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조교와 함께 연구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조금 남루한 차림새의 여자가 들어오더니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에는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최근에 일자리를 잃었고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너무 어려워…’ 등등이 적혀 있었다. 만원짜리 하나를 꺼내 주니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여자가 나가자 마자 조교가 말했다. “선생님, 저 사람 청각장애인 아니에요. 사칭하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알아?” “요새 저런 사람이 많아서 일부러 열쇠를 떨어뜨려 봤더니 눈동자가 잠깐 제 쪽으로 움직였어요. 선생님도 참, 헛똑똑이시네.”

‘셜록 홈즈가 따로 없네.’ 나는 조교의 명민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탐정 셜록 홈즈―어렸을 때 한 두 번쯤 그 가공할 만한 추리력에 감탄해 탐정이 되는 것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베이커가(街) 221B 번지, 깡마른 체격, 승마 모자, 파이프 등, 친구이자 조수격인 왓슨 박사 등, 아직도 생각나는 홈즈 관련 사항들이다.

셜록 홈즈는 안과의사였던 아서 코난 도일(1859~1930)이 개업을 해도 환자가 없어서 호구지책으로 일련의 추리소설을 쓰면서 창조해낸 가상인물이다. ‘빨간머리 연맹’ ‘바스카빌가의 개’ ‘여섯 개의 나폴레옹상’ 등 지금은 추리소설의 고전들이 된 작품들을 쓰면서 코난 도일은 탐정소설을 단순히 범죄소설에서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당시 홈즈의 인기는 대단해서 1893년 ‘마지막 사건’에서 홈즈가 숙적 모리아티 교수와 대결하다가 폭포에 떨어져 죽자 독자들은 출판사에 항의전화는 물론, 홈즈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후에 독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셜록 홈즈의 귀환’(1905)에서 부활시켰다).

홈즈는 코난 도일이 공부했던 에든버러 의과대학의 외과 담당 교수 조셉 벨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는 환자가 진찰실에 들어오면 환자가 말하기도 전에 무슨 병이라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증상에서 지금까지의 생활태도까지도 학생들 앞에서 맞혀 보이곤 했다. 벨 교수는 환자가 들어오면 추상적 이론이나 현학적 지식을 사용하지 말고 ‘눈과 귀와 손과 머리를 직접 써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는 그대로 홈즈의 수사원칙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홈즈의 기발한 사건 해결력은 기록자인 왓슨 박사 때문에 더욱 빛난다. 성실하고 사람 좋지만 ‘박사’라는 칭호가 민망할 정도로 늘 어줍잖은 추리력으로 홈즈를 흉내내다가 홈즈의 ‘똑똑함’에 밀리고 마는 왓슨은 간혹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영국과학발전협회’는 인터넷 투표로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유머로 다음 이야기를 뽑았다.

명탐정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이 캠핑 여행을 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함께 누워 잠을 잤다. 얼마 후 홈즈가 갑자기 왓슨 박사를 깨웠다. “왓슨, 하늘을 보고 뭘 알 수 있는지 말해 주게.” 왓슨은 잠깐 생각하더니 “수백만 개의 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천문학적으로 은하계가 수백만 개 있으며 항성이 수십억이 있다는 것, 측시학적으로는 시간이 새벽 3시쯤 되었다는 것, 신학적으로 신은 전능하고 인간은 미미한 존재라는 것, 기후학적으로는 내일 날씨가 청명하리라는 것…. 자네는 무슨 사실을 알 수 있는가?” 한동안 말이 없던 홈즈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누군가 우리 텐트를 훔쳐갔다는 걸 알 수 있네….”

‘춤추는 인형’에서 홈즈는 난해한 그림의 암호를 풀고 나서 “사람이 발명한 것은 사람이 풀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살면 살수록 사람이 발명한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는 경우를 허다하게 본다. 또 하나 그런 케이스를 나는 만원 과외료를 내고 배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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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7-1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셜록 홈즈를 정말 좋아하는데... 좋은 글 고맙습니다.. 퍼갈게요..

아영엄마 2004-07-1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홈즈는 정말 현실적이군요! ㅋㅋㅋ 하늘이 보이는 것은 텐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라니.. ^^;;

stella.K 2004-07-1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입니다.^^
 
 전출처 : mannerist > [조광화 희곡집] 悲劇精神의 復活(下)

 21/  96. 11. 11.

