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 끝이 얼마나 가늘고 얼마나 선명한 분홍빛이었는지, 오직 자연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 이 화폭에 누군가가 예술의 작은 흔적, 단 하나의 인간적인 표시를 남겨 놓으려고 손톱으로 하늘에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종탑만큼 높지는 않으나 그 곁에 반쯤 무너진 네모난 탑의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돌 더미의 어두운 진홍빛에 놀랐다. 마치 가을날 안개 낀아침에 강렬한 보라색 포도밭 위에 치솟은, 거의 개머루빛에가까운 자주색 폐허처럼 보였다.


- P118

 결국 우리가 되돌아가는 곳은 항상종탑이었고, 종탑이 언제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종탑은 예기치 않은 뾰족한 봉우리로 마을 집들을 불러내면서, 마치 수많은 인간 속에 몸을 파묻어도 내가 결코 혼동하는 일이 없는 신의 손가락처럼 내 앞에 모습을 내밀었다. 



- P123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아름다움에 대한 내 믿음이었고, 또 그 책이 어떤 책이든 간에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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