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91년 1월
평점 :
품절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스무 세 살이었다. 치기였겠지, 스무 다섯 이후의 삶은 치욕이라고 주절대며 다닐 때였다.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알지 못했고, 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순했다. 추하잖아. 삶은 권태로웠고, 세상은 불편했다.

 

까뮈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의 두 편의 시론試論, 『시지프의 신화』와 『반항인』에 빨려들었지만, 여전히 ‘웃는 시지프’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희망 없는 무익한 노동 속에서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일까?

 

그리고 두 배의 시간이 흘러, 다시 두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들과 여백에 빼곡한 메모들이 낯설기도 정답기도 하다. 내 밋밋한 삶은 까뮈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루하지만, 까뮈는 내 암울했던 한 때의 버팀목이었다.

  

 

<시지프의 신화 89년 중쇄(重刷), 반항인 87년 중판(): 둘 다 지금은 절판이다>

 

 

시론試論이 무엇일까? 시험할 시試자를 쓰는 시론은 ‘시험 삼아 해보는 평론이나 논설’ 혹은 ‘간단한 논설이나 논문’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까뮈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한 책은 시론인 『반항인』이다. 까뮈는 항상 세 개의 기본 테마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소설, 희곡, 시론이라는 세 개의 장르로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고백했다. 세 개의 테마는 부조리 혹은 부정, 반항 혹은 긍정, 사랑 혹은 중용이다.

 

부조리 혹은 부정의 계열에는 소설 『이방인』, 희곡 『깔리귈라』혹은 『오해』, 시론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까뮈하면 떠오르는 이방인과 부조리는 ‘부정’의 계열이다. 부정은 곧바로 ‘자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것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란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잃고 버림받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판단한다.” 신이 정해 놓은 운명 속에서도 그의 두 눈을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두 손이다. 자신의 운명에 들어온 신을 추방하고 그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 인간의 것으로 만든 ‘오만한 자’, 오이디푸스의 ‘다 좋다’는 바로 시지프의 행복이기도 하다.

 

「시지프의 말 없는 기쁨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시지프의 신화』p160

 

오이디푸스의 ‘모든 것이 다 좋다’ 도 시지프의 ‘행복’ 도 삶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부조리하다. 인간은 이 세계에 의미 없이 내던져진, ‘피투된 존재’이다. 우리 모두에게 어김없이 예정된 죽음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던져졌다, 버려지는 존재이다. 세계는 낯설다. 인간은 세계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 이다. 물론 세계-내-존재로서, 혹은 매트릭스 안의 ‘미스터 앤더슨’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고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친밀하며, 인생은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시작된다.

 

「다만 어느 날 ‘왜’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어 놀라움에 물든 이 권태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권태는 의식의 운동을 눈뜨게 하고 그에 따르는 운동을 야기한다. 그에 따르는 운동이란 일상적인 연쇄 속으로의 무의식적인 회귀이거나 결정적인 자각이다. 자각 끝에는 시간과 더불어 자살 또는 재기라는 결과가 온다. 권태는 그 자체 속에 무엇인가 진저리나게 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 」 『시지프의 신화』p22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권태에의 두려움이 있다. 권태와 더불어 의식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월,화,수,목,금,토,일의 바퀴를 멈춰 세우고, 낯설어진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의식의 활동이 시작된다.

 

「나의 논증은 그것을 각성시켜 준 명증에 충실하고자 한다. 이 명증이란 곧 부조리이다. 그것은 희구하는 정신과 실망을 주는 세계 사이의 단절, 통일에 대한 나의 향수, 여러 갈래로 분산된 우주, 그리고 그것들을 사로잡는 모순이다.」 『시지프의 신화』p68

 

부조리란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 간극이다.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나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신이 있던 시대에 인간은 의미에 매달리지 않았다. 의미란 신의 뜻 속에 있고, 인간에게는 신의 은총과 구원만이 문제였다. 세계는 창조될 때부터 조화와 통일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이성은 신을 죽였고, 세계는 온통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워 진 것일까?

 

「이 무죄는 두려운 것이다. “모든 것은 허용되어 있다”라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이 말에도 역시 그의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통속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이점을 잘 주의했는지를 나는 모른다. 즉 모든 문제는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쓰디쓴 확인이라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그런 신의 확실성은 벌 받지 않은 악을 행하는 힘보다 훨씬 많은 매혹을 지니고 있다.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으며 이때에 쓰라린 고통이 시작된다. 부조리는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결박한다. 그것은 모든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금지된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91

 

까뮈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의 속박이 오히려 전적인 자유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 그렇다면 신에게 돌아갈 것인가? 자살해야 할 것인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부조리임을 알면서, 만약 우리가 의식에 의해 밝혀진 이 부조리를 자기 앞에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대립의 항목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그만둔다는 것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된다. 」『시지프의 신화』p74

 

까뮈는 자살도 신도 아니라고 한다.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 문제지, 자진해서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살은 하나의 착각일 뿐이다. 그리고 신으로 말하자면, 이미 죽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신 없는, 아무런 희망 없는 세상을 꿋꿋이 견디며 말없이 미소 짓는다. 비합리적인 세계를 은폐하고 신의 섭리를 선택하거나, 이 세계의 무익함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것, 그 어느 쪽도 문제를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반항’ 이다.