연극을 통해 관객과 대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극에서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은 관객과의 교감이다.


작가들은 보통 세상에 할 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이고 강력한 현상은 정서의 나눔이다. 생각은 정서의 교감이 발생한 후에야 정리된다.


지식인 시대의 작가들은 일종의 사상가들이었고, 작품을 통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일반론이었다. 주제라는 것도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되는 문장들이었다. 정서는 그 주제나 생각을 다루는 데서 파생되는 부수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관객을 실지로 압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무엇으로 환기되는 정서인 것이다. 정서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공연장에서 커뮤니케이션 통로는 정서다. 그리고 나의 정서의 핵은 열정과 열정의 상실이다. 나의 주제는 열정 자체와, 그 열정을 상실함으로 일어 나는 복잡한 심경이다.




22/ 96. 11. 12.

생의 열정과 강력함을 억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덕과 정의의 기만성이다. 이른바 합리적 사고라 하는 진리들의 폐단. 그것들은 연극에 치명적이다.


도덕과 정의를 폐기하면 이 사회의 혼란을 무엇으로 막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될수록 혼란은 더욱 늘어만 왔었다. 마치, 법조문이 하나 늘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가듯이. 상식과 금기와 권위의 부정어법은 개인에게 니힐리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회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력을 희생하였다. 이제는 생이 보상받아야 한다.


니체에 의지하여, 니힐리즘을 이기는 길은 권력(강함)에의 의지다. 역시 니체에 의지하여,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진리로 망가뜨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 기만의 세상을 희생시키는 길은, 최소한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강력한 제어 수단은, 활동적 생명의 힘이다.


연극은 위기라는 절망감의 유행. 무엇보다 연극에서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표출하는 강력한 생의 힘으로 관객들을 충격시켜 그들의 억눌린 생명을 해방시킨다. 그것이 연극의 효용이다.




23/

웃음의 유행.


이제 무거움의 연극은, 비극은 외면당하는가? 외면당하는 것은 칙칙한, 기운 빠지는, 죽은, 관념의, 껍데기 등등의 연극이다. 무거움의 묘사가, 추함의 묘사가 강력하다면 외면당할 이유가 없다. 생명의 힘을 가진 비극은 여전히 관객을 사로 잡을 것이다.




24/ 96. 11. 15.

다가오는 가상의 세계. 그럴수록 절실한 생체의 역동성.




25/ 96. 11. 18.

내가 신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곳에 정열에 가득 찬 원형적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26/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비극은 생명으로 가득 찬 정열의 불러 일으킨다.


비극의 마력은 그곳에 숭고한 정열이 꿈틀 댐으로써 가능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무엇으로 가치있는가? 그곳에는 일찍이 보기 힘들던, 이후에는 더욱 사라져 간, 정열적 인간들만이 가득하다.


반면에 희극은 약함을 숨기고 위선과 기만에 찬 정열들을 비웃는 것이다.




27/

비극의 부활. 즉, 비극정신의 부활.


전형적 허리우드 영화에서 보듯이, 스펙터클로 위장된, 요란한 갑옷으로 위장시킨 가짜 영웅들은 정열을 타락시켰다. 진정한 비극은 인간의지의 숭고함, 섬세함, 강력함으로 우뚝 선 정열적 인간의 등장으로 부활할 것이다.




28/

정열이란 의지가 농염해져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발산된 것이다.




29/

정렬의 효용.


진정한 정열의 인간은 만인에게 잠자던 정열을 촉발시킨다. 마치 태양이 만물을 자극시켜 생명을 일으키듯이. 그리하여 만인은 그 정열로 인해 생의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비극은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정열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비극의 정열은 병든 의지를 회복시킨다.




30/

정열이 갖춰야 할 덕목. 균형과 자제.


이상적인 정열은 만인에 폭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타 정열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정열적일 그때에야 위대하다. 그러니, 니체의 초인은 일면 뻔뻔스럽다.




