 제도적으로는 여러표 가운데 한표를 행사하는 존재일 뿐이다. 국가의 권력을 잠시 위임받아서 도시를 이끌어가는 대리자일뿐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체제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나은 점은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는 것?


  자원이 부족한 베네치아는 무역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공업 원료도, 심지어는 식량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는다면 한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베네치아 발전의 원동력이자 몰락의 주된 원인이기도 한다. 이 또한 대한민국과 닮았다. 다만 대한민국이 베네치아에 비하여 훨씬 더 커다란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수 활성화라는 또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해상 제국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치아는 선견지명이 있는, 그리고 지혜는 물론 결단력까지 있는 지도자를 만나 해상 제국의 길을 걷는다. 이를 위해 베네치아는 정보 수집과 수집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해상 교통망 설치에 목숨을 건다. 터키와 싸워서 영토를 잃을 때에도 베네치아가 목숨걸고 사수하려고 했던 것은 해상 교통망이었음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얼마만큼 정보의 수집과 취합, 그리고 이를 통한 외교 정책 수립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가지고 외교에 나서는 베네치아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통털어 가장 현대적인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터키의 궁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 일이 어떤 파장을 끼칠 것인지 몇번씩이나 고민하고 점검하여 외교를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모 측근의 막연한 희망인 2년 안에 북한이 몰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 운운한 우리나라가 그저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베네치아의 국정 운영과 협의 프로세스를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들이 무역에 목숨을 건다는 점을 본다면 베네치아는 국가라기보다는 주식회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 누구도 권력을 사유화할 수 없고, 가진 무게만큼 발언권을 갖는 주식회사. 모 그룹처럼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할 수 없고, 대물림이 아닌 시민들과 지도층의 신임을 묻는다는 점도 주식회사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현대의 주식회사와 차이가 있다면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의 유무 정도?


  내가 베네치아의 역사를 읽어가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 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과거 누가 말한 것처럼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CEO에 의해서 주식회사의 미래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서 나라의 앞날이 큰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지 않도록, 권력된 독점도 절대로 사유화하지 못하도록 온갖 장치들을 둔다. 혹 이러한 장치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기업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CEO를 해임한다. 올바른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기업의 전략을 연구하고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관을 설치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 취합, 가공하며 이를 토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이 기본만 지켜진다면 기업은 구성원들의 충성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다. 시민들은 평시에는 큰 발언권을 얻지 못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서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베네치아가 500년을 갔던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혼란한 이유가 무엇일까? 베네치아가 오랜 세월동안 지켜왔던 원칙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 정보 수집과 취합, 그리고 가공의 아마추어리즘, 국민들의 발언 무시 및 재갈물리기.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 작은 도시 국가로 시작하여 해상 제국을 설립한, 그렇지만 결국에는 한계에 부딪쳐 몰락한 베네치아의 500년 역사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 주식회사 베네치아의 500년 역사 앞에서 대한민국의 앞날을 묻는다.


  번역이 깔끔하여 책을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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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6-11-2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세인트님의 베네치아 지식 습득과정이 저랑 거의 동일하신..... ^^;

saint236 2016-11-24 22:16   좋아요 0 | URL
그럼 연식이...ㅎㅎ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이덕일 지음 / 마리서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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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절이 하수상하다.

 

