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철학자들은 젠더가 언어 자체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본다. 사람들이 이미 가진 젠더에 따른 결과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저 단어들을 통해 자기의 젠더를 반영하기만 하는 게(예를 들면,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칭하거나, 얌전하도록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다소 순화된 욕, 즉 '여성스러운'욕을 한다거나)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은 대화를 하는 방식 때문에, 대화를 통해서 받는 피드백 '때문에' 젠더를 갖게 된다. 언어는 젠더를 삶으로 가져온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이라 불리는 이론을 통해서, 젠더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말한다고 주장했다.(...)사회적인 실천을 배우고 이에 동참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과 당신의 젠더 정체성이 부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85 워드슬럿
요즘 다시 스맛폰,모니터 오래보면 눈알이 아파서 되도록 격일로 들어오고 있다. (잘 안되고 있는 거 안 비밀..) 품위 있게 '눈동자'라고 하기에는 신체의 이 부분에 대한 애틋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노안이 오는 건가? 나는 치과만큼 안과 가는 걸 싫어하는 데다 지금 가면 뭔가 안 좋다는 말을 들을까 봐 이것저것 눈에 좋은 것들로 불안을 잠재우는 중이다. -당근도 거의 매일 먹는 중, 블루베리도 좋다고..-이렇게 해 보고도 낫질 않으면 그땐 병원 가야지. 굉장히 눈이 이뻤던 내 담당 의사가 병원을 그만 둔 것도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마주 앉아 있으면 두근두근 좋았는데...쩝...그가 늘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반전일 수도있지만...나는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외모는 다른 장점으로 콩깍지가 잘 씌어지는 부분이라고 믿는 편이고 오히려 잘 생긴 것 자체만으로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내 이상형 중에는 배우 '구교환'이 있다. 게다가 요즘 신장식 변호사가 좋아져서 셔츠 단추만 풀어도 섹시해 보임...결국 이것은 그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인 '언어', 몸의 언어인 '퍼포먼스'를 나는 애정하고 있다는 생각.
이런 쓸데없이 잘 나온 배우같은 이미지보단
'초현실 남친짤'로 사랑받는 (아마도?) 그...
다행히 종이책을 읽을 땐 눈이 편안하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요즘 이 책을 읽으며 언어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 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고 했다. 여기에는 보다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단순히 말은 하고 싶은데 언어화할 수 없어 침묵하는 거라면 표현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감정 언어도 구체적으로 설명할수록 정신 건강에 좋다는 걸 보면 언어와 의식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김누리 교수는 한국은 100년 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와 군부 독재시대를 거쳐 이제 자본의 보이지 않는 억압 아래 '반교육'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유럽은 개인의 생각을 끌어내는 비판적 지성을 키우고 있지만 한국은 비판 의식을 억누르고 자본주의의 도구를 찍어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착취할 필요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세대. 사유할 필요가 없는 자본의 도구들. '개성'을 용납지 않는 세계에서 강자 동일시와 죄의식 강화는 극우가 활개를 칠 적절한 토양이 된다. 당연히 자살,살인이 늘어난다. 대한민국은 이제 가장 보수적인 사회가 되었다. 유일하게 기계가 대학 시험을 채점하는 나라. 오징어 게임이 현실인 이 나라에서는 "~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이건 뭐냐"라고 보다 수준 낮은 차원을 질문한다.
이런 사회에서 젠더 편향은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다. 젠더 중립적인 노력들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는 젊은 보수들이 영향력을 갖는 현실이다.
"우리가 존재를 죽어라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를 상대로 잔학 행위를 범하게 된다" -웨인 퀘스텐바움'하포 마르크스의 해부 -에세이즘p.14
에세이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시험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을 측정하는 글이다. 글 자체의 힘, 글을 쓰는 저자의 힘을 재는 글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재는 글이다. 에세이 쓰기essaying는 가늠하기essaying이다. (역사적으로 에세이는 휘둘러 보기, 미리 가보기, 본보기를 뜻하기도 했고, 사슴의 가슴 또는 가슴살을 뜻하기도 했다.) p.23
그런 맥락에서 '백래시' 3부 반동의 기원에 서술된 뉴라이트 여성들의 모순은 일부 납득이 가능하다. 그들은 드러난 현실-주장 하는 내용과 반대되는 그들 자신의 행동-보다는 제도화된 문구. 즉 언어적 현실에 초점을 맞췄다.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 그게 일이 돌아가게 만든 다는 걸 아니까. '힘'이 거기서 비롯된다는 걸 아니까. 문제는 단지 껍대기에 치중했다는 것. '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뉴라이트 남성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만다.
뉴라이트 여성들은 여성운동의 메시지를 내면화하고 자기 결정과 평등, 선택의 자유라는 여성운동의 교의를 자신의 사적인 행동에 말없이 녹여 내면서도 반페미니즘 관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 미국을 걱정하는여성모임의 활동가들은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 나가 보고를 하고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론 보도 자료를 배포하면서도 절대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이들은 개인적인 자유와 성 정치에 대한 공적인 입장을 분리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개탄하면서도 사적으로는 페미니즘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던 건 다른 모든 여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저지하는 일에 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397
'행위 뒤에 행위자 없다'고 했던 정희진 쌤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