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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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다. 20대까지는 열심히 읽었는데, 30대를 넘어서자 소설이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나도록 잘해야 한 해에 한두 권정도 읽었는데, 지방 소도시로 내려와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한 달에 두세 권씩 읽게 된 것이 벌써 일 년 째다. 현대 소설 반, 고전이 반 정도 되는데, 예전에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읽을 때 마다 이것이 내가 읽었던 그 책인가 싶다. 그 사이 민음사나 펭귄 클래식 등 여러 출판사에서 완역본들이 많이 나왔고, 번역자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원어로는 읽지 못하지만, 원작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고전이 전혀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책 자체에도 있지만, 그 동안 나의 책읽기 방식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놓으며 책과도 좀 뜸해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철학하면 사주팔자가 떠오르고, 서양철학하면 소크라테스 어쩌고 밖에 모르던 처지에,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주체가 ‘나’지, 이까짓 걸로 무슨 학문을 하나, 처음엔 웃기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 저 책 손을 대고 철학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봤자 어설픈 교양도 안 되지만 여하튼 그 재미를 살살 알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에는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을 계기로 역사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역사 자체 보다는 역사적 눈으로 고전을 읽는 방식을 배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소설을 읽으면서도 줄거리나 캐릭터 자체 보다는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역사적 배경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은 어떤 가치관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따위가 더 흥미로웠다. 그런 면에서 현대 소설보다는 고전이 훨씬 재미있다. 고전이란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 이지만, 또한 당대의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전은 사건과 지문을 중심으로 읽었다면, 요즘은 다소 장황한 사변과 배경 묘사에 집중해 읽는다. 그러니 다시 읽는 고전은 예전의 그 고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문학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이 좋은 것인가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수는 없다. 가끔 나도 그런 의문이 든다. 가슴으로,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고, 분석하고 곱씹으면서 읽는 것이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번거롭게 문학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제 10, 20대의 감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감수성으로 읽는 책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그런데 철학적, 역사적 눈으로 작품을 뜯어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작가가 가치관을 형상화하는 방식에 경탄하기도 하고, 그 시대의 구조적 틀이 개인을 옥죄이고 파멸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하기도 한다. 문학이 구체화 해내는 철학과 역사는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역사 그 자체가 갖지 못한 감동과 힘이 있다. 내게는 그것이 문학의 힘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도식적 책읽기로 비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것이 가장 즐거운 책읽기인 이유이다. 감수성을 잃었지만, 희미하나마 눈 하나 얻었으니, 아직은 문학작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막상 철학적, 역사적 배경이 확연히 드러난 작품은 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인물이나 사건 속에 녹아들지 않고, 저자가 생목으로 내질러 버리는 가치관은 지루하고, 힘이 없다.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이슬람 여성은 발뒤꿈치만 보여도 육감적이라는데, 해변의 비키니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 마련이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말하자면 비키니다. 전체적으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유명한 ‘~부인’ 시리즈의 원조인데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노골적이라 매력의 반을 잃어버렸지 싶다. 아쉽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출판 금지와 삭제의 험난한 역사가 보여주듯, 노골적이고 화끈한 섹스 묘사에 눈을 반짝이는, 감각적 방식이 하나이다. 어릴 때 그 고리타분한 우리 근대문학에서도, 입을 맞추거나 몸을 더듬는 장면이 나오면, 그것만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아일보가 그 명성이 짱짱하던 80년대에, 아침 등굣길에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신문을 남몰래 주워, <어우동>이란 연재물을 열에 들떠 읽기도 했다. 십대는 그런 때고, 그 시대는 영상보다는 활자가 더 성에 접하기 쉬운 때였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최고의 고전으로 기억된다면, 아마도 단연 여덟 번이나 되는 그 숨 막히는 장면들 덕분일 것이다. 어쩌면 요즘 10대들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벗고 노는 포르노물 보다 지루한 문학 작품 속의 성적 묘사는 분명히 더 매혹적인 면이 있다. 차도르에서 살짝 비어져 나온 발뒤꿈치처럼, 관능적이다. 물론 로렌스나 로렌스 전공자들은 무척 억울해하고, 왜곡된 읽기라고 주장하지만, 일차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하고, 그 자극성으로 치자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따라올 고전은 없을 것이다. 고전이 이렇기만 하다면, 청소년들은 그리고 우리 독서회원도 그러리라 짐작되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통째로 사서 읽으려 덤빌지도 모른다.

 

로렌스가 이렇게 파격적인 섹스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 원초적 자연성을 산업사회,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는 두 번째 방식은, 그리고 로렌스가 가장 좋아할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는 것이다. 사실 로렌스의 의도는 논의의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백하다. 심지어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지도 않고, 섹스 묘사만큼 노골적이다. 민음사 판 작품해설을 인용해 보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주제 의식은 이렇다. “그것은 기계적 관념성과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거부이며 이에 대응할 구원적 가치로서 살아있는 인간적 관계의 회복 가능성이다. p328"

 

채털리 경인 클리퍼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채털리 부인인 코니와 그녀의 연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원적 인물로서의 한 쌍이다. 이 대립 구도는 기독교도들의 선과 악만큼 뚜렷하다.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성공의 암캐 여신’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집착하는 클리퍼드는 처음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에, 코니 부인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는 사업가로서의 명성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클리퍼드는 두 가지 명성을 모두 얻지만, 혼자서는 산책조차 하지 못하는 하반신 불수이며, 점점 아이처럼 퇴화한다. 육체는 마비되고, 정신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다. 그 정신이란 것은 모든 것을 비웃거나 모든 것을 공허하게 여길 뿐이며, 내면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는 누구나 그렇다. ‘資本자본’, 재물-돈이 근본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불구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p315)”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구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 즉 자본가는 더욱 불구다. 성공의 암캐 여신이 그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라는 면에서 클리퍼드는 탄광의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돈을 위해 클리퍼드의 육체는 불구가, 불능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한 명작,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제국의 왕좌는 모든 인간성을 제거한 돈의 노예에게만 허락된 자리이다.