31/

정열의 종류.


a. 생명 자체의 정열 - 스스로의 의지로 가득 찬 정열. 삶을 고양시키고 숭고해진다.


b. 파괴적 정열 - 정치적 권력 지향이 일으키는 잔인함.


c. 흡혈귀적 정열 - 옛 정열들이 이룩한 형식이나 조직에 숨어 자신의 약한 정열을 위장하는 자들. 일종의 죽은 이데올로기들. 무너진 가부장들의 생존방식. 권위적 지도자들의 위선. 말하자면 가짜 정열. 약한 정열이 택하는 비열한 실현 방법.


d. 소비적 정열 - 욕망, 충동, 감각에 자극된 격정 등. 정열을 가다듬어 숭고해지기는 커녕, 있는 정열마저 탕진하는 퇴폐.


e. 기만당한 정열 - 가짜 영웅에 자극받은 헛된 노력.


현대인의 정열은 d나 e가 대부분이다.




32/

정열을 기만하는 자본주의, 또는 상업주의의 전략.

a. 가짜영웅 - 허리우드 영화에서 미화된 폭력, 사회적 명사들, 정치권력자들, 재력가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적용되는 ‘정의’라는 외침. 정열이 타락한 결과물.


b. 정열의 탄압 - 조직과 자본을 위한 희생. 희생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도덕. 건전한 사회유지라는 명목으로 억압당하여 이윽고 왜곡되고 마는 개개의 정열들.


c. 정열의 상품화 - 가상현실. 정열은 수많은 가상 물질들에 소비된다. 결국, 재투자 없는 자원은 탕진된다. 자신의 생명감을 상실한 채 허상에 탐닉하는 퇴폐.




33/

정열을 기만하는 연출 중심의 연극.


공연성을 주장하는 당대 연출 중심의 연극들이 도달한 곳에서 정열은 기만당한다. 그들의 초라하지만 마취시키는 변명들은 웃음, 재밌음, 볼 거리, 탈언어, 무대적 역동성 등이다. 그러나 소홀히 다룬 것이 있었다. 배우의 정열이 제거된 것이다. 그 빈 자리는 기고만장한 연출자의 정열로 채워졌다. 무대는 그럴 듯한 포장들로 가득 찬다. 그럴수록 배우는 왜소해진다. 배우들은 연출가가 고안한 갖가지 아이디어, 장식들에 의지해 간신히 서있다.


자신감에 찬 연출들은, 배우의 정열을 외면하고, 자신의 위대성을 증명하기 위해 갖가지 껍데기들로 무대를 채운다. 곧 이어 연극은 쇼로 타락하였다.




34/

정열의 확인.


강한 정열은 단지 스스로를 높일 뿐이다. 약한 정열은 고난을 통해 그 반발력으로 감지된다.


35/

의지 대 폭력. 정열 대 완력. 의지는 생명 자체다. 폭력은 생명을 위협한다. 정열은 감화시킨다. 완력은 강요한다.


위선적 인간은 위장되고 미화된 폭력에 감동한다. 미화된 폭력은 사실 약한 정열의 증거다. 약한 정열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강요하고 합법화한다. 그러나 위장을 벗기면 비열한 의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정열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위선자들은 폭력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한다. 미화된 폭력에의 감동은 비굴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다. 위장 제거에 경악함은 그들의 비굴을 들켰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난다.




36/

작가는 그 모든 정열들을 관찰하여, 위장된 신화를 걷어 내서, 정열의 원형들을 정직하게 드러 낸다. 배우는 그 정열을 만끽한다. 연출은 배우를 돕는다. 그때에야 비극은 부활한다. 숭고하도록!




37/ 96. 11. 19

고전적 비극이 정열을 환기시키는 방법. 성격적 결함을 가진 영웅이 강력한 고난을 당한다. 그 힘겨운 짐을 지느라 정열이 불려나온다. 이때 고난은 측량되지 않는 정열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계측기가 된다. 즉, 고귀한 성품과 고난은 정열을 가리키는 지시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세들은 비극의 본질이 성격과 고난인 줄 알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가짜영웅이라는 괴물을 조제하였다. 이윽고 정열을 보는 감각이 무뎌져 간 관객들은 비극이 따분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비극정신의 삶의 열정 자체에 고양되는 것이다.




38/ 96. 11. 21.

연극이 실험을 거듭하여 발전할수록 기개를 잃어 간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비록 세련되었다 해도 사로 잡지 못하는 연극이 늘어 난 것 아닌가. 조급해진 연극은 기개를 대신한 마취적 감각으로 관객에 아부하는 것 아닌가.




