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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 The Scarlet Let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는, 성경의 저 유명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유혹'를 말하려 하고 있다. 즉, 인간이 얼마나 유혹을 잘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유혹에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몸소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상당히 세력된 연출력으로 러닝타임 내내 잘 보여주고 있다.
불만이라면, '유혹'하면 왜 남자 보다 여자를 더 연상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실, 앞서 말한 성경 내용에서도 보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자신과 함께한 아담에게도 준다. 다시 말하면 여자는 유혹에도 약하며 동시에 유혹을 잘 하는 캐릭터며, 남자로 대변되는 아담은 유혹에 취약한 캐릭터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여자가 없었더라면 유혹 받지 않을 거라는 배면에 깔린 의도도 있어 보인다. 그런 구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어쩌다 이 역할이 반대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럴 경우 '나쁜 남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또 요즘 얼마나 인기있는 아이콘이 되었는가? 이래저래 요즘의 이미지는 남자에게 꽤 관대해 보인다.
어쨌거나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죄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논리라면 유혹하는 쪽 보다 유혹에 넘어가는 쪽이 죄가 더 크다는 것을, 성경이나 영화나 모습은 다르지만 보여주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평생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벌을 주신 것이라면, 영화는 '조강지처를 속인 남자의 패가망신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결론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거란 '허세'가 숨어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 본 '이집트의 여인'들에서 보면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라' 유명한 대사 한마디가 나온다.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욕망, 다시 말하면 상대를 갈구하는 욕구없이 사랑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랑과 욕망은 내면에 존재하는 샴쌍둥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또 반드시 구분해야 할 알곡과 쭉정이인것마는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비로소 이 영화를 보니 그 구분이 모호하게나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기훈이, 그의 직업에서는 투철한 사명의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생활에선 올바르지 않다. 즉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그렇고 그런 남자다. 하지만 그의 삶을 또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는 아내도 사랑하지만 내연의 여자도 사랑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연의 여자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내와 내연의 여자는 여고 동창생이다.
아내를 속여가며 아내의 친구와 관계를 갖는다는 건 기훈에겐 또 얼마나 스릴있고 짜릿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자기 직업에서 승승장구하며, 주어진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만큼이나 성취욕과 자기 중요감을 갖게하는 것과 비교될만한 만족도를 선사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아내의 친구인 가희가 자신을 더 많이 원하고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람은 자신을 더 많이 갈망하는 쪽에 더 마음을 쏟는 법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아내에게 더 많은 친절과 관용을 베푸는 수 밖에 없다. 예를들면, 기훈의 아내 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에 한번 임신중절을 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수현은 이 사실을 알게된 이상 진실을 알려 줘야겠다고 마음 먹지만 그 순간 기훈은 모른척 넘어간다. 왜 그러겠는가? 자신도 결국 제 발이 저리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 도덕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사랑은 더 탐닉적이 되어가는 법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인정 받는 사랑을 하는 것 보다 더 달콤하고 짜릿할 수는 있지만, 그 욕망을 채우고 나면 더 깊은 갈증이 느껴져 끝간대없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된다. 바로 여기에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는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 사랑은 서로를 풍성히 채워주고, 서로를 성숙하게 하며, 신뢰와 안정 속에서 더 크게 자라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기훈과 가희의 사랑은 그저 육체적 욕망만을 채워주는 쓸쓸하고도 허망한 사랑일뿐이다. 서로 울며 안타까움 속에 섹스 하지만 서로를 더 가지지 못해 안타까와하고 그 끝은 항상 불안하다.
그런데 넘어지려면 거미줄에도 걸려 넘어진다, 기훈이 하필 경찰로서 그 수훈을 인정 받고 상을 받던 날, 그리고 가희의 생일이기도 한 날, 어느 한적한 교외로 나온 둘은 서로 사랑을 나누다 이들이 타고 온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사랑과 증오를 교차시키다 사랑의 종지부를 찍고 만다. 하지만 그 과정이 녹녹치가 않다. 그야말로 피가 범벅이 된 혐오스럽고도 섬짓한 것이어서 아무리 영화라지만 보고 있기가 역겨울 정도다.
또한 그것은 감독의 연출력에 또 한번 놀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떻게 자동차의 트렁크란 좁은 공간에서 그런 연출이 가능할까? 감독이 다른 앞부분에선 세련된 연출을 보여주다가 보는이로 하여금 뒤통수를 칠만한 놀라운 연출이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알다시피 고 이은주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은 작품이기도 하다.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을 때 돌연 세상을 등진 비운의 배우다.
새삼 말하기 뭐하지만, 당시 그녀의 죽음을 두고 참 말이 많았었다. 그중 하나는 과감한 노출신이 준 수치감 때문에 자살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 했다.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어느 배우건 그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가 보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아까운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훈 역을 맡은 한석규는 참 한결 같은 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형사 역에 늘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복잡하고도 묘한 카리스마를 가진 배우다. 연기 초기 순박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를 거부하고 아마도 이런 캐릭터로 자신의 캐릭터에 방점을 찍을 모양인가 보다.
즐기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늦게나마 아주 괜찮은 스릴러를 본 것 같아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