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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8-0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가슴을 울리는 말들... 퍼갑니다.
 

"예배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을 향한 교인들의 마음과 기원을 하나님에게 중제"하기 때문에 두 편의 관중을 갖고 있다. 연극은 배우와 관중들이 이뤄나가는 예술이지만 예배극은 배우와 관중들로서만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臨在)해야만 공연될 수 있다. 때문에 예배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관중들만 의식하고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神)까지도 의식하고 연기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연극 무대구분에 의한 행동선(行動線)은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를 보면 연기자들이 신과 인간을 동시에 관중으로 생각하고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단과 설교대는 교회력에 의해 꾸며진다. 제단에 촛불이 켜지고 오르간 전주곡이 끝나면 요나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교회당 뒤에서 교인석 사이를 통과하여 제단 앞에 선다. 그들은 제단을 향하여 절을 한다. 그리고 제단 위로 올라가고 선원들은 십자가와 같은 마스트를 들고 있다.- Olov Hatman

재단을 향하여 절을 하고 시작한다고, 무대지시문에서 밝힌 것은, 하르트만은 예배극이 신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관중이 지켜보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되어야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서구 근대극에서 등을 보일 수도 있다. 제단이나 설교대는 관중들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연기자들이 이 제단을 향하여 말해야 할 때는 교인들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인용구)라고 말한다.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햗ㅇ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예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예배극은 각 교파와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 다양한 형식 속에서 그것이 연극인 동시에 예배라고 하는 가장 숭고한 매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준비되어야 하고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의식 속에서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된다.

일반 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출 수법이나 연기력을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예배극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예배극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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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8-02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아무리 재미로 읽는다지만..
하여튼 A형의 경우는 거의가 비슷한 내용이에요..마음의 벽이라...-.-a

stella.K 2004-08-0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A형이구나...!

tnr830 2004-08-0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데 없는 고집 ..많이 찔리는데요^^;;;;
저 이거 퍼갈께요^^

stella.K 2004-08-0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기분이 들쑥날쑥 해 잘 토라진답니다. 내가 그랬나? 긁적 긁적

물만두 2004-08-0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A형입니다. 퍼갑니다...

조선인 2004-08-0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형의 쓸데없는 고집... 저도 많이 찔리네요. ^^;;

水巖 2004-08-03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심한 배려, 최선, 그리고는 마음의 벽 !

stella.K 2004-08-0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반갑습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고. 영광이예요.^^

▶◀소굼 2004-08-03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O형인데..B형스럽다고들 하죠-_-;

stella.K 2004-08-0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어요. 소굼님!^^

박예진 2004-08-0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stella.K 2004-08-04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예진양! 반가워요. 알리딘에서 예진양 모르면 간첩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저 간첩 아니니까 또 놀러와요.^^
 

[조선일보 2004-08-01 17:39]

“지구의 아름다움보다 상처를 생각했으면”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 서울 강남 개발의 상징인 코엑스 앞 광장에서 ‘무차별 개발에 대해 반성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하늘에서 본 지구’(9월27일까지)에는 헬기를 타고 세계 곳곳의 풍경을 기록하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얀 아르튀스-베르트랑씨의 작품 120점이 등장한다.


세계 150개국에서 찍은 사진을 가로 180㎝·세로120㎝ 크기의 판넬에 선보인다. 야외에서 24시간 무료로 열리는 전시는 밤에 가보면 더욱 근사하다. 캐나다의 얼음 벌판, 몰디브의 산호섬, 케냐의 홍학 떼 등 절경을 담은 사진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지구의 신비 못지않게 상처도 생생하다. 작가는 모로코의 어항 사진을 통해 어자원 감소를, 아르헨티나 발데스 반도 근해에서 찍은 고래 사진을 통해 동물의 멸종위기를 이야기 한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빈민촌, 마다가스카르의 메뚜기 떼, 텅빈 유령도시 체르노빌, 멕시코시티의 쓰레기장 등은 인간이 자초한 재앙을 경고한다.


“사진보다 사진 설명이 더 중요합니다.” 작가는 “사진 설명을 작성하는 팀이 따로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다” “전 세계 인구 19%가 사는 유럽과 일본, 북아메리카에서 모든 종이와 판지 제품의 63%를 소비한다” “지난 20세기 지구 인구는 3배 증가한 반면, 전 세계 물 소비량은 6배 증가했다” 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설명이 붙어있다.

“아름다운 사진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사진을 찍고 있다”는 그는 케냐에서 사자를 촬영하기 위해 열기구를 타고 올라갔다가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다른지”를 경험한 뒤 지난 10년간 줄곧 항공 촬영에 매달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지난 2월 18~19일 서울 위를 날며 촬영한 사진 8점도 나온다. “먼지와 안개 때문에 촬영이 힘들었다”는 작가는 “서울에서는 장관을 건지기 어려웠다”고도 덧붙였다.