39/ 96. 12. 11.

문학적 연극은 시대에 뒤떨어졌는가?


아니다. 단지, 껍데기의 연극이 도태할 뿐이다. 비언어적 연극들도 쇼로 타락한다면 껍데기가 된다. 문제는 생동감으로 살아 있는 공연이냐 아니냐다. 진정한 연극은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작가는 이상을 제시하고, 연출은 현실과 타협하고, 배우는 하루하루성실하게 살아 가는 생활인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연극은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작가에 충실한 작가이기 어려운 시대다. 바로 이 시점의 대학로는, 포장만 남은, 그래서 허탈한 볼거리만 가득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주제인 양 위장한, 우리들을 기만하는 연극이 주류다.


그러한 연극들은 진정한 극작가를 거부한다. 아니,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의 기만술이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한다. 수난이라니? 우리 연극의 희망에게?




40/

갓 등단한 작가들은 기만의 연극으로부터 대학로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연극은 문학이 아니다’고. 그리하여 성공하고픈 신인작가들은, 공연이 되는 텍스트를 쓰고픈 신인작가들은, 구세대 작가들의 고리타분에서 벗어 나고픈 패기 찬 작가들은, 뭔가 새로운, 뭔가 연극적인 텍스트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작가정신이 아닌 연희적 테크닉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만다. 연희적 테크닉은 작가의 진정한 몫이 아닌데도 말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부터 문학성을 포기한다면 작가는 없다. 대본작가가 있을 뿐이다.


대학로에 들어선 신진작가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과 세계관을 키울 의지를 제거당한다. 기만의 연극들은 당장 아쉬운 값싼 볼 거리 만들기를 부추긴다. 대본쟁이로의 강요. 이것이 우리 젊은 작가들의 운명이다.


아니 젊은 극작가는 없다. 사실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거나 공인받지 못한 작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만의 연극은 작가가 그의 세계를 세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설혹 그 씨앗을 품었더라도, 애써 가능성을 발견해 주고 키워 주는 일이 없다. 실망한 작가는 대본쟁이가 되거나, 대학로를 떠난다.




41/

그러나, 작가들이여, 오만해지라. 연극적 氣의 바탕을 마련하는 극작가들은 그가 품은 기개와 이상만큼 오만할 필요가 있다. 힘찬 기운이 있다면, 아무리 문학적이고 말로 가득 찬 텍스트일지라도, 연극 창조자들을 자극시켜 창작욕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작가들이여, 기만의 연극을 누치 보지 말라. 눈치를 살피는 일은 연출이 할 일이다. 귿르은 극단 재정과, 관객의 기호와, 배우의 능력과, 기술적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연출의 엄살과 충고와 엄포에 귀를 닫아라. 눈치를 볼 사람은 연출이지 작가가 아니다. 우린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주장하고, 연출은 현실의 제약 때문에 눈치를 준다. 그것이 각자의 역할이다.


부디, 연극이여, 작가의 오만을 관용으로 받아 주기 바란다. 그들의 오만은 천성이다. 큰 고기라야 다양한 요리를 내놓을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보이고픈 극작가들이여, 마음껏 오만해지십시오.


42/ 98. 1. 13.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이 시대의 관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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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조광화 희곡집] 悲劇精神의 復活(上)

 

서문에 대신하여 - 悲劇精神의 復活




1/

연극창조는 나의 열정과 표현의지에 의해 행해진다.




2/

의지는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돌아 보면 쓸쓸하다. 나의 연극은 인간의 의지와 존재를 깨닫고 체험하고 싶은 수행의 과정이다.




3/

극작가들은, 연출가들은, 그리고 배우들은 시대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4/

어떤 이들은 연극을 통해 부를 얻고자 하고, 이름을 얻고자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연극 자체를 위하여 사는 자는 얼마나 있을까. 아니면 연극함으로써 존재하는 자는 있는가. 그저 그의 호흡이 연극인 자는 있는가? 연극은 연극하는 사람의 삶에 어떠한 기여를 해야 하는가?




5/

연극은 심장에서 머리로 그리고 이제는 눈으로 옮겨 갔다. 나는 머리의 연극도 감각의 연극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연극을 가슴으로 되돌리고 싶다. 그 방법론은 신화시대에 숨어 있는 원형에 대한 탐구다.


