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서사시 범우고전선 10
N.K. 샌다스 지음, 이현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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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공평하다.


  요즘 공평이라는 말이 사회적인 화두이다. 온갖 불공평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은 결국은 공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만큼 힘들게 노력해서 취업을 했는데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해서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절대적으로 공평한 것이 인류에게 있었는가? 그 어느 사회를 살펴보아도 모두가 공평하다고 느끼는 그런 순간들은 없었다. 그만큼 공평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장 공평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죽음이다. 모든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는 것만큼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일 것이다. 죽음을 피해보기 위해서 애를 썼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모두 죽었다.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사람도 죽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리고 어떤 조건을 누리고 살던지 모두 죽는다. 다만 차이는 얼마나 부하게 빈하게, 그리고 오래 혹은 짧게 사느냐의 문제이지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다.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기회는 죽을 기회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길가메시라고 할지라도,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던, 그리고 분탕질을 하던(길가메시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를지라도 내가 보기엔 분탕질일 뿐이다.) 길가메시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공평한 기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기와 함께 세상을 눕누비던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길가메시는 자기도 언젠가는 죽게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 불사신으로 여겨지던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영생 불사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를 놓쳐버린 그는 돌아와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갔다.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이지만 호메로스나 일리아드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별칭은 붙어 있어도 가장 흥미로운 서사시라는 별명은 얻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판본이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중간 중간에 비어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언젠가 이 부분이 연구를 통해서 채워진다면 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영웅 서사시를 읽으면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호흡이 거칠어져야 하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히려 차분해진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종착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이집트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또한 재미가 있다.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 이 서사시를 읽고 깨닫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평생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어도 나는 안죽을 것처럼 살아간다. 혹은 죽더라도 아직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가는데 치중한다. 그 길이 잘못되었는지, 바른 길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불청객처럼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애쓰고 애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라는 불청객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삶을 마감한다면 그동안 애쓰고 살아왔던 것은 무엇을 위한 애씀이었던가? 그저 죽을 때 후회하고 "~할 걸"이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 허망한 삶, 후후회를 남기고 떠나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길가메시가 마지막에 깨달았던 것, 뱀에게 영생 불사의 약을 빼앗기고 깨달았던 것이 이것이 아아니겠는가? 영원히 살고 싶지만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랜 질문인만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 오늘도 이책 저책 기웃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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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 미래 ⓔ - 코딩과 소프트웨어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EBS <코딩, 소프트웨어 시대>, <링크, 소프트웨어 세상> 제작팀 / 가나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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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컴퓨터가 체스보다 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다루는 바둑에서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어 알바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이 후에 신문에서 워낙 알파고 알파고 하니까 도대체 알파고가 어디 붙어 있는 학교냐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었다.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장미빛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던 사람들은 터이네이터의 스카이넷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 자녀들에게 코딩 교육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육부에서는 초등학생들의 토딩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디고 하였다. 그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지만 머지 않아 공교육 현장에 코딩교육이 도입될 것이고 이와 더불어 코딩 사교육 시장도 커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에게 코딩이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코딩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기업에서 물건을 팔면서 그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재원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몰라도 잘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를 제작하지 않는 사람도 코딩을 잘 할 수 있고, 코딩을 전혀 몰라도 인공지능을 잘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갑자기 코딩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가? 공교육에 코딩 교육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아마도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닐까?


공교육에 수학 교육이 들어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애초에 수학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이었다. 역법을 계산하는 것도, 천체의 운행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읽고 쓰고 수를 계산하는 일이 우리 교육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수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의 이익을 위해서 수학이 우리 교육에 들어왔고,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과목들이 우리 교육 속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의 지배를 받는 것은 대학뿐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코딩 교육도 이러한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코딩 능력이 있는 노동자를 키워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EBS에서 펴낸 이 책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속에 인공지능은 이미 생활이 되었고, 이런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커퓨터와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데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과정이 지식으로 읽히면 안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성적을 가지고 우리는 줄 세우는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코딩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아이들을 줄세우는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코딩 교육을 가르칠 것이라면 그것이 지식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을 사품화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아이들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우리가 접하게될 새로운 기술들이 통제가 아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게 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기대와 걱정의 시선을 담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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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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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세계사를 배울 때 꼭 외우게 시켰던 조약 가운데 하나가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왜 베스트팔렌 조약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웠다. "베스트팔렌 조약" 독일에서 신교와 구교의 전쟁을 그치고 화해한 조약이라는 공식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역사란 것은 수학 공식이 아니다. 수학만 해도 공식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알아야 외울 수 있었던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도 그 배경과 맥락, 진행 과정과 결과를 공부해야 외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건을 성적으로 등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약 이름과 중요한 의미는 알아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모른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는 논외가 된다. 마치 삼국지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내가 삼국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삼국지로 특정하지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전부 그렇다.) 능력이 수치화한 장수들이 등장한다. 그 장수들에게 수치화된 병력을 딸려준다. 한턴이 지날 때마다 그 병력의 숫자는 줄어들지만 최후에 내가 살아남으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병력이 줄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만약 이 병력이 수치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떨까? 수치화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인 사건을 그저 몇 가지 사건을 외우는데에 그치는 것은 수치화의 위험으로 직결되는 일이다.


