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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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역사e를 통하여 우당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 놓았던 이회영 평전이 내 서재에 꽂혀 있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이덕일의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책을 먼저 읽고, 바로 이어서 이회영 평전을 읽었다. 이회영 평전은 이회영이라는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이회영과 그를 출러싼 아나키스트 그룹의 성장과 몰락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서 한국의 독립 운동사에 있어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던 항일 무장 행동들의 대부분이 이회영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왜 이 사람을 아직까지도 몰랐던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라는 학교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 학교가 이회영 일가가 세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우당이 그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북한과 남한 양쪽에게서 조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이들의 입장에 선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광복을 맞기 전에 중국에서 임종을 맞이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제도권 밖의 길을 묵묵히 택했던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 그리고 그와 함께 조선을 등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난 많은 이들. 우리가 그들에게 빚진 것은 너무 많은데 아무도 그들을 몰라준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 작위를 하사받고 보상금을 두둑히 챙긴 사람들, 나라를 넘기고 가문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조선의 왕가에 대한 이야기들만 넘쳐난다.

  얼마 전 덕혜 옹주라는 영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영화를 통하여 사람들이 역사적인 사건을 잘못 알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평론을 해대던 많은 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영화 이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사람들도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난 영화는 그냥 영화로 생각해야지,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려고 하는 순간 영화를 이데올로기라는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덕혜옹주를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난 그 영화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힐 뿐이다. 이름만 빼고 무엇하나 역사에 근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혜 옹주를 보고 영화 평론을 통하여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대중들의 생각을 너무 짧게 봤다고 말하고 싶다. 약간 각도가 다르긴 하지만 그들도 대중을 개돼지 정도로 보는,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 주의에 경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학교에서 이 책을 한번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독립 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려면 공산진영, 자유진영, 그리고 아나키스트 그룹의 독립운동사까지 전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가 이 세 그룹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리고 모든 독립 운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장소의 주인이자, 그 장소를 마련해 준 이회영이라면 더더욱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 독립운동을 다루는 영화가 또 나온다면, 이회영을 중심으로 제작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회영 평전이 이회영 개인의 삶에 집중한 경향이 있다면 이 책은 이회영을 둘러싼 아나키스트 그룹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덕일답지 않게 날카로운 비평은 없지만, 이회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아나키스트라는 독립 운동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류에 대해서 알게 해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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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평전 -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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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아직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이 주장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라는 것이,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민족주의 사관을 살펴보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해보았지만 놀랍게도 이회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의 경우도 암살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까지 한국의 양반들은 일제에 부역했던 존재들이었으며, 몇몇 사람 정도만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자살했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우당 이회영과 그의 일족의 삶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양반으로 태어나서 아나키스트라는 특이한 길을 걸어간 그의 이력은 내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좌도 우도 아닌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에 그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것에 비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일제와의 투쟁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자유주의 진영,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진영!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하였다. 아니다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하였다기 보다는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주의 진영에 투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회영처럼 제 3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다. 물론 약산 김원봉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순수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원했다. 이들은 힘도 없으면서 외교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며, 설령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일제에서 미국으로, 혹은 소련으로 지배의 주체만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시간을 보내면서 독립을 준비하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일제에게 맞서서 지금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무장 행동이다. 다만 무장 행동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수단이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민족은 물론 당시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본과의 투쟁을 위해서 그어느 단체와도 사심 없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이회영과 같은 거목이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로이면서도 아랫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고, 강압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오해를 사서 자신이 지도했던 단체에 의해 암살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의 신념을 한번도 꺾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달려갔다. 대접받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절대로 책임자의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순수한, 그리고 진실한 독립 운동가의 대명사, 그가 우당 이회영이다. 자신의 재산을 다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바쳤고, 그 결과 형제들과 그 가족들 가운데 아사자가 있었고, 병으로 죽고, 투옥당하고, 살해당하고. 부인과 생이별하고, 자녀들을 무장투쟁의 길로 인도하고. 개인적으로 그가 겪었을 그의 아픔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글의 행간에서 읽힌다. 그렇지만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오늘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라 걱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진실하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회영 선생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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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수업 - 중년 이후, 존엄한 인생 2막을 위하여
고미숙 외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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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일 관계로 만난 여자 분이 있다. 동석하셨던 분이 이 분에게 나이를 물었다. 43살이라고 하셨다. 몇 년생이라고 묻는 추가 질문을 통하여 이 분의 나이가 41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틀렸다고 말해 줄 수도 없어서 그냥 듣고 있었는데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는 것이 그만 두었다고 하시면서 올해는 자기 나이가 43살이라고 하신다. 상당히 열심히 살고 있는 분이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이 일이 떠 올랐다.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자기 나이를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내 삶의 궤적은 어떤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나이이기 때문이다.

