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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영릉 님께, 

첫 출산 2019년 4월. 태어난 아기의 생일이 돌아오기 전인 2020년 2월, 그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니, 얼마나 치열하게 "낮엔 육아, 낮밤 수유, 짬짬이 글쓰기"를 하였을까요? [굴욕 없는 출산] 본문에서 두어 차례 소명의식을 언급했죠? '아름다운,' '숭고한' 등의 형용사로 치장한 홍보성 이미지가 아닌, 임신과 출산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리라는 소명감이 없었던들, 산후 우울증을 이겨내며 책을 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굴욕 없는 출산]을 지난 한달 간 세 번 읽었습니다.  [굴욕 없는 출산] 어느 페이지를 펴도, 제 등을 콕콕 찍어 떠미는 문장들이 있었어요. 제 평소 생각과 손뼉 치기 좋은 문장들도 마찬가지로 많았고요. 목영릉 님은 출산이 ", , 에로스, 가족, 결혼 근대, 젠더, 계급, 자원 등을 모두 건드리는 복합적 이슈" (158)이기에 "사회정찰대" 삼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재생산 연구자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지요. 다만, 차별점이 있다면 목영릉 님은 본인의 출산 경험을 책 제목 그대로 "굴욕"을 키워드 삼아 편집 없이 기록합니다. 



목영릉님은 주류 출산 담론이 과정이 아닌 이벤트로서 "출산 행위"에 집중되거나 '사회적 재앙'으로서의 "저"출산에 포커스를 두거나 출산을 낭만화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정작 주체인 여성의 목소리를 삭제시켜와서(최근 읽은 조선시대 출산 문화에 대한 책에서도 그 부분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더군요. 워낙 터부시해온 화두였죠), 정작 21세기 출산을 앞둔 여성들은 레퍼런스 삼을 목소리를 찾지 못한다고 목영릉 님은 울분을 쏟아 냅니다. 부제처럼 "우리는 출산을 모르"는데 마치 안다는 양 세뇌 당해왔다는 것이죠. 혹은 여성의 출산은 자연의 순리라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나아가지 못한 채 출산에 프레임 걸어 생각해왔다고 당신은 비판합니다. 이런 주장에 이르기까지 목영릉 님은 어찌 그렇게 많은 책, 드라마,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섭렵할 수 있었는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갓난 아기를 돌보면서 "짬짬이 글쓰기" 덕분에 [굴욕 없는 출산]은 다양한 영역-페미니즘이라는 우산 아래 아우를 수 있는-의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지요. 화끈한 문장으로요. 제가 "어느 페이지를 펴도, 등을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입니다. 생각을 담고만 있는 이도 많은데, 목영릉님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화두의 공을 높이 띄워주는 이에게 감사해야죠.


 책 읽으며 내내 저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면, 당신에게 여전히 출산경험의 키워드가 "굴욕"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굴욕감"의 근원을 어떤 방향으로 파들어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제가 "굴욕" 키워드 주변의 단어들을 채집해두었습니다. 출산의 의료화 과정에서, 여성 몸의 도구화 대상화에 대해 분노했던 당신의 절규가 다양한 형용사로 변주됩니다. 




  • "분노, 오기 회환, 사명감" (6)
  •  "괴리감, 어리둥절함, 찝찝함, 수치스러운 기억" (40)
  • "임신 과정은 대부분 우울과 고통을 인내하는 시간" (47)
  • "수치심과 모욕감 사이" (64)
  •  "'굴욕의자' 앉아 있는 심정은 그야말로 처연했는데, 아프고 부끄럽고 당황해서 어쩔 몰라하는" (64)
  • "임신 과정은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나는 분명 모욕을 느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떠한 책이나 매체에도 '수치' 던어는 언급되지 않았다모두 행복과 기쁨을 말했다." (67)
  • "나는 임신과 출산 과정  느꼈던 불안걱정초조우울모멸감슬픔막막함…" (68)
  • "굴욕을 느낀 개인은 있는데 굴욕을  주체는 뚜렷하지 않아 모욕감이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68)
  • "즐거워서 어쩔  모르며 치킨을 먹는 남편과 시댁식구를 보니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덕분에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95)
  • " 여성이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타자에 의한 슬픔, 우울함, 당혹스러움"(102)      



