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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피트 - Happy Fee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본다고 보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영화는 또 언제 개봉했다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우선, 펭귄의 특징을 너무도 잘 살린 영화하라는 생각이든다. 동물의 특징을 잘 살려 이야기를 만드는데 탁월하기로야 디즈니를 따라갈 수 있을까?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는 쥐도 디즈니의 손을 거치면 '미키 마우스'가 되고, 오리에 기운을 불어 넣어주면 '도날드 덕'이 된다. 하지만 꼭 디즈니만 그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오래 전, 누군가는 나에게 물었다. 동물 중에 좋아하는 동물은 뭐가 있냐고? 글쎄, 개나 고양이는 기본이니 제외하고, 나는 돌고래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그 귀엽고 선한 인상인 돌고래를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하다잖는가? 하지만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역시 그건 펭귄이 될 것이다. 그 뒤뚱거리는 그 날지 않는 새를 싫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인간은 똑똑하다.(가끔 그 똑똑함이 비열한데 작용해서 기분을 상하게도 하지만) 펭귄의 이 특징을 잘 살려 이미지화 했으니 말이다. 저 새끼 펭귄의 얼굴 좀 보라. 너무 귀여워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새끼 펭귄의 움직임은 다른 어른 펭귄과는 확연히 달라 분명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실사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제작진들이 꽤 오랫동안 펭귄을 관찰한 노력의 산물은 아닐까 한다.
게다가 그 많은 펭귄들이 노래하고 춤도 추며 팝뮤지컬의 향연을 펼쳤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더구나 주인공 멈블은 탭댄스의 귀재다. 멈블이 탭댄스를 출 때마다 나는 소리도 소리지만, 하얀 눈위에 선명히 나타나는 펭귄의 발자국은 영화의 사실감을 한층 더 극대화 한다.
하지만 이야기 스토리는 영화의 특징만큼이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인공 멈블은 그렇게 탭댄스의 귀재여도 그가 사는 동네에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부터 멈블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도 늦었고, 펭귄의 세계에선 기본적으로 노래를 잘 불러야 하는데 음치다. 또한 그것이 아빠 펭귄이 멈블이 알에 있었을 때 잘 품어 줘야하는데 실수로 한번 팽개쳐지고 말았다. 아빠는 그 때문에 죄책감 속에 멈블이 그런 것이 자기 탓 같아 괴롭다. 더구나 춤을 추라고 하면 그들이 잘 추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탭댄스를 춘다. 생각 또한 다르다. 멈블은 그가 보는 세계 이상의 것을 상상하고 보려고 하는데, 군집생활을 해야하는 펭귄의 세계에서 이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은 현대의 인간 사회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우리는 남과 같지 않으면 못 참아하지 않는가? 그래도 저 펭귄 무리는 자기 몸 외엔 가진 것이 없으니 서로 서로 돕고 살지 않으면 종(種)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상황은 종(種)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훨씬 더 많다. 같지 않으면 느껴지는 박탈감, 열등감 같은 것이 바로 오는 그런 류의 것이다.
사실, 같아지면 지배층의 관리는 훨씬 편해진다. 그리고 사고는 고정이 되고 협소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는 피지배층에 관한 지배층으로만 유지되는 것마는 아니다. 좀 더 나은 독창적인 생각이 변혁을 가져오는 법이다. 하지만 그러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사회는 이러한 사람을 찾고 있다고, 그런 사람이 인재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보면 사회는 나와(또는 우리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를 싫어하거나 두려워 한다. 부모 또한, 내 자식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당하거나 고생할까봐 근심하며,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도록 종용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이민을 간 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남매를 두고 있는데, 맏이인 아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한동안 했었다. 그 아들은 보석 같은 아인데 유감스럽게도 가공된 보석이 아닌 원석 그대로의 보석이었다. 그래서, 이를테면 부모의 관점에서 뻔히 보이고 아는 것을 그 아들은 꼭 굳이 몸으로 부딪혀 보고 체험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니 이 친구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것은 그 아이가 머리가 안 좋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이 아이의 다른 점을 인정하기가 그토록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친구의 시각에선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보여졌던 것. 그러니 이 아이와 이 친구의 시각이 '이해'의 관점에 머물 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아이를 키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힘든 시간을 거너와 두 모자가 잘 지낸다.
그나마 영화에선, 엄마 펭귄과 여자 친구 글로리아가 멈블을 이해하는 쪽에 섰으니, 멈블은 전혀 외롭지마는 않다. 그리고 멈블이 사는 곳은 그래도, 키 작은 펭귄이 사는 곳은 다른 사고방식이어서 오히려 지내기는 거기가 훨씬 좋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펭귄의 주 식량인 물고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해 기성세대는 그것이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고정된 주장을 하는 반면, 멈블은 그것이 외계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멈블의 이런 주장이 단번에 받아들여지기 만무하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고자 모험을 떠난다.
남과 다르다면 그것 때문에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용기'를 가져 볼 일이다. 내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들을 증명하고자 하는 용기 말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과감히 말하라. 기존의 사고방식에 길들이려 하기보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의 사회가 더 성숙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긴요해 보인다. 사실,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는 당장의 평화는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또 어느 땐가 새로운 사고방식과 세대 가 오면 무너질 불안한 평화다.
이 영환의 또다른 특징은 사람을 직접 등장시켜, 우리 인간의 무지가 펭귄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또한 멈블의 그러한 노력이 유엔의 안전보장 이사회의 안건으로까지 채택된다는 과장되지만 귀여운 호소력까지 담고 있어 보면서도 키득키득 웃게 만든다.
이 애니메이션은 한마디로, '미운 오리 새끼'의 새로운 변형이며, 팝뮤지컬을 접목시켜 즐겁게 녹여냈지만, 한번쯤 사고를 환기시켜주는 메시지도 담고 있어 이래저래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나는 이 작품을 한 겨울이 아닌 더운 여름에 볼 수 있게 돼서 더 즐거웠다. 혹시라도 놓치고 보지 않은 분은 늦게라도 꼭 챙겨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