이 시대의 연극은 브레히트와 사실적 심리주의에 병들어 있다. 그들에 의해 연극을 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려 드는 관성이 생겼다.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속이 편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성으로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혹자는 감각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을 감성적 작업과 혼동한다. 감각적 연극은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정과 유리되게 만든다. 감각적 연극의 효과는 쓸쓸함의 확인이다.


원형적 연극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욕망과 열정을 드러 내고 자극하는 연극이다. 너의 열정이 시키는 대로 터뜨리라. 원형적 연극의 감상에는 논리나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뛰는 심장의 박력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그 태도가 감성적 접근이다.


6/

카리스마 CHARISMA


ㄱ.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傳導上의 기능. 불가사의한 일을 하고 병을 고치며 예언하는 능력 등을 가리키는 말.

ㄴ. 사회의 지배자나 지도자의 선성불가침한 神威的 권위.


동아출판사의 국어사전에 나오는 해석이다.


7/

카리스마는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연출의 카리스마와 배우의 카리스마는 어떻게 다른가?


연출은……. 끊임없는 정열, 스테미너, 샘솟는 창조력, 자유분방한 상상력, 강력한 추진력, 치밀한 조직력,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고 휘어 잡는 지도력…….


배우는……. 범접 못할 분위기, 영적 신비로움, 그 앞에 무너질 것 같은 기운, 보여지는 것 이상의 어떤 존재, 다의미의 표정, 단호하고 범상찮은 움직임들, 한편 지극히 평범하여 친근한 인간미 등등…….


8/

대중성과 예술성, 그 미묘한 화해.


고도의 예술적 경지를 이룩하여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하고 쉬운 이야기로 가능한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여 연극인들을 괴롭힌다.


9/

연극은 시대를 역행하는가?


이 시대는 영상과 정보의 시대다. 그리고 조직이 무너지고 있다.


전세계는 상업주의로 통일된다. 첨단의 이데올로기는 생명론적 세계관이다. 비경제적이고 소비적인 인간관계로 끈적거리는 연극단체들은 깔끔한 문화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다. 보수적이다 못해 후진의 혐의까지 받고 있다. 연극은 새로움과는 멀다. 연극이 보여 주고 말하는 것들은 거의가 구태의연하다.


유일한 희망은 생명론적 우주관이다. 연극은 가장 생명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 중심의 연극은 얼마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었던가. 기호에 가까운 연출미학의 범람은 기계적 배우들을 양산시킨다.


작가는 더 이상 미래지향의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한다. 소설의 작가는? 영화작가는? 이 시대는 무엇이건 절대적인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분위기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주장은 불온하고 위험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보통 말하는 권위의 실종이고 권위에의 거부다. 인터넷의 작가들은 표면적으로 절대적이지 않다. 사용자들의 자의적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억이 사용자라면, 인터넷은 10억을 사로잡는 이데올로기다. 컴퓨터와 영상정보는 가장 자율적임을 위장하는 가장 강력한 절대다.


연극은 무엇을 주장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위기를 맞았다. 주장하면 관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주장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흥미를 일으킬 수 없다.




10/

무거움이 모멸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남은 두 가지 무거운 주제.


1. 대중과 개인의 대립.

2. 남자와 여자의 대립.




11/

연극은, 특히 드라마는 무거움의 대표였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주류는 비극이다. 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심각한 문제들을 생각했었다.


연희적 연극들은 인생의 의미보다 볼 거리 제공이 주목적이었다. 극장주의적 연극은 좀더 발랄해지는 경향으로 간다. 그러나 가벼움의 영역은 연극 고유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들은 가벼움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한편, 심각한 연극을 거부하는 이때에, 이 시대의 마지막 무거움들을 가볍게 다뤄 낼 수 없을까? 아니 역으로 철저히 무거워 그 특이성을 무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될까?


가벼움에 대한 선호요,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려는 경향, 그러면서도 보수적인 지금의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어려운 과제다.