목영릉 님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 앞으로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글을 계속 쓰실 건가봐요. 다음에 책을 내셔도 세 번씩 곱씹어 읽는 열렬 응원자가 될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가 있나요?]는 그 질문이 불편한 사람, 차일드프리, 차일드리스. 논맘non-mom, 널리파라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non-mom이며 노년기를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케이트 카우프먼이 썼습니다. 많은 여성을 실제 만나 인터뷰하면서 "엄마나 할머니가 아닌, 나로서만 사는 여성'의 삶과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려 애썼습니다. 주류 담론이 늘 '엄마,' '모성' '좋은 엄마'에 치우쳐 있다면서 '엄마가 아닌 사람들'을 관심과 배려로 살피자는 주장입니다.  


목소리의 빈 자리, 당사자성의 전면진격이 [굴욕 없는 출산]이나 [당신은 아이가 있나요?] 모두의 집필 동기입니다. 그런데 출산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목소리의 삭제나 편집이 문제라하면서도 여전히 아빠(들) 혹은 아빠 아닌 이들의 목소리가 소거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https://www.katekaufman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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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8-13 0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하네요. 여성의 목소리가 빠진 여성의 몸에 관한 서사. 이제는 우리가 많이 보고 듣고 알아서 이야기 해야할 것 같아요. ^^

scott 2021-08-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사랑님 븍플계에서 독보적인 장르 발굴!
사회적 약자 비주류, 환경 건강, 청소년, 아이들,굴욕 없는 출산 까지
이런 책이 있다는 것 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소개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진정 저의 독서MD 이쉼 ^ㅅ^

얄라알라북사랑 2021-08-13 16:00   좋아요 1 | URL
북플계의 양분 담은 흙, 다양한 장르 나무를 키워내시는 scott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저 부끄럽습니다^^;;;

항상 몸의 문제에 관심 두다 보니 저는 이런 가지를 키우고 있는데,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 서른에야 진단받은 임상심리학자의 여성 ADHD 탐구기
신지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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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고치겠다는 건가? 너나 잘 살피세요." 

대학병원에서 "환자"의 ADHD 증상 감별해서 진단내리고 치료하는 임상심리학자 본인이 (알고보니) ADHD 범주에 속한다면?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의 저자 신지수가 그랬다. 그녀는 학창시절 교무실에 자주 불려 다녔다. 그녀가 제출한 반성문만으로 담임 선생님께서 두툼한 노트를 엮어낼 수준으로 자주 지적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지수는 ADHD 진단을 받지도, 받아볼 생각도 못했다. 까불까불 산만한 사내아이의 얼굴을 한 ADHD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남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과잉행동"을 진단 기준으로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여성에게 유병율 높은 "조용한 ADHD"는 주목받지 못했다. 저자 역시 "조용한" 즉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부주의형 ADHD였기에 진단받아볼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단초삼아, 정신의학에서 여성이 얼마나 배제되어 왔는지 어떤 점에서 불합리한지를 에세이형 문장에 담아낸다. 



저자는 DSM의 ADHD 진단 기준이 "여상의 증상을 세밀하게 감별할 수 있는 문장을 기술하는 데 실패"(75)했기에 젠더 적합성gender appropriateness에서 이탈되었다고 본다. 실제 DSM 도구 타당성 검증단계에 동원된 연구 대상의 78.4%가 남성, 84%가 백인으로 편향되었는데, 이는 DSM이 다루는 정신장애에서의 젠더평향성을 드러낸다. 여성의 "조용한" ADHD는 기껏해야 기질의 문제로 축소되거나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등 다른 이름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한 마디로 제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의 전반부는 저자가 ADHD 진단 받은 이후 맹렬하게 공부한 정신장애 진단에서의 젠더편향성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 그 극복방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주를 이룬다. 신지수는 정신장애의 진단과 이해 과정에서 젠더 감수성 필요하며 과잉진단만큼이나 과소진단도 문제적이라는 시각을 보인다. 후반부는 저자가 실제 어떤 방법을 동원해 이 "장애"를 극복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다른 잠재적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약물치료의 힘을 믿는 책의 부록으로 본인의 "약물-콘서타-일지(약물 복용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의 기록)"를 공개한다. 약물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은 인지행동치료로 개선할 것을 권고한다. 


저자는 성장과정에서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 "ADHD"라는 이름을 진작 만났더라면 덜 빼았겼을 삶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과소진단으로 인해 ADHD 환자되기에서 누락된 다른 여성의 억울함에도 항변해준다. 


