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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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는 나쓰메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관두고 아사히 신문의 전업작가가 되어 '우미인초'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한 작품이다. 1907년, 6월에서 10월까지 '우미인초'를 연재하고 2개월을 쉰 다음, 1908년 1월부터 4월까지 연재했다. '우미인초'는 꽤나 인기를 얻어 백화점에선 '우미인초'란 이름을 붙여 목욕가운을 팔았고 귀금속점에선 '우미인초 반지'를 팔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춘원 이광수가 '우미인초'에 영감을 받아 근대 최초의 장편 소설이기도 한 '무정'을 썼다. 다소 불안한 가운데 시작했던 첫 연재 작품이 성공을 거둔 탓인지 소세키는 두 번째 연재물에선 더욱 과감하게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문학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렇게 해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세계에서 가장 이채로운 빛을 발하는, 때문에 가장 소세키답지 않은 소설로 늘 손꼽히는 '갱부'가 태어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열 아홉의 청년이 죽을 결심을 하고 가출한다. 게곤 폭포나 아사마 분화와 같은 유명한 자살 명소를 찾아 가려고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갱부가 되지 않겠느냐며 접근해 온다. 호기롭게 가출은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더없이 막막하고 외로웠던 그는 별 생각도 않고 그만 승낙하고는 사내를 따라 광산으로 간다. 평생 서생으로만 살아온 탓에 정식 광부는 되지 못하고 조수가 된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정반대인 거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갱부가 되어 남으리라 생각하고 버티지만 결국 폐가 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게 끝이다. 소설은 전혀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점에서 문득 끝난다. 더구나 그 때까지 끌어온 이야기도 이거다 싶은 줄거리가 없을 정도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에 이 갑작스런 종결은 더욱 황망하다. '기승전'만 있고 '결'은 없었던 '풀베개'와 똑같다. 소설은 딱 절반을 잘라 전반은 사내에게 이끌려 광산까지 오게되는 과정을, 후반부는 광산에서 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게 전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완결이 아닌 과정의 소설이다. 결말의 지점에서 마치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오로지 그 하나의 끝을 위해 존재해 온 것인 양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결말을 없애버려 소설의 모든 부분이 저마다 존재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소설인 것이다. 즉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죽음과도 같은 결말 위에서 독자 자신이 거쳐왔던 소설의 시간을 과거로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시간을 지금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재로 만들어 참여하게끔 만든다. '갱부'는 소세키의 그런 의도로 쓰인 소설이다.


 이것은 소세키의 문학관과 연결된다. 앞서 '갱부'는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으로 더욱 밀고나간 작품이라 했다. 그렇다면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건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다. '하이카이적인 것'이란 쉽게 말해 하이쿠를 탄생시킨 원천 같은 것을 말한다. 하이쿠는 바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봉건 체제가 몰락하면서 발전한 '하이카이렌가'가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더불어 점점 형식화되자 바쇼는 그에 반발하여 그것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쿠'가 되었다. 즉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란 형식 자체가 전무했던 본래의 하이쿠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소세키는 평생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서양의 근대에 맞서 일본적인 것을 수호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의 인물이다. 이는 곧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보다 거대한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예로 '도련님'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계 보다는 국수주의에 물들어 점점 제국화 되어가는 일본에 반발해 나온 작품이었다. 그가 하이쿠를 문학의 이정표로 가져온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서양 문학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선망을 가졌던 서양 문학이 곧 종말하리라 예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바쇼를 절망하게 했던 도쿠가와 체제의 '렌가'와 같았다. 그것은 너무 형식적으로 굳었고 그 규격화되다시피한 획일적인 형식 탓에 스스로 아무리 리얼리즘이라 표방하고 있었어도 존재하는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쇼가 그 '렌가'는 렌가가 아니라고 보았듯이 소세키도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의 강의에서 소설가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자신의 심리적, 감각적 체계를 통해서 '비아(非我)'인 세계의 객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서양 문학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지 못했다.