(정재연기자 whaude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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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만남은 서로를 감싸주는 것이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남녀가 만나서 삶을 꾸리는 것은 결국 서로를 감싸준다는 것과 같다. 그것을 연민이라고 불러도 좋다. 사랑으로도 감싸고 증오로도 감싼다. 죽음을 앞둔 그를 병간호로도 지켜주고, 헤어진 그녀가 헐벗으면 따뜻한 말과 지갑으로도 감싼다. 이혼, 재혼은 그저 불꽃놀이 같은 프로세스일 뿐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조차 감쌈을 위한 작은 매개물일지도 모른다.

현대 히브리어 문학의 대표작가로 일컬어지는 아모스 오즈(Amos Oz·65·사진)는 이 소설에서 1970년대 후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 쌍의 이혼 남녀를 등장시켜 그 얘기를 하고 싶다.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닌 이 소설은 단 한 줄도 예외없이 등장인물들끼리 주고받는 편지 형식을 밟아나가고 있다. 이혼한 지 7년 만에 한 여인이 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가 첫 대목이다.

이혼한 아내 일라나는 이미 미셸이라는 남자와 재혼한 상태다. 둘 사이에는 이파트라는 딸까지 태어났다. 그런데 그녀가 전 남편 알렉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녀의 아들이자 전 남편의 아들이기도 한 열여섯 살 보아즈가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기 때문에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다.

전 남편 알렉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가 돼 있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군인 출신인 알렉은 게다가 200만달러 상당의 상속 재산을 가진 부자다. 알렉은 일라나가 자신의 친구들, 군대 상사들, 제자들, 전기 기사나 배관공과 함께 창녀처럼 몸을 굴렸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이혼했다. 당연히 알렉은 보아즈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라나가 이혼한 지 1년 만에 재혼한 남자 미셸은 원리주의적 시오니즘에 충실한 고등학교 불어교사다. 미셸은 ‘여섯 식구가 한 칸 반짜리 방에 살았기 때문에 모두 잠들고 나면 불을 켜고 숙제할 수 있는 곳이 화장실뿐’이었을 만큼 가난했다. 키도 작다. 미셸은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에게도 따뜻하지만 이스라엘 땅을 복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광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보아즈 문제를 상의하려고 보낸 일라나의 편지가 발단이 돼서 일라나, 알렉, 미셸 세 사람이 주고받게 되는 수십 통의 편지가 주축이 되고 있다. 알렉의 재산관리 변호사인 만프레트, 세 사람의 일에 끼어들게 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는 보아즈가 주고받는 편지들까지 합해져 복잡하게 교직돼 있다. 9개월 동안 진행된 이 편지들은 매우 이스라엘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헤어진 부부 사이의 온갖 애증과 독설과 조롱, 그리고 성서와 유대인의 관습을 배경으로 하는 수준 높은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소설 제목을 ‘블랙박스’라고 붙인 이유는 알렉과 일라나가 자신들의 결혼 파탄을 비행기 추락에 비유하고,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한 편지 대화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행기가 추락한 뒤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블랙박스의 내용을 분석했소.’(알렉의 편지 중) ‘네온등 아래에서 당신이 쓴 편지처럼…우리는 삶의 블랙박스를 함께 분석했어요. 하지만 우린 아무것도 해독하지 못했어요, 알렉. 독화살만 주고받았지요.’(일라나의 편지 중)

그러나 신장암에 걸린 알렉은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보아즈 그리고 일라나·미셸 부부에게 자신의 재산을 조금씩 옮겨가게 하도록 일을 꾸민다. 이것을 알아차린 변호사 만프레트는 이를 방해하려 한다.

여러 편지들이 오가면서 일라나의 고백을 통해 블랙박스의 비밀도 조금씩 드러난다. 첫 아들 보아즈가 두 살이 되어갈 무렵, 알렉은 일라나에게 전에 만났던 남자들을 털어놓으라는 장난스러운 요구를 하다가, 그들에게 1등부터 10등까지 ‘흥분의 등급’을 매겨보라고 한다. 그러다 그들은 침대에 제3의 남자를 출연시키는 환상 게임을 벌였고, 알렉이 자신과 그 남자 역할을 모두 연기한다. 두 사람은 미칠 듯한 흥분에 빠진다. 그러던 중 알렉은 욕실 의자에서 다른 남자의 라이터를 발견하게 되고 그날부터 일라나를 주먹으로 때리는 일이 잦아진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가물거리는 도깨비불처럼 명멸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독한 증오에 몸을 맡긴 당신이 있어요. 내가 나 자신과 당신을 증오하게 되고….’(234·235쪽)

사납고 냉담한 알렉, 상냥하고 겸손한 미셸, 그 둘을 다 갖고 싶은 일라나의 솔직한 애정과 정열이 사뭇 영화적이다. 비종교인으로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알렉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광신적 애국주의를 대표하는 미셸을 견주어 보는 독서법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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