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을 향한 교인들의 마음과 기원을 하나님에게 중제"하기 때문에 두 편의 관중을 갖고 있다. 연극은 배우와 관중들이 이뤄나가는 예술이지만 예배극은 배우와 관중들로서만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임재(臨在)해야만 공연될 수 있다. 때문에 예배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관중들만 의식하고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神)까지도 의식하고 연기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연극 무대구분에 의한 행동선(行動線)은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르트만의 예배극 <예언자와 목수>를 보면 연기자들이 신과 인간을 동시에 관중으로 생각하고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단과 설교대는 교회력에 의해 꾸며진다. 제단에 촛불이 켜지고 오르간 전주곡이 끝나면 요나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교회당 뒤에서 교인석 사이를 통과하여 제단 앞에 선다. 그들은 제단을 향하여 절을 한다. 그리고 제단 위로 올라가고 선원들은 십자가와 같은 마스트를 들고 있다.- Olov Hatman

재단을 향하여 절을 하고 시작한다고, 무대지시문에서 밝힌 것은, 하르트만은 예배극이 신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관중이 지켜보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되어야 것을 증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서구 근대극에서 등을 보일 수도 있다. 제단이나 설교대는 관중들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연기자들이 이 제단을 향하여 말해야 할 때는 교인들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40일 동안 심판이 오리라고 외쳤다. 그러나 니느웨에 심판이 오지 않았다. 그때 요나는 "어부가 바구니에 고기를 집어넣듯, 당신은 나를 구렁텅이에 넣었소. 그리고 죽음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모래 사장에 상륙시켰고 그래, 나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심판의 날을 예언하였소. 이젠 이런 기도밖에 남지 않았소. 나를 와서 데려가시오. 사람들이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뱉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침 뱉은 거나 마찬가지지 않아요?(니느웨 사람들 제단 위로 올라온다.) 빨리요, 주님. 그들이 오고 있어요.(요나, 관중들에게 돌아선다.) 당신 지팡이와 돌멩이가 이디 있어?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비웃어 줘."(인용구)라고 말한다.

요나는 신을 상대로 말을 할 때는 제단을 햗ㅇ하여 대사를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의 예배의식을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가 없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나라의 풍습과 지역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예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배극도 한 가지  형태로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신을 관중으로 극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전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예배극은 각 교파와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 다양한 형식 속에서 그것이 연극인 동시에 예배라고 하는 가장 숭고한 매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준비되어야 하고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의식 속에서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된다.

일반 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출 수법이나 연기력을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예배극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예배극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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