 일단 '나'가 사라져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이룩된 3인칭 관찰자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품이 특정한 상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어디나 널리 통용되는 보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협소한 한 개인이 보고 느낀 것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칭의 이동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시켰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문학은 쉽게 진리를 말하고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로까지 자처하면서 스스로 권위를 쌓아나갔다. 그러자 작가는 독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진실로 작가와 독자는 화자와 청자라는 차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대등한 개인들의 관계일 뿐이었으나 작가와 문학이 진리의 대변자로 자임하면서 독자는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버렸다. 그 수도사처럼 독자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신과도 같은 작가가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해석하는 게 전부였다. 문학이 진정 근대를 이룩한 계몽의 산물이라면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대화와 토론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독자가 할 수 있는 건, 누가누가 작가의 뜻을 제대로 찾아내나와 같은 정답 맞추기 밖에는 없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서 문학 수업에서 자주 들었던 '밑줄 좍'이야 말로 실은 문학이 죽었다는 선포에 다름아니었다. 문학은 그 형식이 권위가 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했을 때 이미 수명이 다했던 것이다.


 서양 문학은 개인을 '개인'이 아니라 '대중'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이 아닌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내 식대로 사는 게 아닌 '보편'적인 방식으로 살게 만들었다. 서양 문학은 개인의 자유와 거기에 뒷받침된 가능성을 보편의 굴레로 구속했다. 그렇게 '국민'을 만들고 개인을 '국가'아래 종속시켰다. 문학이 국민국가의 도래를 가져왔다고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했던 건 이런 이유였다. 당연히 문학의 진정한 사명인 세계의 객관적인 진실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문학이 독자에게 주입한 것은 기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쉽게 보편의 탈을 썼고 '누군가'의 눈과 판단은 '우리'의 눈과 판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눈과 내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이식되어버린 남의 눈과 머리로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소설과 동시에 탄생했다. 사실은 문학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소세키는 그것을 보았다. 문학이 결국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세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의 산물임을 밝히는 것. 그 개인조차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실수도 하며 인간적으로도 좀 모자란 한계 많은 존재로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대변자이니까. 둘은 서양 문학의 규격화되다시피한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그러한 형식으로부터의 이탈이야말로 문학의 진정한 모습이다. 셋은 결코 보편이나 진리를 자처하지 않는 것. 섣불리 다 안다고 주제넘게 나대지 않는 것. 어디까지나 이건 불완전한 한 인간의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래야 독자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카이적인 것'의 실체다.(물론 소세키의 제안에 따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바로 이 '하이카이적인 것'이 '갱부'에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갱부'를 읽다보면 참 많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바로 홍상수의 영화 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그 영화에서 고현정이 분했던 인물은 자꾸 자신을 나무라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이 대사에서 '나'를 '세상'으로 바꾸면 그대로 '갱부'에서 소세키가 독자에게 정말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될 것 같다. 즉 '삶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불확실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섣불리 다 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마라.는 것.



 사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내내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의 진심은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가 분한 인물인 '문호'의 입을 벌려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폭발했던 적이 있다.


 니가 어디서 줏어들은 게 널 고질(홍상수식 조어로 극중에서 문호에게 '교수님 저질 같아요.'라고 말하자 문호는 그럼, 너는 고질이냐? 고질이 뭐냐? 라고 대꾸한다.)로 만드는 게 아냐. 너 책 많이 읽었어? 니가 읽은 그 책들이란 거 있지. 그게 다 죽은 새끼들 찌꺼기야. 니가 믿는 것들이란 다 그런 새끼들의 자기 정당화야. 아전인수야. 알아? 딱 니가 아는만큼만 갖고 애기하는 거야. 마. 우리가 뭘 아니? 뭘 확실히 아니? 왜 꼴값을 해. 씨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통렬하다. 바로 이 말을 나쓰메 소세키는 '갱부'를 통하여 할 수만 있다면 독자나 당대 일본 사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해주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세키는 진심으로 문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갱부'를 과정의 소설(소세키 스스로는 반복적으로 '갱부'는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소설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쓴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때?'하는 식으로.