  132만이나 되는 숫자가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과거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대통령이 탄핵되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나서서 대통령 퇴진을 외치지는 이승만 대통령 이래로 처음이다. 흔히 100만이 모였다는 87년 민주항쟁도 대통령이 물러가라는 말이 아니라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물론 "전두환은 물러가라 울라~울라~"라는 노래가 불려졌지만(나는 그때 초딩이었기 때문에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다만 대학생 때의 집회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분명히 불렀을 것이다.) 이 노래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동의하지 않는다는 측면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국민들이 외치는 대통령 하야는 순수하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다. "이게 나라냐?"라는 문구 "내가 이러려고 ~이 되었는가라는 자괴감이 듭니다."라는 유행어, "#그런데 최순실은"이라는 말은 오늘날 일어난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정치인들이, 검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차와 과정은 다르지만, 야당 모두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다. 검찰들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대통령을 탈탈 털겠다는 의지를 슬쩍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솔직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얼마나 순수하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들의 노림수는 무엇인가? 국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이야기하니 거기에 붙어서 자기들의 이해타산을 따져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검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가지 우병우 밑에서 숨죽이고 있었고, 조선일보 기자에게 저격을 받았는데 이 기회에 잘 처신하지 않으면 역풍을 맞겠다는 계산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그리고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다시 역사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국민들의 요구가 성공한 개혁이 될지, 아니면 양은 냄비 끓듯이 끓어 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실패한 개혁이 될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씩 살펴본다. 그러던 차에 이미 읽었지만 아직 리뷰를 작성하지 못한 이 책을 끄집어 내어 다시 읽고 끄적거려 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한국사에서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성공한 개혁군주들의 이야기, 성공한 법안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을 신라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의 차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중 내가 동의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젠다 설정이요, 다른 하나는 생활 밀착형 제도이다.

 

  첫째 아젠다 설정이 개혁의 성패를 좌우한다. 신라의 통일과 숙종의 왕권 강화책을 통하여 이덕일은 아젠다 설정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장한다. 삼국 중 가장 외진 곳에 있고,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삼국통일이라는 분명한 아젠다를 국민들에게 보여 주었고, 그 아젠다를 따라서 정책을 세우고 실천해 갔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신하들에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이 일을 왜 해야하는지 분면하게 보여주었기에 그 개혁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숙종의 왕권 강화는 아무런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왕권을 강화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라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없고, 아젠다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강화라는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개혁이란 사라들에게 이상을 보여주고 그 이상을 향하여 나가자고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한 이상, 즉 정책의 의제 설정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진보 진형이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9년의 세월을 돌아본다. 난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과거 10년간 진보 진영에서 집권을 했다. 그런데 10년의 집권 동안 무엇을 했던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비전을 보여주었던가? 그렇지 않다. 결국 그 실패가 전권 교체를 불러왔다. 잘 살게 해주겠다, 경제 민주화라는 지키지는 않을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사람들에게 달콤한 이상을 보여줘었기에 새누리당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국민들이 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가? 지난 9년동안 제시했던 아젠다가, 비전과 이상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고, 의제를 잘 설정한다면 국민들은 다시 그 사람을 뽑아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반기문이든, 유승민이든, 김무성이든 말이다. 그런데도 소위 말하는 진보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의제를 설정하지도 못한다. 먼저 치고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뒷북을 친다. 그러니 종북 프레임, 나는 빨갱이가 아니오라는 해명만 하다 끝난다. 진정 재혁을 하고 싶다면 국민들에게 왜 자신을 뽑아야 하는지 설득하라. 그저 박근혜 반대 효과만 바라보지 말고 말이다.

 

  둘째 생활 밀착형 정책이 개혁의 성패를 가른다. 선공한 제도 개혁을 살펴보면 그것이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정책들은 대개 지도층이나 집권층의 이익을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반발을 받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활 밀착형 정책들은 결국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민들이 무엇 때문에 폭발했는가? 단순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난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쌓여왔던 것이 이번 게이트를 통하여 밖으로 촉발된 것이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주택 정책 실패 등등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책들이 모두 실패했다. 그 결과 헬 조선이라는 말, 지옥 불반도라는 말, 수저 계급론이라는 말이 이 시대를 사로 잡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자랑스러운 우리 나라를 비하하는 그런 말은 사용하지 말라면서 국민들을 훈계했다. 국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면서 뜬 구름 잡는 이야기들만 한다. 그러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북한의 위협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치자. 정권이 교체다 되었다고 치자. 국민들이 왜 정권을 교체했을까? 생활을 좀 바궈보라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시대가 국민들에게 외면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진보 진영 측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생활에 밀착한 정책들에 대한 체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살게 해주겠다는 MB의 말에 혹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정치인은 통일, 북핵, 세계 평화라는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겠지만, 청년 취업, 일자리 창출, 주택 문제와 같은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국민들에게는 후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오늘날 현실이 복잡하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다음에는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하듯이 정권 심판론에만 머물러 있다면 정권교체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교체되어 국정 운영에 난맥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성공한 개혁이라는 역사적인 족적을 남기고 싶다면 위의 두 가지는 반드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저자로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독자가 각자 판단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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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 최초의 해상 제국과 민주주의의 탄생
존 R. 헤일 지음, 이순호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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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와 스파르타!

