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치 현대사/ 데니스 L 바크지음/ 서지원옮김/ 비봉출판사/ 전4권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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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이치 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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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직 외교관이 2년에 걸쳐 원고지 1만4000장 분량에 이르는 ‘도이치 현대사’를 완역한 것은 이중적 의미의 사건이다. 독일 통일 15년이 지나도록 독일의 통일과정을 상세하게 살핀 적 없는 우리의 무심함을 드러내는 사건임과 동시에 건국 56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서술한 이렇다 할 우리 현대사 하나 없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미국 후버연구소 수석연구원인 데비스 L 바크가 10년 가까운 준비작업과 연구를 통해 완성한 ‘도이치 현대사’는 통사라기보다는 풍부한 자료와 증언이 돋보이는 대하 다큐멘터리다. 전체적으로 미국적 보수주의 시각이 관통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입장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해방’ 후 90년대 초반까지 50년 독일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해낸 점이 돋보인다.
전문연구가는 아니지만 역자 서지원(徐志源·54)씨의 경력 또한 이 책을 번역하기에는 적절해 보인다. 서씨는 통독 직후인 90년 주영대사관 공보관, 92년 주베를린 총영사관 공보관, 95년 주제네바 유엔대표부 공보참사관, 96년 주뉴욕 유엔대표부 공보참사관을 지내고 99년 현직에서 물러났다.
“유럽과 미국 현지에서 당시의 역동적인 통일과정을 목격하면서 독일 통일의 정신적 뿌리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번역작업을 하면서 상당 부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0시(Stunde null)’는 독일인들이 1945년을 부르는 표현이다. 모든 게 철저하게 파괴돼 사실상 ‘최초’ 혹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막막함의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1945년 5월 “나치로부터 해방”된 독일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외국군에 의한 분할 점령과 군정, 강간과 약탈, 기아와 도덕적 파괴 등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와 동갑내기인 1918년생의 경우 전쟁이 끝났을 때 3분의 1만 살아남았다.
‘도이치 현대사’는 이처럼 남자라고는 힘 없는 어린아이와 병든 노인네밖에 없던 패전 독일을 기적적으로 회생시킨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동시에 그들의 비전에 관한 이야기다. 같은 분단국의 운명 때문인지 책을 읽어가면서 수시로 우리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만큼 유사한 부분들이 많다.
이 책의 또 하나의 강점은 독일 사회에서 제기됐던 각종 쟁점들을 저자의 시각으로 정리해 버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다. 특히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관한 한국사회의 논쟁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양국의 기초를 다진 이승만과 아데나워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1. 새나라 세우기 2. 변화와 모색 3. 아! 동방정책 4. 허상의 붕괴와 통일선택으로 구성된 독일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단연 콘라트 아데나워와 그의 정치적 후손을 자처했던 헬무트 콜이다. 나머지 수상(독일식으로는 칸츨러)들은 쉬어가는 막간에 불과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또한 과대평가를 받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하긴 우리도 아데나워는 몰라도 브란트는 잘 아는 척하는 풍토다.
그러나 “건국과 통일의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독일의 현대사를 우리와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억지인지도 모른다”는 역자의 소감이 쓰라리긴 해도 진실인지 모른다. 특히 ‘뒤집고’ ‘거꾸로 보는’ 잡서 수준의 현대사밖에 쓸 수 없는 우리네 지식인 풍토에서 보면 독일의 현대사도 부럽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 ‘도이치 현대사’를 쓸 수 있는 지적 역량은 더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