의료문제의 개념화와 진단 과정에서 젠더 편향성 문제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나는 ADHD 라는 진단명 남용 자체를 껄끄럽게 느껴온지라 "과잉" "과소"에 대한 저자의 고민에는 반만 동의한다. 저자는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를 시작점 삼아, 이후로도 자신 외 다른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좋은 후속작을 펴내줄 책임감 있는 의사라는 게 내 촉이다(문제제기만 하지는 않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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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7-14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자기자신을 아는게 가장 어려운 거 같아용! 해결책 안 내주시면 북사랑님께 크게 혼날 거 같은 분위기닷!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북사랑 2021-07-17 16:54   좋아요 1 | URL
^^ 앗? 그랬나요? 신지수 저자님 말씀도 잘 하시고, 호감형이시더라고요. 계속 문제 제기하며 이 분야에서 기여하시길 기대 + 팍팍 응원하며 썼어요.


파이버 2021-07-17 1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도 막연하게 ADHD하면 천둥벌거숭이 남자아이들을 떠올렸었네요 .. 북사랑님 말씀처럼 adhd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고 있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막무가내로 혼만 냈던 옛날 부모님들보다 아동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는 지금이 약간 더 희망적으로 느껴져요. 신도시 같은 경우 아동 심리치료나 상담하는 곳도 부쩍 늘었더라구요. 약물치료에 대해 저도 긍정적이지는 않은데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해지네요

얄라알라북사랑 2021-07-18 17:19   좋아요 2 | URL
파이버님 질문에 대해, 제가 받은 인상을 말씀드리자면...신지수 작가는 진단 후 최적의 치료법(이 경우 투약)을 권고받으면 따르며, 그 효능을 추적관찰하는 데 능하신 것 같았어요.

˝천둥벌거숭이 남자아이들˝, 파이버님 콕 집어 단어 써주셨네요. 저도 ADHD하면 초등남자아이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것 같아요. 저자가 병원에서 ADHD 환자들 상담해주면서, 정작 본인의 여러 증상도 그 질병명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안도했을까요?

2021-07-18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8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인적 능력이다."


"울컥" 포인트가 엉뚱하다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문장에도 울컥하다니! "울컥"이 올라와서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읽다가 잠시 쉬었다. 인간 본연의  성향으로서 돌봄. 단위시간당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어 팔리는 상품으로서가 아닌, 생명 있는 존재들끼리 서로 보듬고 살리는 본능. [선언 manifesto]되니, 무게감의 더해진다. 



코로나19 덕분(때문)에 공론의 장 중심으로 치고들어온 이슈가 바로 돌봄 아니던가?  2020, 2021년  '돌봄 경제' '돌봄 위기'를 주제로 한 웨비나와 컨퍼런스 찾기가 쉬워졌다. 언론과 학계가 '돌봄' 이슈를 띄워 주니, 일상에서도 이 용어가 새로운 뉘앙스를 담는다. "돌밥 돌봄해야 해서....(시간 약속 못 지킵니다), 제가 돌봄 담당이라 코로나 특히 조심해야 해요." 요새 카톡방 일상 대화에서 이런 표현을 자주 접하면서, 얼떨떨해진다. '애 봐야 해요. 애 보는 사람'이 반세기 전 표현인양 아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물론 '돌봄'은 '아이 돌보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훨씬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의 저자들(더 케어 컬렉티브 the care collective)은 "보편적 돌봄 Universal Care"가 상식, 즉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 이들이 정의하는 보편적 돌봄은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 되는 것(41)"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돌봄의 상호의존성과 호혜성을 살려 전지구적 차원의 돌봄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할 필요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코로나 19는 인간이 바이러스 및 비인간 존재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생존해왔다는 걸 각인시켜줬다. 돌봄 대상의 범주를 확장시켜 '내 새끼, 내 핏줄 관계'뿐 아니라 (그동안 약탈해온) 지구를 보듬어 안아야할 필요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전개되는 현실은 다르다. 그걸 사람들은 '돌봄의 위기'라고 말한다. 백신은 개발되었지만, 국적을 선별하고 건강권을 모두에게 고루 나눠주지 않는다. 국경은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관념적으로도 더 강화되었고 '회색지대'에는 돌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비통함이 커진다. 당장 4단계 방역지침이 내려지면서 대한민국의 많은 어머니들은 "돌밥" 상비군으로서의 책무 다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화된 돌봄'에 대한 비판의목소리가 꾸준히 출력을 높여왔어도 여전히 위기상황에서 돌봄 상비군은 '여성,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고 빈곤하게 상상되고 실천된다. 저자들은 [돌봄 선언]을 통해서 "어머니와 여성뿐 아니라 모두가 돌봄 역량을 가지고 있고, 서로 함께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 (85)"고 말한다. 