12/ 96. 7. 8

집단이 표출하는 에너지. 개인으로 보자면, 늑대인간처럼, 시대와 동떨어진 어느 개인이 보여 주는 경이와 충격은 집단의 경우에도 가능하다. 스즈끼는 이질적 집단과의 충돌로 인한 연극적 경험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만 얘기한다면, 늑대인간처럼, 신기함만을 쫓을 우려가 보인다. 문제는 그 집단만의 문화적 파워와 대중의 보편적 의사소통 체계와의 조화다. 그래서 스즈끼는 가부끼 집단의 기호화된 연극언어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집단은, 어떤 집단성으로, 어떤 연극언어를 만들어 낼 것인가?


13/ 96. 10. 30

신화는 일정한 문화집단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신화는 그 성운들의 무의식이 구현된 것이라기보다 성원들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키기 위한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성원들은 신화를 통해 집단의 바라는 바를 자신이 바라는 바로 믿게 된다.

나는 신화에 매혹당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원형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신화는 역사 이후의 체제유지에 필요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면, 원형은 역사 이전의, 조직 이전의 생명체로서의 개인이 갖는 동물적 욕구와 의지다. 어떤 ‘조작된 신화’는 집단의 유지를 위해 원형의 바라는 바를 왜곡 변형한다. 원형은 신화의 힘에 의해 억압당한다.


나는 그렇게 억압당하여 고통받고 있는 동물적 원형에 주목한다. 그 동물적 원형들은 때로 신화적 세계를 위협하고 파괴시킬 수도 있다. 때문에 어떠한 집단의 신화를 위협하는 동물적 충동을 되살리려 했을 때, 그 집단의 방어적인 공격은 충분히 예상된다. 나는, 이미 그 신화의 방어벽을 호되게 당하고 있다.


내 작품들에서, [꽃뱀…….], [오필리어], [여자의 적들(가마)], [남자충동], 가족의 신성함을 해치는 설정들, 특히 친족을 살인하는 설정들은 가족신화에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받은 신화를 한 꺼풀 벗겨보면, 생명력으로 가득 찬 인간의 참모습이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신화에서 출발하였지만 사실 ‘조작된 신화’와 정면으로 싸워야 할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 이 신화의 벽을 어쩔 것인가?




14/ 96. 11. 1.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식이 치밀해지고 기교가 세련되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형식과 기교를 있게 한 에너지와 정서가 가려진다.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서다. 하나는 고도로 세련된 방법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 공유되도록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늘려 간다는 것이다. 전자는 일반 대중이 향수하기에 어려워지고, 후자는 대중 취향에 아첨하게 된다. 어느 것이든 문화를 촉발시켰던 그 무엇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서구의 연극이 그러한 길을 걸어 한계에 부딪쳤다. 잘 만들어지고, 세련된 공연이지만 에너지를 상실해 간다. 연극은 더 이상 개발해 내야 할 새로운 방법이 별로 남아 있질 않아 보인다.


그럴 때에 해답의 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연극의지를 촉발시켰던 그 무엇으로. 그것은 생의 의지다. 진정한 연극의 가치는 배우가 발산하는 ‘생체 에너지’를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문화를 의심하고, 신화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순수했던 몸의 바라는 바를, 영혼의 저 깊은 속에 감금되었던 원형들에 주목할 필요가 절실하다.




15/

내 연극의 주인공들은, 이상주의의 억압 속에 사그라지는 ‘생의 의지’로 고통받은 자들이다.


역사상 존경받는 문화작가들은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들이 페시미즘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조차도. 왜? 작가들은 나름으로 이 세상을 파악하여, 희망을 보면 본 대로, 부족함을 느끼면 그것을 메꿔 줄 이상향을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란 기실 꿈꾸는 자가 아닌가.


또한 그 문화의 수요층인 독자들로서도 고단한 현실을 이겨 나가게 할 가치있는 수단은, 작품 속의 이상향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상주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문학유산은 긍정적이고 온건하고 인간의 비전을 옹호해 온 것이다. 참으로 비관주의적인 작가에서조차 이 비관적인 삶에서 탈출하고자 의자하고 지혜를 짜내는 가련한 노력들을 보아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강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할수록 독자들은 열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이상주의자가 제시한 비전은 항상 우리를 약간씩 앞질러 간다. 아, 맛볼 수 없는 이상향이여! 그들은 변명하기를, 꿈을 꾸고 있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 저 멀리 이상향을 바라보느라 여기 이곳에 있는 누추하고 추악한 실존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이상주의의 극은 페시미즘에 다름 아닌가.


