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 끝이 얼마나 가늘고 얼마나 선명한 분홍빛이었는지, 오직 자연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 이 화폭에 누군가가 예술의 작은 흔적, 단 하나의 인간적인 표시를 남겨 놓으려고 손톱으로 하늘에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종탑만큼 높지는 않으나 그 곁에 반쯤 무너진 네모난 탑의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돌 더미의 어두운 진홍빛에 놀랐다. 마치 가을날 안개 낀아침에 강렬한 보라색 포도밭 위에 치솟은, 거의 개머루빛에가까운 자주색 폐허처럼 보였다.


- P118

 결국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항상종탑이었고, 종탑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종탑은 예기치 않은 뾰족한 봉우리로 마을 집들을 불러내면서, 마치 수많은 인간 속에 몸을 파묻어도 내가 결코 혼동하는 일이 없는 신의 손가락처럼 내 앞에 모습을 내밀었다. 



- P123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아름다움에 대한 내 믿음이었고, 또 그 책이 어떤 책이든 간에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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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아니면 안 묻는 게 좋겠어요?"
"물어봐도 상관없어.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인이 다른 남자랑 집을 나갔어요?"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이상하네, 계속 같이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몰라요?"
맞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그런 것도 몰랐을까.
- P39

"그렇게 사소한 일이 의외로 중요해요, 태엽 감는 새 아저씨" 하고 가사하라 메이는 내 눈을 들여다보듯 보면서 말했다. "집에 가면 거울을 찬찬히 봐요."
"그럴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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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골 방들은 —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들로 공기나 바다 전체가 빛을 발하거나 향기를 내뿜는 몇몇 고장에서처럼. 미덕, 지혜, 습관 같은, 공기 중에 떠 있는, 은밀하고도 눈에 보이지 않으며 넘쳐흐르는, 온갖 삶이 발산하는 무수한 냄새들로 우리를 매혹했다. 


- P94

.... 그해 모든 과일로 솜씨 있게 만든 투명한 젤리 냄새, 계절에 따라 변하면서도 가구와 집 안에서 나는 냄새로 톡 쏘는 하얀 젤리 맛을 따끈한빵의 달콤함으로 중화하는 냄새, 마을의 큰 시계처럼 한가로우면서도 규칙적인 냄새, 빈둥거리면서도 질서 있는 냄새, 태평하면서도 용의주도한 냄새, 세탁물 냄새, 아침 냄새, 신앙심 냄새, 불안만을 가중하는 평화와 그곳에 살지 않고 스쳐 가는 사람에게는 시(詩)의 커다란 보고로 사용되는 산문적인 것에 행복해하는 냄새였다.  - P95

 이 분홍빛 촛불, 그것은 여전히 보리수 색깔이긴 했지만, 이제 꽃들의 황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들의줄어든 삶 속에서 반쯤 꺼진 채 졸고 있었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죽은 잎과 시든 꽃잎을 맛볼 수 있는 끓는 차에 프티트 마들렌을 담그고 과자가 충분히 부드러워지자 한 조각 내게 내밀었다.


- P98

 콩브레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너무도잘 알았으므로, 만약 아주머니께서 ‘전혀 알지 못하는 개 한마리가 어쩌다 눈앞을 지나가는 걸 보기라도 하면, 아주머니는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자신의 온갖 추리력과 자유 시간을 쏟아부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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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08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명 1권을 읽고 또 읽었는데 모나리자님이 올려주신 구절을 다시 읽으니
넘 !새로움 ㅋㅋㅋ
보리수 열매 색깔이 분홍빛 촛불 색이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프루스트의 감각적인 문장속에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들이 살아 움직이네요 ^.^

모나리자 2021-03-08 16:57   좋아요 1 | URL
정말 거의 보여주는 묘사더라구요. 콩브레 마을 풍경, 사람, 성당 등 눈에 꽂히는 게 다 대상이었어요. 눈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야 하는 작품 같아요.ㅎ^^
 
[eBook]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 도둑 까치 태엽 감는 새 연대기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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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라는 걸 알고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오히려 하루키를 좋아하는 작가가 쓴 에세이를 여러 권 읽은 것으로 하루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이 작품 세트를 19년에 구입하고 묵혔다가 작년 8월부터 읽다가 쉬다가 이제야 1권을 읽었다. 소설은 몰입해서 읽어야지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화자인 오카다 도오루는 법률사무소를 다니다 그만두고 요리와 청소를 하며 음악을 들으며 소박한 일상을 보낸다. 음악 애호가라고 할 수 있는 하루키답게 소설 속에는 음악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야기 도입부에도 로시니의 도둑 까치서곡을 들으며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유튜브를 검색해서 들어보았다. 역시 하루키의 말처럼 스파게티를 삶을 때 들으면 딱 좋은 음악으로 느껴졌다. 이때 모르는 여자로부터 10분의 시간을 달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는 상대를 모르는데 그 여자는 가 실업 중이며 나이가 서른이라는 것 등 모두 알고 있다. 또 아내 구미코의 오빠 와타야 노보루와 같은 이름을 붙여준 키우던 고양이가 사라졌다. 고양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이웃집 소녀 가사하라 메이를 만나는 등 알 수 없는 기묘한 사람들과 얽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 가노 마르타를 만나게 된다. 특히 가노 마르타는 뭔가 꿰뚫어보는 염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신은 점쟁이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앞으로 한동안 여러 가지 일이 생길 거라면서 고양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도오루는 불안해지긴 하지만 특유의 침착함은 잃지 않는 모습이다.