저자들은 인간의 돌봄 성향을 시장논리로 길들이고 왜곡시켜서 '우리 같은 사람, 내 것과 내 편 돌보기'가 마치 건강한 생존전략인양 응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저항한다. 저자들은 타인의 고통, 타인의 돌봄 필요에 대한 무관심에서 깨어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신자주의 자본주의 기업의 위장술인 "무늬뿐인 돌봄carewashing"을 가려내고, 전통적으로 비시장 영역이었던 돌봄조차 아웃소싱하려는 흐름에 저항하라고 촉구한다. 


나아가 [돌봄 선언]은 "보편적 돌봄"을 실현할 행동 강령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일상화된 무관심"이라는 마취에서 깨어나 돌봄 성향을 일깨우라는 것이다. 이는 돌봄이 개인 차원의 문제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관심한 친족, 무관심한 정치, 무관심한 국가, 무관심한 경제"라는 큰 틀 자체를 뒤흔들라는 제안이다. 예를 들어, 저자들은 "내 새끼, 내 가족과 친족' 챙기기의 편집증에서 벗어나 친족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옮긴이 정소영 박사도 지적하듯 "난잡함 promiscuity'이라는 개념이 의미 전복을 일으키며 저항의 의미로 쓰였다. 저자들은 핵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난잡한 친족promiscuous kinship'을 돌봄 대상으로 확장시키라고 제안한다.  '돌보는 공동체 만들기' 위해 지역도서관을 적극 활용하라는 제안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새로 정책이나 공공공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지역도서관을 거점으로 활용하라는 실용적 제안이니까. 도서관을 거점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책뿐 아니라 다양한 자원, 기술과 지식 등이 있다. 


혹자는 이런 제안을 들으며, 자본주의 논리와 돌봄 윤리의 타협점을 찾느라 머릿 속이 뜨거워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선을 긋는다.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하라고! 


선언문을 읽기만 해도 심장이 뜨거워진다. 뜨거운 심장의 연결. 책에서는 이를 "돌보는 관계의 글로벌 동맹" 확장이라고 표현했다. 부족하나마 지금 [돌봄 선언] 리뷰를 공유하는 것도, "확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뜨거움을 또 누구와 나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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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째 서가에 모셔만 둔 책들 뽀개는 날. 6월 22일. 각 잡고 읽기.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면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나는 통증의 개념보다는 통증을 왜 연구해야 하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으며, 왜 덜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정희진 32)"



정희진 선생님이 "통증 연구, 연구"라는 단어를 썼기에 여기서 생각을 이어가 본다. 경험 나눔의 차원이 아닐 때, 즉 논문의 형식미를 갖춘 "연구"일 때도 정의를 포기해야 하는가? 조작적 정의 시도라도 해야 다음의 절차가 풀리지 않는가? 일단, "연구"의 장에서는 용어에 대한 정교한 구분을 하지 않고서는 논의의 신뢰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어렵지 않던가?  고백하자면, 나는 "고통, 통증, 아픔," "질병, 질환, 병" 이 용어들을 구분해서 적재적소에 쓰고 있는지 자기검열하다가 잘 몰라서, 그냥 '아몰랑' 하기도 한다. 


▶정희진 선생님 말씀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선생님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왜 금기시되어 왔"는지 궁금하다 하셨는데, 통증이 화제어로 금시시 되어 온 것이 시대나 사회를 떠나 보편적 경향인가? 통증이 너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굳이 '언어화' '문제시화' 하지 않는 사회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통증을 수반한 통과의례를 일종의 문화적 '주민등록증' 삼는 사회에 대해, 외부자적 시선들은 호들갑을 떨고 새디스트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느니 하는 주석을 남기지만, 정작 그런 통증을 살고 있는 이들은, 그 통증을 대상으로 '논문'을 생산해내지 않는다. 



