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만남은 서로를 감싸주는 것이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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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만나서 삶을 꾸리는 것은 결국 서로를 감싸준다는 것과 같다. 그것을 연민이라고 불러도 좋다. 사랑으로도 감싸고 증오로도 감싼다. 죽음을 앞둔 그를 병간호로도 지켜주고, 헤어진 그녀가 헐벗으면 따뜻한 말과 지갑으로도 감싼다. 이혼, 재혼은 그저 불꽃놀이 같은 프로세스일 뿐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조차 감쌈을 위한 작은 매개물일지도 모른다.
현대 히브리어 문학의 대표작가로 일컬어지는 아모스 오즈(Amos Oz·65·사진)는 이 소설에서 1970년대 후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쌍의 이혼 남녀를 등장시켜 그 얘기를 하고 싶다.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닌 이 소설은 단 한 줄도 예외없이 등장인물들끼리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밟아나가고 있다. 이혼한 지 7년 만에 한 여인이 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첫 대목이다.
이혼한 아내 일라나는 이미 미셸이라는 남자와 재혼한 상태다. 둘 사이에는 이파트라는 딸까지 태어났다. 그런데 그녀가 전 남편 알렉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녀의 아들이자 전 남편의 아들이기도 한 열여섯 살 보아즈가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기 때문에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다.
전 남편 알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가 돼 있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군인 출신인 알렉은 게다가 200만달러 상당의 상속 재산을 가진 부자다. 알렉은 일라나가 자신의 친구들, 군대 상사들, 제자들, 전기 기사나 배관공과 함께 창녀처럼 몸을 굴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이혼했다. 당연히 알렉은 보아즈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라나가 이혼한 지 1년 만에 재혼한 남자 미셸은 원리주의적 시오니즘에 충실한 고등학교 불어교사다. 미셸은 ‘여섯 식구가 한 칸 반짜리 방에 살았기 때문에 모두 잠들고 나면 불을 켜고 숙제할 수 있는 곳이 화장실뿐’이었을 만큼 가난했다. 키도 작다. 미셸은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에게도 따뜻하지만 이스라엘 땅을 복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광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보아즈 문제를 상의하려고 보낸 일라나의 편지가 발단이 돼서 일라나, 알렉, 미셸 세 사람이 주고받게 되는 수십 통의 편지가 주축이 되고 있다. 알렉의 재산관리 변호사인 만프레트, 세 사람의 일에 끼어들게 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보아즈가 주고받는 편지들까지 합해져 복잡하게 교직돼 있다. 9개월 동안 진행된 이 편지들은 매우 이스라엘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헤어진 부부 사이의 온갖 애증과 독설과 조롱, 그리고 성서와 유대인의 관습을 배경으로 하는 수준 높은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소설 제목을 ‘블랙박스’라고 붙인 이유는 알렉과 일라나가 자신들의 결혼 파탄을 비행기 추락에 비유하고,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한 편지 대화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행기가 추락한 뒤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블랙박스의 내용을 분석했소.’(알렉의 편지 중) ‘네온등 아래에서 당신이 쓴 편지처럼…우리는 삶의 블랙박스를 함께 분석했어요. 하지만 우린 아무것도 해독하지 못했어요, 알렉. 독화살만 주고받았지요.’(일라나의 편지 중)
그러나 신장암에 걸린 알렉은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보아즈 그리고 일라나·미셸 부부에게 자신의 재산을 조금씩 옮겨가게 하도록 일을 꾸민다. 이것을 알아차린 변호사 만프레트는 이를 방해하려 한다.
여러 편지들이 오가면서 일라나의 고백을 통해 블랙박스의 비밀도 조금씩 드러난다. 첫 아들 보아즈가 두 살이 되어갈 무렵, 알렉은 일라나에게 전에 만났던 남자들을 털어놓으라는 장난스러운 요구를 하다가, 그들에게 1등부터 10등까지 ‘흥분의 등급’을 매겨보라고 한다. 그러다 그들은 침대에 제3의 남자를 출연시키는 환상 게임을 벌였고, 알렉이 자신과 그 남자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두 사람은 미칠 듯한 흥분에 빠진다. 그러던 중 알렉은 욕실 의자에서 다른 남자의 라이터를 발견하게 되고 그날부터 일라나를 주먹으로 때리는 일이 잦아진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가물거리는 도깨비불처럼 명멸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독한 증오에 몸을 맡긴 당신이 있어요. 내가 나 자신과 당신을 증오하게 되고….’(234·235쪽)
사납고 냉담한 알렉, 상냥하고 겸손한 미셸, 그 둘을 다 갖고 싶은 일라나의 솔직한 애정과 정열이 사뭇 영화적이다. 비종교인으로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알렉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광신적 애국주의를 대표하는 미셸을 견주어 보는 독서법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