 

 노몬한 전쟁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혼다 씨와 가노 마르타가 모두 물을 주의하라고 했기에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나 들리던 태엽 감는 새의 모습도 사라졌다. 이어서 가노 마르타의 동생 가노 크레타가 등장한다. 가노 마르타가 대신 보낸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도 모두 사라진 고양이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고를 하며 고통 때문에 죽기로 결심했던 지난날의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서 마미야 중위가 등장한다. 구미코와 결혼 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다가 중단되었던 혼다  씨가 죽고 나서 오카다에게 유품을 남겼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앞서 가노 크레타보다 더 길고 긴 중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참 지루하게 긴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었는데 그 나른함을 단번에 깨주는 대목을 만났다.

 

우리는 도적 때 사냥, 패잔병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죄 업는 무수한 사람을 죽였고, 식량을 약탈했습니다.(중략) 난징에서도 몹쓸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 부대도 마찬가지였어요. 수십 명을 우물에 던져 넣고, 위에서 수류탄 몇 발을 던집니다. 그 외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짓을 했어요. 소위님, 이 전쟁에 대의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살육이에요. 그리고 짓밟히고 죽는 것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입니다.(중략) 그런 사람들을 아무 의미 없이 죽이는 게 일본을 위한 일이 되겠느냐고요.’(P295)

 

 혼다 씨와 생사를 같이 했던 노몬한 전투(1939년 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몽골·소련군 간의 대규모 충돌사건.) 이야기를 마미야 중위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지휘관인 야마모토가 산 채로 가죽를 벗겨지는 모습을 그대로 목도 해야 했던 마미야 중위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도 산 인생이 아닌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소박한 일상에 하나둘씩 기묘한 일을 겪던 가오루의 이야기에서 역사의 만행 이야기로 흘러가는 설정이 의아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하루키는 1970년대 이후 정신적 기둥이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는 걸 깨닫고 역사로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이 작품에 2차 대전 중의 중국 이야기를 넣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면서 전혀 의도치 않은 일을 마주하기도 한다.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같은 인간끼리 극악무도한 일을 벌였어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흘러가고 곧 잊히고 만다. 작가의 역할이란 관찰자로서 독자에게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하루키는 2004파리 리뷰인터뷰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이상한 곳인지에 대해 정직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단다. 마미야 중위의 이야기를 통해서 도오루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그리고 혼다 씨의 유품으로 받은 꾸러미는 텅 빈 상자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라진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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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6 2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는 하루키가 딱히 좋지는 않은데 또 그러면서 웃기는게 자꾸 읽게는 되더라구요. ㅎㅎ 이 책은 아직 안봤는데 볼까 말까 고민이 되네요. 모나리자님 나머지 권도 읽고 리뷰올리시면 보고 판단해볼게요. ^^

모나리자 2021-03-06 23: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권을 워낙 띄엄띄엄 읽어서요. 오하려 후반에 와서 몰입이 되더군요. ㅎ 뒷편이 궁금해요. 어떻게 이어갈지..
특유의 유머가 있어서 재밌긴 해요.
편안한 밤 되세요. 바람돌이님.^^!

scott 2021-03-07 1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모나리지남 전 지금 하루키옹이 진행하는 라디오 듣고 있는데 태엽감는새 모나리자님 리뷰 읽으니 뭔가 연결이 된듯한! 이책 모나리자님은 원서로 읽으실수 있을것 같은데요 첫장부터 김남주 번역이 엉망이라서,,,,,

모나리자 2021-03-07 22:29   좋아요 1 | URL
와~영어 방송인가요, 일본어 방송인가요? 대단대단!!
하루키 옹이 라디오도 진행하는군요.ㅎ
글쎄 기회가 되면 원서로 읽어보고 싶네요. 하루키의 원서는 <1Q84>세트만 가지고 있는데 꽤 두꺼워서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아직 실력을 한참 키워야 해서요.ㅋ

편안한 저녁 되시고 새 한주도 화이팅입니다. 스콧님.^^

새파랑 2021-03-07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끼의 ˝문˝ 을 읽어봐야 겠네요 ㅎ 리뷰 보니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가사하라 메이가 정말 좋고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ㅋ 2권 리뷰도 기대합니다^^

모나리자 2021-03-07 22:34   좋아요 1 | URL
네, <문>은 다른 작품에 비해 부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지요. 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나름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에요. 이 작품의 제목은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무데나 펼쳐서 눈에 띈 글자로 제목을 지었다죠.ㅎ
편안한 저녁 되세요.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この外いたずらは大分やった。大工の兼公と肴屋の角をつれて、茂作の人参をあらした事がある。人参の芽が出揃わぬ処へ棄が一面に敷いてあったから、その上で三人が半日相撲をとりつづけに取ったら、人参がみんな踏みつぶされてしまった。


화자가 장난끼 많았던 어린시절을 이야기한다.
인삼밭에 깔아놓은 짚 위에서 씨름을 하다가 싹이 나오려는 인삼을 밟아 뭉게고 말았던 이야기...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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