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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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관련 콘텐츠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2012년 영화 광해가 나왔을 때 왜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까? 명량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왜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영화에 열광했을까? 대조영, 광개토대왕이 드라마로 방영되었을 때에 왜 많은 사람들이 그 드라마에 열광했을까? 그저 국뽕이라는 말로 치부해 버리면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 국뽕이라는 한마디 말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이 영화가, 혹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비결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박탈감, 분노, 안스러움, 절망과 같은 감정들이 그 콘텐츠에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지도자와 자존심, 희망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정조가 인기를 끈다. 기승전연애로 끌고가기 정조가 가진 스토리는 힘이 딸린다. 주변에 변변찮은 러브 스토리 하나 없고, 책과 정사에만 매진했던 정조인지라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전개하는 방식을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불가능한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라는 캐릭터가, 그리고 그 시대가 조명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정조의 시대에 열광하고 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암울한 시대가 오늘날 우리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본다. 정조의 시대는 영조의 오랜 치세를 겪었지만, 그 오랜 치세가 독이 되어 돌아온 시대이다. 왕조 국가 조선에서 신하들이 왕을 택하는 택군이 일어나고, 그렇게 노론과 손을 잡은 영조의 치세가 오래되면서 노론은 탄탄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관록이 붙어 있는 영조마저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급기야는 아들 사도세자마저 뒤주에 가두어 죽게 만들어야 하는 암울한 시대, 민족과 나라의 이익보다는 당파의 이익이 우선시 되는 시대가 바로 영조의 시대였다. 정조는 영조가 가지고 있던 관록마저 없어졌으며, 자기 외가가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안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할아버지로부터 왕권과 더불어 물려받았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복잡한 시대, 요즘말로 하면 혼용무도의 시대라고 하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혼용무도는 전 지도층을 포함하지만, 정조의 시대는 정조를 제외한 지도층들을 포함한다는 정도? 정조가 어리석지 않으니 혼용무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복잡했다라는 정도로 넘어가주길 바란다. 게다가 정조 즉위 당시 임금은 정조가 아닌 노론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니 혼용무도라는 말이 썩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이런 혼용무도의 시대에 정조가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도 크게 넘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정조가 혼용무도의 시기에 그나마 희망을 빛을 던져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리박빙의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위태한 시대, 위험한 시대 속에서 한발 한발 조심하면 근신하는 것, 그것이 정조가 자기 외로운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다만 여리박빙이라는 말이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모호하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밝혀둔다.

 

  정조와 같은 혼용무도의 시대, 그 시대 속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정조가 했듯이 근신하면서 여리박빙의 심정으로 조심하면서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요즘 차기 대선 주자들, 차기 정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조심하기만 한다. 너무 조심하다 보니 자기 생각도 없고 그저 보신에만 급급하다. 뚜렷한 자기 생각도 없고, 소신도 없다. 정조가 허탈해 했던 것처럼 머리 속에 든 것도 없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을 찍찍 해대면서 왜 MS오피스를 마이크로 소프트사에서 사오냐고 사퇴하라고 큰 목소리를 외치는 사람들만 많다. 사드가 어떻고, 북핵이 어떻고 할 말이 많은데 국방위는 김제동 국감을 하고 있다. 혼용무도의 시대에 여리박빙의 심정이 아니라 지붕이 푸른 집 눈치만 보고 있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지도자들이 여리박빙이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에는 이덕일의 책 답지 않게 평가와 해석이 거의 없다. 드라이하게 역사적인 사실만 늘어 놓았다. 이 책이 이덕일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감흥이 없고, 읽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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