 

「반항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투명성에 대한 요구이다. 반항은 순간순간마다 세계를 문제 삼는다. .... 반항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현존이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그리고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이러한 반항은 짓누르는 운명의 확인일 뿐,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은 아니다. 」『시지프의 신화』p74~5

 

부조리한 인간은 이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다. 그리하여 반항인이 되어야 한다. 반항은 부조리한 인간의 자유이며 열정이다.

 

  

 

 

 

까뮈는 긍정 계열의 삼부작으로 소설 『페스트』, 희곡 『계엄령』혹은 『정의의 사람들』, 시론 『반항인』을 남겼다. 『반항인』은 까뮈 최고의 문제작으로, 이 책으로 인해 까뮈는 샤르트르와 철학적 결별을 맞게 된다. 자신에게 친구보다 적을 더 많이 만들어준 곤혹스러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까뮈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반항인』을 꼽았다.

 

『반항인』과 『시지프의 신화』는 하나로 연결된 책이다. 『시지프의 신화』가 자살에 대한 질문이라면, 『반항인』은 살인의 역사에 관한 고찰이다. 까뮈는 “이 시론의 목적은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에서 시작된 하나의 성찰을 살인과 반항의 지평 위에서 추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두 시론의 연속성을 밝히고 있다.

 

「삼십 년 전에는,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살로써 스스로를 부정할 정도로 철저히 부정했었다. 신이 속임수를 쓰고, 신과 더불어 만인이 속임수를 쓰며,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속임수를 쓰니,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 : 즉 자살이 문제였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유일한 기만자들인 타인들만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새벽마다 요란한 몸치장을 한 살인자들이 슬그머니 독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 즉 살인이 문제이다.」『반항인』p11

 

부조리한 감정은 어떻게 살인에 이르게 되는가?

 

「부조리의 감정이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어떤 행동규범을 이끌어내고자 할 때, 살인을 적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그리고는 결국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약 우리가 그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게 되고 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찬성도 반대도 없으며, 살인자는 그르지도 옳지도 않게 된다. 」『반항인』p11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어떤 가치도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선악의 개념이 사라진 곳에는 강자의 논리가 들어설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인은 특권이 된다. 그러나 부조리의 마지막 추론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한 인간은 인간의 질문과 세계의 침묵 사이의 대결을 유지해야 한다. 자살은 그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는 도피 행위이다. 그러므로 삶은 선으로 인정된다. 삶이 선이라면 그 선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자살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살인 역시 마찬가지다. 부조리의 사상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운명적인 살인은 인정할지언정, 추론에 의해 도출된 살인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인이 문제가 되는가? 신성과 신성의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세계 속에 인간은 스스로의 규범을 찾아내어야 했다. 반항이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의 위태로운 노정에서 살짝 삐끗하기만 해도 집단적 살인의 광기 속으로 곧바로 굴러 떨어진다.

 

「신의 왕관이 전복될 때, 반역자는 자신의 인간조건 속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었던 그 정의, 그 질서, 그 통일을 이제 자기 손으로 창조해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실권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인간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무서운 결과들 없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는 아직 그 중의 몇 가지 밖에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결과들이 추호도 반항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결과들은 반항자가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위’와 ‘농’ 사이의 힘든 긴장에 지쳐버리며, 마침내 전적인 부정이나 혹은 전적인 복종에 자신을 내팽개치는 한에 있어서만 발생한다.」

 

그 무서운 결과들은 반항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반항이 부정과 긍정 사이의 긴장을 놓쳐 버릴 때 발생한다. 까뮈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마르크스주의, 허무주의와 러시아 테러리즘, 나치즘, 소련의 스탈린 독재 등을 통해 반항이 어떤 비극적 행로를 밟아 왔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유럽의 오만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드, 니체, 헤겔,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허무주의의 역사를 통해 형이상학적 반항들이 어떤 유혹에 굴복했는지도 보여준다. 『반항인』이 긍정의 계열에 속한다지만, 이 책이 펼쳐 보여주는 근대 이후의 유럽의 역사는 절망적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 형이상학은 극심한 허무주의에 시달리다 테러리즘의 길을 열어 주었다.

 

까뮈는 5장 <정오의 사상>에서 참다운 반항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지만, 역사가 암시하듯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까뮈의 반항인은 ‘아름다운 영혼’을 닮아 있다. 그러나 광란의 밤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잔해를 치우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손이 처음처럼 깨끗할 수 없다. 아름다운 영혼은 더러운 손을 참지 못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지도 못한다. 그에게 가능한 것은 영원한 반항뿐인 것일까? 까뮈의 세 번째 테마, 중용 혹은 사랑의 작품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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