꿈꾸는 일은 소중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의 달콤함에 마취되어 실존의 나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추악함 비열함을 정면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이상주의의 달콤함에 젖어 버린 이 시대도 때로 실존을 그려 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수용하는 실존이란 고작, 왜소하고 소극적인 인물들이다. 만약, 실존의 가장 강렬한 특징인 ‘생에의 의지’를 위선적 신화로 위장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 낸다면, 이상주의자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될 것이다. 순수한 생의 의지는 이상주의자들의 비전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파괴적 열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우리에게 ‘생에의 의지’가 이다지도 약화되어 가는 것을 방관한다면 삶은 얼마나 허탈한 것이 되고 말 것인가. 아무튼 지금 이 시대처럼 실존이 푸대접받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16/

꿈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보통 영웅적 인간형들이다. 온갖 역경을 뚫고 초인적 의지를 관철시킨다. 나는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한 희생들에 주목한다. 영웅 스스로의 희생이 아니라, 영웅 주변의 희생을…….


신화의 주인공들은 영웅들이다. 그들은 한 민족이나 국가를 탄생시키고 인류를 구원하기도 한다. 마땅히 존경받을 인물상들이다. 지금까지도 이야기거리의 주인공들은 거개 영웅의 변형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내세울지라도 무언가 훌륭한 면모를 통해 감동시킨다. 영웅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은 고대나 현대나 별 변화가 없다.


그러나 영웅은 극소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웅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영웅 지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짐’이라니!


‘햄릿’, 그는 가족의 불화를 가족 내에서 끝내지 못하고, 그 영웅적 성격으로, 플로니어스 일가를 몰살시킨다. 난 레어티즈와 함께 분노한다. 레어티즈가 햄릿보다 비열하고 못난 행동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아무리 웅변해도, 햄릿의 딱한 비극적 처지보다는 레어티즈의 비열한 분노에 더욱 공감한다.


보라! 영웅, 그 선한 자들의 횡포를! 나는 분노한다. 그가 아무리 긍정적 가치를 지녔더라도, 그의 힘으로 나의 가치가 위협받는다면.




17/

우리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들은 정말 타당한가. 혹시, 우리들의 생명을 죽여 가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신화처럼 자리잡은 건전한 시민의식은 우리 대다수를 위한 것인가? 혹시, 소수의 영웅이나, 그 영웅에 빌붙어 사는 무리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8/ 96. 11. 9.

정의는 없다. 권력은 있다. 정의는 권력자들의 체제 유지적 이데올로기다. 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봉사한다. 이것이 세계다.


선악은 없다. 미추는 있다. 악은 불쾌함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다. 관객들은, 미학적 묘사에 성공한다면, 무대의 인물이 아무리 악마일지라도 매료당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세계나 예술이나 그 얼마나 허위로 가득 찼는가. 온통 허영 덩어리들이다. 신화만큼이나 조작의 냄새가 농후하다. 심지어, 나 또한 세계와 예술에 많은 부분 봉사한다. 구역질이 난다.


어떻게 해야 나의 참 생명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19/

연극에서 문학성과 공연성의 싸움. 무엇이 더 연극의 본질인가 하는 논쟁이라 할 수도 있다. 텔레비전, 영화, 멀티미디어의 공격에서 살아 남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악전고투가 연극만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의 배경이다.


지금 이 시점, 그러한 노력들은 연출가 중심의 다양한 퍼포먼스적 성과물들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나친 공연성 추구는 너무나 많은 자리를 연출가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쇼가 되어 간다. 연출가들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자들이다.


연극의 본령은 인간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 깊은 곳의 열정, 생명력이 나의 관심사다. 생명이 껍데기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지쳐 쓰러진 모습도 나의 묘사 대상이다. 연극의 논쟁들은 인간을 보이기 위한 이념이요, 장치요, 기교요, 아이디어이고, 심지어 잔재주일 뿐이다.


결국, 연극의 본질에 가까운 영역은 배우다. 배우를 통해 인간의 열정을 되살려 내는 일, 그것이 연극의 본질이다. 그에 비하면 공연성도 문학성도 하위개념이다. 문학성의 지나친 사변도, 공연성의 지나친 쇼도 모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본질이 아닌 다른 무엇에 집착하면 할수록, 이미 그것은 연극 아닌 다른 어떤 장르로 향하는 것이다.