 

  매우 특이한 조합이다. 둘은 닮아 있는듯 하면서 전혀 닮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것, 동일하게 패권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에서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렇지만 패권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에서는 정말 다르다. 소수의 엘리트들과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스파르타와 소수의 엘리트들과 다수의 대중에 의한 승인에 의해 움직여지는 아테네! 어찌보면 이 둘이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 고대 국가들을 양분하여 격돌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혹자들은 스파르타는 육군국이요, 그리스는 해군국이라고 차이점을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구분이 모호해졌다. 스파르타가 육상전을 선호하고, 아테네가 해상전을 선호했던 차이는 있지만, 아테네를 꺾기 위해 결국에는 스파르타도 해군을 조직했고, 이를 통하여 아테네를 몰락시켰다. 물론 어떤 이들은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동맹국들의 해군을 동원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육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이지 분명 아테네와의 전쟁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왠만한 도시국가의 해군을 찜쪄먹는 해군을 보유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은 시스템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는가, 집단지성에 의해서 사회가 유지되는가에 있다. 시스템이 건전하게, 그리고 시대에 걸맞게 작동하던 시대의 스파르타가 강국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지성이 상식적으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아테네는 강국이 되었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육군 증강과 해군 증강을 두고 충돌했을 때 아테네의 대중은 해군 증강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단 시작이 어렵지 시작을 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통크게 해군을 증강했으며, 서로 다른 자산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도 함께 노를 젓는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물론 시작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들에게 부과된 임무를 받아들였다. 대중이 상식선에서 사고하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건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시스템이 시대에 발맞추어 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듯이 아테네는 대중의 판단이 상식선에서 건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엘리트들 사이의 싸움들이야 항상 있어온 것들이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도 항상 있었던 것이고, 자극적이고 황당한 발언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도 항상 있어왔다. 다만 그들의 주장 앞에서 대중이 이성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판단하는가 하지 못하는가가 그 사회의 발전과 몰락을 결정한다. 아테네의 전반기는 집단 지성의 건전성과 성과를 보여줬다면, 아테네의 후반기는 집단 지성의 불건전성과 한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자질 유무를 떠나서 전반기 아테네는 실패한 그들을 용인하고 후원할 것을 결정하였지만 후반기의 아테네는 유능한 지도자마저도 어이없는 이유로 끌어내리기 일쑤였다. 유능한 지도자들이 아테네를 이탈한 이유, 그리고 처형당한 이유가 감정에 휩쓸린,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동된 대중들의 결정이었다. 사람은 바뀌어도 시스템은 작동하는 스파르타에 비하여 대중의 판단에 대부분의 것들을 맡겼던 아테네가 안고 있었던 불안요소가 더 컸을 것은 자명하며, 이로 인하여 아테네의 몰락이 더 빨리, 그리고 급하게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테네는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테네를 보면서 집단지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집단지성을 맹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집단에 의한 결정이면 덮어놓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SNS에서 많은 사람들이 "카더라"고 말하면 덮어놓고 믿는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믿는다. 그 결과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용기를 가지고 아니라고 진실을 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당장 위키피디아를 들어가보라. 그리고 위키피디아에 대한 기사들을 몇개 검색해보라. 집단지성의 한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위키피디아가 집단지성을 통하여 발전하는 포맷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긍정적인면 속에 한계가 담겨있다. 책임을 지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가 그대로 노출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짐으로 인해서 집단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잘못된 정보가 단순히 실수라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악의적으로 의도된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아테네의 대중들이 악의적인 선동에 휩슬려 자신들의 유능한 함대 지휘관들을 처형하고 이탈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요즘 온통 소란스럽다. 사람들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임계점은 이미 지났고 하나둘씩 폭발하고 있다. 상식과 이성 대신에 감정이 우선시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집단으로 모이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집단의 힘이 양날의 검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사회의 부조리와 적폐(많이 듣던 말이다.)를 청산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괴물을 출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건전한 상식과 다양한 논의,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자극적인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일베 국회의원과 pure siri party(알만한 사람은 다 알거라고 생각한다.)와 관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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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난민 - 꿈을 이룰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혼다 유키 해설, 이언숙 옮김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어서 오세요. 희망 찾기 유령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귀에 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 무서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 희망 난민이라는 제목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힘겨운 생호라 여건 속에서 난민처럼 떠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저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회는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품으라고 말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는, 그래서 차라리 희망을 포기하도록 단념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답게 저자는 희망을 단념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주제로 출항하는 피스보트! 이 여행을 통하여 무엇인가 삶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젊은이들! 100일이 넘는 여행기간 내내 가장 적극적으로 헌법9조와 난민 문제, 평화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젊은이들! 여행이 끝난 후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 난민과 같은 문제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들의 삶을 채운 것은 피스 보트를 통해 맺게 된 인간관계!