  스무살에 김광석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김광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동아리 선배들을 통해서 김광석을 좋아하게 되었고,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라는 앨범은 정말 많이 샀던 것 같다. 여러개를 사서 주변에 나눠주었고,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듣다가, 나중에는 CD가 긁혀서 듣지 못할 정도로 들었다. 좋아했던 녀석에게 거절당하고 선배들이 불러주었던 외사랑, 아픔을 담아서 자주 부르던 그녀가 처음 울던 날...그 중에 그냥 비만 오면 불 꺼놓고 들었던 노래가 있다. 서른 즈음에...그냥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서른이 되었다. 그ㄸ때 느꼈던 감정은 "헉"이다. 어느새 서른이 되었고, 이제 조금 지나면 마흔이 된다.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서 마냥 스무살 시절의 나만 떠올리던 내가 이젠 그 두배의 나이가 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그럼 육십이 되어서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까였다. 아직은 20년을 더 가야 하지만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내 인생이 대답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60이 되어서 여전히 "헉"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백세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백세를 준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다. 백세를 살아지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백세가 되고, 어쩌다보니 이 나이가 되는 것이다. 앞만 보고 정신 없이 달려가다보니 어느새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나이를 먹고, 아무런 준비없이 노년이라는 문텩을 넘게 된다. 고령 사회에 이미 진입했다고,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은 하지만 그 노인 문제를 잘 준비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저 돈 몇 푼 쥐어 주면 된다는, 그들의 표만 얻으면 된다는 얇팍한 표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 나이가 되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지만 뚜렷한 답은 없다. 그저 그 나이가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공짜가 있을리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멋있게 나이를 드는 것도 공짜가 있을리가 없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물론 이 공부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그런 수학 과학 물리같은 것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공부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물을 남길 수 있는지 생각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한 살의 나이를 더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남기는 것인지 한번 점검해 본다. 마흔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혹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내가 싫어하는 꼰대질은 젊은이들에게 강요하고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까지 쏟아냈던 그 많은 말들이 그저 허공 중에 흩어져 버린 말은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말 한대로 살겠다고 그렇게 애를 써왔는데 진짜 그렇게 살아왔는지...

  특히 책의 장 강연을 강연자였던 유경 선생의 강연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 해보게 된다. 죽음 준비학교라는 책으로 유경 선생을 접하게 되었고, 많은 공감을 했는데, 그 뒤로 10여년이 지난 뒤 다시 읽는 유경 선생의 강의는 남다르다. 내 관계를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어 가고 있는지, 아이들과의 유대감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떤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이 그저 감사하다.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하는데도 전화할 때마다 빠듯한데 용돈 보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감사하고, 사위 고생이 많아 힘들어서 어째라고 말씀해 주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감사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지금부터라도 한 살씩 먹어가면서 한 살 한 살의 무게를 더 하고, 의미를 싣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더 애쓰고,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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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 쉽게 상처받고 주눅드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 회복의 심리학
롤프 메르클레 지음, 유영미 옮김 / 생각의날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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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

 

  성경에 있는 구절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이냐?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단순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경 구절을 곱씹어 보면 한 가지를 더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끼어 있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지나가지만,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대해서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너무나 쉬워보이고,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요즘은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렵다. 스스로를 흙수저로 규정한다. "이러려고 ~했나라는 자괴감이 듭니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박탈감과 낮춰봄이 자리잡고 있다. 자살율 1,2위를 다투는 현상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치유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돕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몇 번씩 읽고, 메모하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고 말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이 글을 읽고난 다음에 도대체 얼마나 거창하기 때문에 이런 말까지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내용은 거창하지 않다. 정말 쉽다. 게다가 양도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양 가운데 대부분은 심리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말과 사연이다. "이러려고 이 책을 샀는가라는 자괴감이 듭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렇지만 작가의 말처럼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각 장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읽고 끊임없이 실천하다보면 자기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외부에 의해 규정된 자신이 스스로를 옭아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정한 규칙이, 부모의 기대가,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 내린다고 말한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을 부모가 행한다는 것이다. 격려자가 되어주어야할 부모가 아이들의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기보다 성공을 위한 지식을 가르치는데 애쓰기 때문이 아닐까? 난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여러가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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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 손석춘.김기석의 대화
김기석.손석춘 지음 / 꽃자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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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함이 넘치는 세상이다.

 

  사람도 스마트해야 하고, 옷도 스마트하고, 휴대폰도 스마트하다. 심지어는 교복도 스마트하다. 마치 스마트하지 않으면 구닥다리요, 구태의연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시대이다. 스마트라는 말을 통하여서 우아함과 세렴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가지만, 난 스마트라는 말 속에서 쫓기는 듯한 다급함과 얕음을 느끼게 된다. 특별히 진중해야하는 신앙의 부분에서 스마트를 말하게 되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참담하기까지 하다.

 

  똑똑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교회도 똑똑해지려고 한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런데 교회는 그러면 안된다. 다른 단체들은 똑똑해지고, 세상의 가치들에 충실해야하지만, 최소한 교회는 옳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도 이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런 자리매김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구식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도 바쁘게 돌아가야하고, 유행을 선도해가야 하고 스마트하고 효율적인 단체가 되어야 한다. 투자 대비 어느 정도 성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어느샌가 교회는 세상과 똑같이 스마트라는 명목 하에 깊이와 뚝심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두 바보가 기독교에 대해, 성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주기도문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죄의 용서와 빚의 탕감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지겹도록, 바보처럼 천착한다. 주기도문의 고갱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자가 가진 이해와 내공을 드러내 보인다. 이 책이 다른 신앙 서적에 비하여 유명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보스러운 두 사람이 전혀 스마트하지 않고, 전혀 트렌디하지도 않고, 깊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기석과 손석춘이라는 내공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천착하게 될 때 어떤 결과물들과 깨달음이 나올 것인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바보스러운 두 사람의 바보짓에 동조하게 된다.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그저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가 한 말을 어떻게 삶 가운데에서 지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함에 마음 아파하는 두 사람의 바보.

 

 참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이 두 사람이 이 시대를 좀더 따뜻하게 밝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이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맞았던 사람들은 모두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다. 멀리서 찾아왔던 동방박사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찾아갔던 목자들, 마리아와 요셉도.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참 바보같은 이들을 통해서 세상은 조금은 살만해졌다. 조금은 나아졌다. 그런데 요즘 그 바보들이 사라지고 있다. 교회도 스마트해지고, 트렌디해져간다. 그런 세상 속에 간만에 보는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아직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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