  30년 전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쟁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 긴 전쟁, 그리고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이 중요한 이유, 베스트팔렌 조약이라는 한 단어로 퉁치고 지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전쟁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영토가 어느 정도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 왕국이라는 강자가 다스리던 국가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던 강자이다. 에스파냐가 자신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에 끼어든 이유는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하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 5세 사후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1세가 다스리는 오스트리아계와 그의 아들 페펠리프 2세가 다스리는 에스파냐계로 분리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가진 오스트리아계와 식민지 경영을 통하여 강자가 떠오른 에스파냐계의 연합을 막을 수 있는 유럽의 국가는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정에 따라 유럽은 큰 변화를 겪는 것이 유럽의 상황이었며,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30년 전쟁 당시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이러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하는 프랑스, 이런 프랑스에 경쟁 의식을 가진 영국, 전쟁을 통하여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호시탐탐 유럽의 중심지로 넘어가려는 스웨덴. 30년 전쟁은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일어나고 커진 것이다. 


  30년 동안 전 유럽의 국가들이 끼어들어 벌인 전쟁의 주되된 무대는 독일과 보헤미야였다. 더구나 이 전쟁은 겨울의 휴전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땅이 황폐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통하여 독일과 보헤미야 국민들이 얻은 것은 없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시작한 전쟁이 정치적인 전쟁으로 변질되어 가는 동안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의 열정과 생각은 사라지고,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당시 독일과 보헤미야의 국민들의 생각이 아닐까?


  30년 전쟁이 끝나고 신성로마 제국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도 줄어들었으며,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대결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향후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니며, 독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제후들에 의하여 통치된다. 종교적인 신념에서 정치적인 신념으로, 봉건제에서 영토 국가로 유럽이 전환하는 그 시점에 30년 전쟁이 있다. 30년 전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재미는 없다. 딱히 매력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스웨덴의 왕 아돌프2세와 그의 재상 옥센셰르나 외에는 딱히 뛰어난 인물도 매력적인 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없다. 게다가 전쟁의 범위가 거의 독일과 보헤미야, 특히 독일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명도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이름도 거의 비슷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신차리고 계보도를 그려가면서 읽지 않으면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다. 본인도 스웨덴 왕이 등장하는 부분은 꽤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외에 부분은, 특히 초기 전쟁 부분은 정말 인내심을 시험당하면서 읽었다. 저자와 번역자의 내공과는 상관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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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2-0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거나 오래 걸리는 것 같네요. 사서 쟁여놓고 아직 못 읽은 책인데 흥미를 느낄 당시에 이렇게 사들인 책이 꽤 있습니다. 30년의 전쟁이면 한 세대의 기간동안의 전란이었으니 독일 땅의 근대화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겠어요. 막연히 종교전쟁으로만 배운 걸 기억합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도 전투만 없었지 지난 68년간 전쟁 중이죠, 아니 남북대결은 없었지만 남과 북에서 각각 ‘전쟁‘때문에 1950년 이후에도 죽거나 다친 사람은 계속 나왔죠. 그렇게 보면 겉과는 달리 한국인의 멘탈엔 꽤 크고 깊은 상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 털어내려면 통일과 별개로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saint236 2018-02-08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걸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 보면 지난한 일입니다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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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쟁이 김훈의 오랫만의 소설이다.