  무엇인가 비틀린 것 같은 기묘한 현실을 저자는 공동체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설명한다. 세계 평화라는 목적성이 휘발되어 버리고 피스 보트 참가자라는 공동체성에 천착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성이라는 것도 서서히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현실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받아들여주는 승인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어설픈 희망을 주지 말고 이렇게 공동체성이라는 것으로 살아간다면 젊은이들에게 이 또한 행복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 변화라는 것은 가끔 나타나는 깨시민 엘리트들에게 맡겨두고 말이다. 나는 저자의 이 말을 역설로 받아들여야할 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오해한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피스보트와 같다는 생각말이다. 희망을 찾기 위해 시작했지만, 몇번의 냉각기를 거쳐서 목적은 읽어버리고 그저 공동체성에 천착하면서 안심하는 그런...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몇년 전에는 광우병 때문에 이명박 하야를 외쳤다. 명박 산성이 등장했고,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서 반성을 하면서 아침이슬을 불렀단다.(내가 보기엔 아침이슬을 드신 것 같지만. 물론 장로님이라 그렇지는 않았겠지...) 세월호 사건 때에도 광화문에, 시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릴레이 단식도 했다. 그런데...뭐가 달라졌지?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 궁금했다. 물론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관찰만하고 있는 나를 비겁하다고, 그런말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왜 달라지지 않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목적성의 휘발과 느슨한 공동체성이 그 이유이다. 지금 광화문에는 박근혜 하야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인다. 그들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동지이다. 몇번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 그러면 묘하게 연대 의식만 남고 박근혜 하야라는 목적성은 휘발되어 버린다. 부글부글하던 마음이 냉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몇번 반복되면 이젠 냉각되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외친다. "단념해. 희망은 없어. 파랑새는 죽었어."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말대로 세상을 바꿀 엘리트, 깨시민들은? 없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 그들은 아예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데 있다. 같은 공동체성도 없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아예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하야를 외치면서도 총리 임명권 줄께라는 말에 신중을 기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희망은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환상을 준다. 이런 희망고문을 멈추라고 한다. 파랑새는 죽었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되는가? 희망이 없다고 단념하고, 느슨한 공동체성에 천착하면 되는가? 나는 혼자가 아니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나를 용인시켜줄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에 위안을 느끼면 되는가? 나는 이것이 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기 알겠지만 그래도 난 해설과 반론의 혼다 유키의 입장, 그래도 목적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책을 읽은 후의 상념이 사라지기 전에 두서 없이 적어봤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곱씹어보면 생각이 좀더 정리가 되겠지만, 내 성격상 지금 적지 않으면 언제 적을지 모르기에 급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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