"고통과 몸은 내 인생과 공부의 평생 동지인데 '동지'들은.... (정희진33)"

- 올리버 색스

- 엘라지베스 퀴블러 로스

- 오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도, '동지' 리스트에 올리버 색스 선생님을 맨 앞에 올리셨습니다. 2021년 1분기를 올리버 색스 글들 탐닉하며 보냈던 저에게도 이 분은 경이로운 마인드 그 자체. [중독 인생] 읽고 난 지금에서 생각해보니, 이 분이 마약에서 벗어난 것도 기적이네요. 깊은 탐닉에서 어떻게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경이로움. 


▶ 오누키 에미코, 정희진 선생님 덕분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봅니다. "쌀"의 상징적 의미 연구한 짧은 책만으로 끝낼 뻔했는데,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동하시는군요. 게다가 연구 영역이 굉장히 폭 넓으시네요. 제목만 봐도 당장 읽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글도 작은따옴표와 괄호투성이인데 일종의 협상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몸에 대한 소유격이나 대상화가 전제된 나'의' 몸, 몸에 '대한'.... 같은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자 노력하지만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43)'


▶"문화" "신'  "종교".....소유격을 씀으로써, have동사 be동사를 씀으로써 산으로 바다로 가는 추상어들이 많죠. 그럴 때마다 작은따옴표를 친다면, 바다 너머 안드로메이다로.....저도 마찬가지의 고민 종종 해보았기에 격 공감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탈코르셋' 운동과 거리가 있다. '탈코르셋'은 기본적으로 젊은 (중산층) 여성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물론 대단히 중요한 여성주의 실천이지만 통념과 달리 모든 여성이 규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44)"


오호! "탈코 탈코"하는 친구들 이야기에, 제가 심드렁한 태도를 감추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용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사건은 구조적이되(정치학), 용서는 개인의 몫(심리학)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56)."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57)"










 "모두가 작가인 이 시대에 고통이라는 주제는 '사연팔이'라는 최근 출판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60). 이 책의 문체에는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무너져 있다. 여성주의 글쓰기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연구'가 아니더라도 취약한 처지에 있는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63)." 


"돌봄 윤리를 제안하는 여성주의 연구와 여성주의자의 일상 사이에 생기는 불가피한 괴리 (61). 보살핌 노동의 가치와 보살핌 노동자의 처지는 다른 우주이다. 논문을 쓰고 있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생계 활동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 아버지, 자녀를 간병해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 (66)." 




▶ 언어의 맛이라는 것이 참 신묘합니다! 최근 "질병서사 illness narrative"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많이 쓰이더라고요.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갑자기 "사연팔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니  흥미롭습니다. 텍스트의 홍수라는 현상은 동일한데, 한 편에서는 "서사narrative"로 장르화해주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연팔이"라고 편히 불러주기도 하네요.


 "고통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강조해 온 상황적 지식 situated knowledge여야만 한다. 맥락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84)." 

"글쓴이의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팔거나 나의 고통만 중요한 글이 된다. 고통의 공감 불가능성 때문이다. (86)"


"나는 당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고 우울하다. 10퍼센트의 사람들은 근자감과 조증 기운이 넘친다. 자신감이 물리력, 폭력, 권력인 시대다 (93)"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자체가 성차별이다." (150)

















"학문과 사회 공동체의 관계는 늘 논란거리지만, 논문의 내용과 주장을 사회적 의미, 역할, 기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논문과 '잡문'의 차이는 글의 형식이 아니라 '품질'로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 (191)"




"각자의 '봉쇄 일기'를 기다리며: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노동(살림)을 비하하고 자연파괴(죽임)을 추구해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209)."