 '갱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하이카이적인 것'은 바흐친이 소박한 농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밝혀냈던 것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다름아닌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라 정의한다. 쉽게 말해 옛날 조선 시대의 한 장터에서 양반을 조롱하는 마당극을 보고 있는 민중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기존 권위를 풍자하고 해학하여 실추시키고 자신 역시 그 세계에 대등한 참여자임을 각인시킨다. 풍자와 웃음은 그들의 무기이며 연대를 위한 끈이 된다. 마당극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곳곳에서 구경꾼들의 이런 저런 말들도 오고간다. 마당극은 한껏 열려있다. 그런 화자와 청자 사이의 넘나듦이 무한히 가능한 공간이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세계가 있으며 그 모든 세계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마다 존중받아야 하 개체로서.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란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갱부'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작품이다.


 '갱부'는 1907년에 쓰여졌다. 시점을 생각하면 소세키가 '갱부'에 투영한 태도가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바야흐로 일본은 파시즘적인 제국의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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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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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나비, 흰 꽃에

  조그만 나비, 조그만 꽃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기나긴 근심은, 긴 머리카락에

 어두은 근심은, 검은 머리카락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부질없이, 부는 태풍

 부질없이, 사는가 속세에

  흰 나비도, 검은 나비도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나쓰메 소세키의 네번째 장편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바로 이 신체시에서 나온 것이다. 한 여인이 이 구절을 노래로 부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시처럼 태풍 속에 있지 않다. 그녀는 부르조아의 자녀로 태풍으로부터 안전하다. 막강한 재력과 권세가 그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르는 이 시는 그냥 시다. 현실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말들의 무더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들은 그녀와 비슷한 부르조아인 나카노는 시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않는다. 그가 말하는 건 그저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는 것 뿐이다. 삶의 태풍으로 부터 안전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볍다. 사진 한 장의 두께만큼 현실의 무게는 얄팍하다. 얄팍하기에 모든 것이 아름답다. 전쟁의 참화를 찍은 사진도 얇디 얇은 2차원의 평면이 되면 예술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들에게 닥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아름답다. 울타리 너머의 관찰자로서만 만날 수 있기에 어여쁘다. 하지만 지금 태풍 속에 휩싸여 있는 나비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삶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닐 것이다. 그건 오로지 길고도 어두운 근심일 것이다.

 태풍의 날카로운 손톱에 언제 어느때 날개가 짓이겨질지 모르는 그들은.

 

 그런 나비들이 소설에 있다. 이 소설은 주로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말한 나카노라는 남자다. 다른 둘은 도야 선생과 다카야나기라는 나카노의 친구인데, 바로 이들이 그런 나비들이다. 그렇게 소설의 제목인 '태풍'은 등장인물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근심 나아가 절망이나, 누군가에게는 그저 진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하다는 감각에는 모르핀과 비슷한 것이 있다.

 갑각류와도 같이 피부에 살갑게 와닿는 감각이 없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살갗을 떨리게 하는 진짜 경험들이 그대로 휘발되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도 전혀 뜨겁지 않은 브라운관의 화재 장면처럼. 아무런 진정성이 없다. 그러니 영화의 여주인공이 곧 화마에 휩싸일 위기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안심하고 여배우의 코가 성형인지 아닌지 신경쓸 수 있는 것이겠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나비들에겐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브라운관 속 태풍일 뿐이다. 조용한 재즈가 흐르고 있는 방에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기대어 와인을 마시며 보는 텔레비젼 속의 태풍은 리포터가 위기라 떠든다고 한들 그 무게감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어쩌면 한 순간의 흥미 이상도 되지 못할 존재감. 그저 잠깐 피어났다 내리는 비에 곧 떨어지고야 말 꽃잎과도 같이 쉬이 잊혀지게 될 것이니 무엇하려 마음에 담아두겠는가? 하니, 제아무리 나쓰메 소세키가 절박하며 썼다고 하더라도 심드렁해질 수밖에.