 

채털리 부인의 애인인 사냥터지기 멜러즈는 로렌스 자신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주인공이다. 채털리 부인은 사실 보조적 인물이다. 멜러즈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 동반자이지만, 그 이상의 틀을 짜는 것은 멜러즈 이다. 채털리 부인, 코니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멜러즈에 의한 각성이다. “하지만 지성만 고도로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인 삶보다는 훨씬 나아요. 게다가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인간의 육체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을 따름이라고요. 육체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아름다운 불꽃을 한번 깜빡여 보았지만, 그 뒤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걸 밟아 꺼버렸고, 이어 예수가 나타나서는 완전히 끝장내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이제 육체는 진정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있다고요. 정말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그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으로 피어날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말이죠. 2권 p167”

 

로렌스의 대안은 기형적으로 발달한 정신적 삶에 대비되는 육체적, 자연적 삶이다. 데카르트는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 ‘생각하는 실체’만을 주체로 보았고, 그 이외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주체의 육체마저도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res extensa 연장’ 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근대정신의 출발점으로 그 영광과 오욕의 대명사이다. 근대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이성중심주의 뿐만 아니라 자연을 타자화해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산업문명과 물질문명의 시원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리고 1차, 2차 대전으로 위대했던 근대는 파국을 맞았고, 그 주범으로는 데카르트가 지목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1928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출판되었다. 로렌스의 비판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그 근간이 되는 근대정신 전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삶에 대한 육체적 삶의 찬양은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레스 코기탄스’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자, 철저한 거부이다. 로렌스가 육체적 삶, 관능적 환희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근대정신과 철저히 단절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육체적 삶이 혹은 자연적 삶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작품해설을 통해 옮긴이 이인규는 “로렌스의 그러한 비판과 모색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것인가? 나아가 그의 비판과 모색은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얼마만큼 현재성과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2권 p336”를 묻는다. 이인규는 문명비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육체와 성의 중요성에 관한 로렌스의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이제 성이 인간성 해방의 상징이 되기에는, 너무 개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을 즐기라는 압력에 시달린다. 성은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로 취급된다. 남자들의 의무방어전에 대한 스트레스는 그들의 남근을 점점 위축시키고 있다. 그런데 육체적 삶에 대한 로렌스의 주장을 말 그대로 ‘육체적’, ‘성적’ 관점에서만 비판해야 하는 것일까? 로렌스의 대안이 로렌스의 시대, 즉 성적 억압에 시달리던 시대에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 <아바타>는 로렌스 주장의 현대적 판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기계문명에 의한 판도라 행성의 파괴. 그 첨병 역을 맡은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또한 하반신이 마비된 불구다. 그런데 제이크는 여기서 일종의 일인이역을 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채털리경인 클리퍼드의 역할을, 후반부에서는 사냥터지기인 멜러즈의 역을 맡는다. 이 변화에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네이티리가 있다. 네이티리는 채털리 부인인 코니 역을 맡지만, 제이크와의 관계는 전도되어 있다. 나비족인 네이티리가 기계문명에 찌든 제이크를 자연적 삶, 순수한 육체적 삶으로 이끌어 낸다. 그런데 자연적 삶으로 돌아간 제이크가 지구인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현대인은 여기서 물질문명을 끝장내고 일제히 자연적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멜러즈의 주장을 읽고 있자면, 16세기 에스파냐를 비롯한 서구 문명인들에게 짓밟힌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야말로 자연에 동화되어 건강한 육체적 삶을 살았다. 자본 - 돈이 중심이 된 것도, 인본 - 인간만이 중심이 된 것도 아닌, 자연인으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망했다. 그들이 나빠서 망한 것은 아니지만, 발달된 기계문명의 총칼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 앞에 멸망했다. 그리고 돈의 노예가 아니라 글자그대로 노예가 되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뭔가 굉장히 쇠락한 느낌이 든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그렇다. 명성을 얻지만 공허하고, 지식인들이 모여 떠들지만 알맹이는 없고, 세상의 모든 일들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것을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노쇠함이 아닌가했는데, 영국문학을 하는 지인께서, ‘제국의 피로감’ 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데카당스 문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피로감’, 그것이 주는 우울함이나 허무 따위 말을 들으면, 제3 세계 피식민지인의 후손으로 참 기분이 더럽다. 피식민지인을 앞에 두고, 그들의 눈앞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제국민이 피로감을 운운하면, 피식민지인들, 노예들은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여하튼 그 피로한 제국의 멋진 후예들 몇몇은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 공동체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가 보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그들만의 이상향이었다. 제국은 더욱 강고해지고, 자본은 더욱 악랄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예속되었다.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 밖에 세운 유토피아는 결국 도피적· 은둔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 자체, 권력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궁극적 변화는 없다. 로렌스는 사회주의를 은근히 비꼬고, 볼키를 비난한다. 볼키 역시 기계적 삶을 추구하며,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볼키가 어땠건, 현실 사회주의가 어땠건 그들은 적어도 권력을 장악하여 시스템 전체를 변화시키려 했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짓이겨진 삶 한가운데서 투쟁했던 것이다. 모두가 망하든지 모두가 구원받든지 함께 새로운 체계와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나는 어떤 유토피아도 세계의 밖이 아니라 세계의 안에서, 그 내부에서,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우리의, 우리 모두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이 문제이면 정신을, 물질이 문제이면 물질을 바꾸어 내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삶은 육체와 그리고 자연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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