"남성 중심의 근대 국가는 여성의 몸을 자기 실현의 그릇으로 삼았꼬, 이처럼 남성의 시선에 갇힌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능력'이 아니라 여성을 기아와 죽음에 이르게 한 '저주' 였다 (230)."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이 여성의 성과 재생산 통제를 가져온 것은 필연이었지만, 여성주의 연구자가 탐구해야 할 것은 젠더가 근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여성 억압 현실이 어떻게 근대와 자본주의를 만들었는가?"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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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6-2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각잡고 읽으셨습니까?ㅎㅎ

얄라알라북사랑 2021-06-23 07:30   좋아요 0 | URL
네^^ 어제 책 3권 읽었거든요. 눈동자가 잘 안 돌아가더라고요. 눈에 각을 잡았나봐요^^;;;;; 쉬엄쉬엄해야하는디, 20대때로 착각했어요 ㅋ툐툐님 굿 모닝 하시어요^^

미미 2021-06-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장 깨기아닌 모셔둔 책 깨기 입니까? 멋져요!!!😆

얄라알라북사랑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50일 정도 책을 안 읽었더니, 모든 책들이 ˝모셔둔 책˝이 되버렸네요. 미미님 좋은 아침 시작하시길^^

단발머리 2021-06-22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딱 각잡고 준비하셨는데요!! 통증연대기는 반갑고요ㅋㅋㅋㅋㅋ 저도 다른 책 찾아봐야겠어요!

얄라알라북사랑 2021-06-23 07:29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에서 소개해주신 책 중 2권만 이전에 읽어보았더라고요 통증 연대기는 단발머리님께서도 추천하시는 거니, 오늘 목차라도 꼭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21년 1, 2월에 천천히 [재생산에 관하여: 낳는 문제와 페미니즘]을 읽었다. 재생산신기술과 페미니즘의 교점에서 "낳는 문제, reproduction"를 이야기한 책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포럼에서 발표된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일상에서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난임 혹은 불임(이라고 명명된 몸의 현상)을 의학적 도움 받아서 해결하려는 분들을 만나본 적도 없다. 게다가 책에서 소개한 사례들은, 저자들의 학문적&생활 공간이 주로 서구사회인 만큼(간혹, 인도나 아시아 사례가 몇 줄씩 지나가듯 나오지만), 치우칠 수 밖에 없다. 활자 밖에서 이 주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갈증이 난다. 아니, 실로 경험하고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공감 욕구가 올라온다.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 




Eva Rinaldi,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페리스 힐튼이 가쉽성 기사에 등장한다. 이번에는 동영상 유출 등 스캔들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다. 그녀가 IVF로 쌍둥이 임신을 시도 중이라 한다. (상상 속의 쌍둥이) 두 명 중, 한 명에는 벌써 이름도 지어주었다고 하며, 앞으로도 서너 명 더 시험관시술로 갖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한다. 모두, 최근 그녀가 출연했던 팟캐스트 기사를 인용해  2월 11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밝힌 내용이다. 페리스 힐튼에게 비난이 쇄도했다고 한다. 아기를 갖고 낳고 싶어하는 욕구는 (많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왜 그녀는 비난받을까? 최근 읽은 [재생산에 관하여]와 연계점을 고민해 본다. 


  • 향후 패리스 힐튼이 공개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시험관시술을 시도한 이유가 의료적 필요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힐튼을 옹호하는 글을 쓴 에이미 클라인 기고문(아래 링크)으로 유추하건대 그렇다. "I get why people are upset about Hilton’s easy-breezy statement about using IVF for nonmedical reasons to have twins of specific genders." 즉, 차별적 용어라는 이유로 요즘에는 잘 안 쓰지만, 특정 성별의 특정한 명수의 아이를 갖겠다는 힐튼의 포부는 "디자이너 베이비 Designer baby"를 떠올리게 한다. 
  • 대놓고 말하지 않았어도 힐튼은, "원하는 대로 재생산 계획을 하고, 계획대로 얻을 수 있는" 소수자의 누림을 연상케 한다. 쌍둥이 이후에도 서너 명이라니? 그렇다면 최소 5명의 아이를 계획 중이다? "낳고 난 이후"의 돌봄은 누가 하는가? 질문이 저절로 꼬리를 물며 올라온다.  즉,  황금빛 예비엄마 미소를 띤 힐튼은 임신, 출산, 양육에서의 재생산 격차를 보여준다. 


 [The Trying Game]의 저자인 에이미 클라인은 힐튼이 성별과 아기의 명수를 특정했다 해서 비난받을 수 없다며 힐튼을 옹호한다. 자연스럽다는 이유에서이다. 다만, 힐튼이 아무리 훌륭한 의료진과 기술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시험관시술로 아기를 갖는 과정에서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롤러코스터를 타며 힘들 터이기에, 미리 응원을 보낸다고 했다. 


이후, 힐튼 관련 기사를 따라가면서, 이 이야기가 미국 내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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