 그러니 이 소설의 주역은 울타리 바깥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나비들이다. 소세키는 그들을 위하여 '태풍'을 썼다. 그 역시도 도야 선생만큼이나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일본에 대해 절망했고 스스로를 태풍 속의 작은 나비일뿐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니 결국은 자신을 위로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나비들을 위한 소설이다.


 삶의 무거움에 짓눌리고, 삶의 비루함을 느끼며, 삶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을 위해. 그 때도, 오늘도 여전히 생겨나고 있는, 험난한 태풍 속에 내던저져 언제 뜯겨나갈지 모르는 작은 날개를 힘없이 끌어안고 버터야만 하는 나비들...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을...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중 가장 인기 없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참 보기 힘들었다. 지금 나온 현암사 판본이 국내 초역이니 말 다했다. 그래도 그 오랜 기다림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렇게 근사한 장정으로(실물은 사진보다 더 근사해 보인다. 더욱 좋은 것은 소세키와 태풍에 대한 관련 사진들이 앞부분에 도록처럼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책엔 흔히 나왔지만 지금은 사라진 편집 방식이라 아쉬워하던 것중 하나인데 이를 다시금 되살려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고(古)소설이라 할만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책이 더욱 옛스러운 맛을 간직하게 되었다.) 재회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은 내용이다.(하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이 내게 불만족을 주기란 갑자기 우주에 찻주전자 위성이 나타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읽는 내내 어째 꼭 지금의 나를 위해 나와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내게 세상은 까만 밤과도 같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이었구나 느끼는 중이다. 칸트는 악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들에겐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예외가 되려는 족속들이 바로 악마라고. 바로 그런 악마들의 잇단 출현을 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직과 상식 그리고 진실은 비웃음 거리나 되는 바보들의 미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아바가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고 노래를 불렀다지만 그 말 그대로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THE LOSER HAS TO FALL'이라는 가사 그대로 힘없는 약자는 쫓겨나고 그들의 호소는 자신의 이권이 없으면 도통 열릴 줄 모르는 편협한 귀에 가닿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고등학생 절반이 10억을 준다면 감옥을 가도 괜찮다고 대답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그런 세상이다. 바보들의 미덕을 자신의 신념으로 끌어안고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고 난감한 세상. 그런데 소설 속 도야 선생이 꼭 이와 같았던 것이다.

 

 도야 선생에겐 신념이 있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일본에서 가진 돈이 인격을 말해주지는 않는다고 여긴다. 이 말은 곧 삶이 돈을 추구해서는 초라하다는 것이다. 삶은 보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주어진 도구이며 현재 일본에 만연되어 있는 황금만능사상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그는 갓 부임한 시골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연설한다. 그게 화를 부른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 모두가 애꾸인 세상에서 두 눈을 가지고 보려는 자는 질시와 증오를 받게 마련이다. 돈이 곧 인품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그 지방의 유지들, 비슷한 사고를 가진 교사들이 주동되어 학생들을 선동하고 결국 도야 선생을 학교에서 내쫓아 버린다. 직업을 잃어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졌으나 그는 그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이 그가 가진 신념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대할 수록 그는 오히려 내부의 신념을 더욱 벼린다. 갈고 갈고 또 간다. 노력으로 공부로 더 이상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신념만으로 꿋꿋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가혹한 태풍 속에서 이대로 부서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한 이상향에 도달할 때까지 날개짓을 그치지 않도록.

 

 그는 거울이 아니라 등불이 되려 한다. 누군가의 빛에 의해 비로소 반짝일 수 있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등불. 그래서 오히려 세상마저 그 빛으로 밝힐 수 있는 등불이.