연출도 작가도, 배우를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우는 마땅히 자신의 생명을 찬양할 줄 알 만큼 정열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명이 방해받을 때 분노하거나 좌절할 줄도 아는 예민함을 지녀야 한다.




20/

生 그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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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


책상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틀리고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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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1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 갈게요~~^^*

tnr830 2004-07-16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갈께요

비연 2004-07-1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전율처럼 느껴지네요...
로빈 윌리암스가 이런 배역도 멋지게 소화해내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구요.
저도 냉큼 퍼감다~~^^
 


잘못된 상식·효용 알게하려는 내용담겨
질병의 관리 방법·치료법도 알 수 있어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doctor@chosun.com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의약품 광고는 규제가 엄격하다. 광고에 현혹돼 약을 오·남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 대중 상업광고는 철저히 금하고 있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전문의약품도 상업광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런 광고에는 약물의 효용을 한눈에 강조하려는 제약사와 광고 제작자들의 치열한 고민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거기서 질병 관리의 ‘키(Key) 메시지’도 쉽게 얻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의사·약사들이 보는 의료전문지 등에서만 이들 광고를 접할 수 있다.


▲ 1.마른 사람도 콜레스테롤치가 높을 수 있다고 강조한 고지혈증 치료제 광고.
■1 ‘외모에 속고 있다’. 제약사 화이자의 고지혈증 치료제 광고 카피다. 광고는 미모의 날씬한 여성과 비만 남성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총 콜레스테롤치는 250으로 같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날씬한 여성은 콜레스테롤치가 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광고는 이 같은 잘못된 상식을 뒤집고 있다. 체질에 따라 빼빼 마른 사람도 콜레스테롤치가 높을 수 있으며, 총 콜레스테롤치가 250 이상인 경우는 약물 치료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자신의 콜레스테롤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한편 대한순환기학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중 자신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2.9%에 불과하다.


■2
제약사 노바티스의 고혈압 약 광고에는 이종격투기를 하는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혈압을 정상으로 떨어뜨리면 과격한 운동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환자들이 적정 혈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자릿수’ 이상의 혈압치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많은 고혈압 환자들이 아직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몸에 붉은 색 혈관을 새겨 넣어 ‘고혈압 치료=심혈관 보호’라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3 밥 돌 미국 전 상원의원과 축구 황제 펠레.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발기부전 질환 대중 캠페인 광고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치료제 비아그라는 환자의 10분의 1만이 의사와 상담하고 치료법을 찾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유명인사를 등장시켜 ‘발기부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다. 이를 계기로 나이 들면 으레 오는 현상쯤으로 여겨왔던 발기부전에 대해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시켰고, 많은 환자들에게 용기를 줬다. 또한 발기부전 환자는 고혈압·심장병 등을 앓고 있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면서, ‘발기부전=심혈관질환’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4 새로이 개발되는 항암제의 특징은 암세포만 공격하는 이른바 ‘타깃’ 치료제다.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폐암 치료제 이레사 광고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도미노를 등장시켰다. 줄줄이 쓰러지는 도미노에서 중간에 한 개만 막아주면 나머지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원리를 이용, 이레사가 폐암이 자라는 과정에 꼭 필요한 특정 효소를 억제해, 전체 폐암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는 의미를 설명했다.

■5 비스테로이드성 아토피 피부염 치료제 광고는 매번 보습제를 바르는 아이를 보여주면서 이들이 약물 부작용 우려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보습제에 의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또 광고는 온 가족이 아토피 환자 아빠를 긁어주는 장면을 통해, 아토피가 성인에게도 흔한 질환임을 표현하고 있다.

■6 과민성 장증후군 치료제 젤막 TV 캠페인 광고에는 ‘변비, 복부 불쾌감/복통, 팽만감, 변비’라는 글자를 배에 써놓은 ‘배꼽 티 여성’이 등장한다. 이는 과민성 장증후군의 3대 증상으로, 특히 젊은 여성에게 이 병이 많다는 것을 표현한다. 미국에서는 이 같은 캠페인으로 이 병에 대한 인지도가 32%로 증가, 그 전에 비해 2배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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