 

  아직 읽어야할 책들이 많고, 소설을 즐기는 편이 아닌지라 굳이 사지 않았던 책이다. 그런데 책을 빌려줬던 녀석이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선물해 준 책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읽었다. 김훈의 소설이 그렇듯이 읽히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른 소설보다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멈춰서는 부분이 있다. 연대기를 따라서 가는 일반적인 소설과 김훈의 소설이 다른 점이 이 부분이다. 정신차리지 않고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이 꼬여 있다. 갑자기 이 사람의 삶에서 저 사람의 삶으로 넘어가 있기도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마차세의 삶에서, 마장세의 삶으로, 마동수의 삶으로, 이도순의 삶으로, 박상희의 삶으로 넘어간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삶인데 그들의 삶이 섞여 있으니 막힐 수밖에 없다.

 

  소설의 시대배경이 그렇듯이 주인공들의 삶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다. 돈, 사랑, 직장, 자녀 등등 모든 가치관들의 이면에는 살아남는 것, 이 난리를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에 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데 같이 산다. 어떤 사람은 군수물자를 삥땅치고,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돈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그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국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얼마의 돈을 보내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동생에게 떠넘긴 미안함을 달랜다. 물론 그에게 미안함이라는 말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각자가 여러가지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모질게 연명해온 목숨이 끊어지기도 하고, 쓸쓸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잘나간던 사업도 어느날 파산하고, 함께 살던 부인도 부하 직원과 떠난다. 형과 동업하던 마차세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택배 배달기사로 서울 남부 순환 도로에서 동부 순환 도로로, 외고가 순환 도로에서 내부 순환 도로로 하루종일 달린다. 꿈도 젊음도 사라지고, 소시민의 모습만 남아 있다. 김훈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그렇게 아등바등했는데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막막한 세상 속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하나 없이 부평초처럼 떠돈다. 박상희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도 편지를 보냈던가? 그 편지를 과연 장세의 부인은 받았을까? 받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며, 받았더라도 읽을 수는 있었을까?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들의 젊음을 소비했는가? 인생이 무상하다.

 

  다만 이 책에서 발견한 한 가지 희망은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고,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박상희가 옷가게를 차렸다. 누니가 혼자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그나마 마차세의 삶이 다행이다 싶은 것은 모두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상희와 누니라는 몸을 기댈 수 있는 작은 거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책이 몇 페이지가 더 연장된다면 어떤 모습들이 그려질까? 상희의 옷가게는 마트에 쫓겨서 매출이 급감하여 폐업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고, 누니는 세상에 귀신은 없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때닫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차세는 취업통보를 기다리면서 결코 임시직일 수 없는 임시직을 계속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 너무 멀리 나갔는지도 모르겟다. 그렇지만 자기 주인공들의 삶을 그리면서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뿌듯해야 하는데 허허롭다. 마치 내가 공터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또한 글쟁이 김훈의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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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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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소설이다.

  

  중국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썰을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루쉰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의 소설 아Q정전은 당연히 따라나오는 것이니 유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보면 이 책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소설이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제목은 알고, 내용도 아는데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한 것들! 이것이 고전이 아니겠는가? 나에게도 이 소설은 고전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고, 아Q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쉰 단편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아Q정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광인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흥미가 생겼고, 생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선물로 사주었던 책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이제야 리뷰를 하게 되니,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하는 일이라고 해도 내 게으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Q정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광인일기와 아Q정전이다. 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근대를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광인일기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피해망상증에 걸린 친구의 일기를 입수하여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면서 서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물론 광인의 일기는 루신의 생각이겠지만. 광인은 지금까지 지탱된 사회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 사회라는 것은 중국의 유교 체제와 왕조라는 통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이런 시스템을 통하여 백성들을 쥐어짜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지식인 내지는는, 권력층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통찰이기에 나는 광인일기가 근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 체제 속에서 본인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도 사람을 잡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는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 식견과 교육을 가능하게 한 것이 본인들이 비판했던 사회 체제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당시 중국 지식이의 절망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 아Q정전은 당시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Q는 원래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얻어터지고, 저기서 얻어터지고는 강자 앞에서는 정신승리를 외치는 사람이다. 실제적으로는 얻어터지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내가 이겼다는 자기 만족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자기 만족이라는 것도 얼마나 기만적인가? 자기보다 약하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샌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니 말이다. 이러한 아Q가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 뚜렷한 이념도 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 마치 아Q는 가만히 있는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결국 아무 생각이 없던 아Q는 혁명이다, 반혁명이다라면서 자기도 의도하지 않게 정치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죽어도 마땅한 사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광인과 아Q 모두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시대에서 새롭게 사람을 잡아먹는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도태되었다. 중국만 그런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루신의 이 소설이, 단편 길어야 중편인 이 소설이  왜 중국의 근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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