 

 여름밤의 등불이 방황하는 곤충들을 부르듯이 그 빛 속으로 홀연히 같은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고 있던 나비 하나가 날아든다. 그가 바로 다카야나기다. 소설에서 그는 중간자적 존재다. 도야 선생처럼 문학자이며 그처럼 순수한 이상을 품고 있지만 반면 나카노가 가지고 있는 성공과 인정이라는 현실적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어머니 아래서 가난한 고학생으로 생활해온 다카야나기는 언제나 나카노가 보여주는 부의 달콤함 앞에서 주눅이 든다. 문학가로서 배우고 익힌 경험으로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지만 집세를 벌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번역을 억지로 해야 하고 몇 푼의 돈이 없어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없게 될 때마다 그는 새삼 돈의 힘을 절감한다. 그러다 그는 한 잡지에서 우연히 도야 선생의 글을 읽고 광명을 찾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헤아려 대답을 내놓은 듯한 그 글에서 정말 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다카야나기는 도야 선생을 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이 내쫓겼던 중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뿐 아니라 선생에게 선동되어 같이 선생을 내쫓기까지 했으므로 언제고 꼭 사과해야지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도야 선생을 찾아간다. 정확히는 죄책감이 아니라 하나의 지표로서 그를 가까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홀로 독야청청 하여도 얼마든지 태풍 속에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이 소설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방황하는 자,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나온다. 위에서 저런 식으로 줄거리를 말했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모든 작품들이 으례 그렇듯이 독자들에게 어떤 확실한 결말을 주지는 않는다. 다카나야기가 도야 선생을 만난 게 고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고민으로의 열림이듯이.

 

 소세키, 그에겐 동화의 'EVER AFTER' 따위는 없다.

 

 그의 소설 '문'처럼 지금 겨우 겨울을 넘겨 여름이더라도 그 겨울은 또 다시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렇게 삶엔 삼한사온이 있고 사계절이 있다. 어느 땐 이게 진리야 확신하더라도 또 어느 땐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못미더워하는 법. 한 번의 깨달음으로, 한 번의 의지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다. 바람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어제의 해답이 오늘은 오답이 될 수도 있고 그 오답이 또 내일은 정답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소세키는 그의 또 다른 소설, '한눈 팔기'에서 이런 말도 했다.

 

 세상에 정리 가능한 일이란 거의 없다. 한번 일어난 일은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다만 여러 모양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라고.

 

 삶은 그 마음에 무엇을 품었든 늘 시험의 연속이다. 비는 언제 내릴지 알 수가 없고 우산이 꼭 준비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산이 없을 때에도 쏟아지는 폭우를 견딜 수 있도록 그 부단한 시험을 거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연단해 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보면 아마도 도야 선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이상형인 듯 하다. 그렇다면 다카야나기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큰 포부를 안고 돌아왔지만 태풍과 같은 일본의 현실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다모클레스의 칼'인지도 모른다. 다카야나기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흔들릴 때마다 도야 선생을 찾았듯, 나쓰메 소세키 역시 그 품은 신념이 세파에 흔들릴 때마다 마음의 중심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왕좌에 앉을 때마다 자기 머리를 향하도록 위에 칼을 놓아둬 언제 이 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자각했던 다모클레스 왕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신념을 투영시키고 선택한 하나의 모델로서 가지게 되는 소설의 의미는 비단 나쓰메 소세키에게만 한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결이 없는 소설이 바로 우리네 삶의 현실적 모습그대로인 것을 감안한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어쩌면 바로 우리 모두의 모델로써 이 소설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도야 선생의 말들은 소설로 놓고 보자면 그리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한 에세이나 연설문에 보다 잘 어울린다. 더구나 다카야나기가 직접적으로 도야 선생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잡지의 글은 불필요하게 너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이런 식의 문장과 인용이 분명 소설의 미학을 그르친다는 것을 소세키가 몰랐을 리 만무하다. 분명 이토록 무리해서 넣은 것엔 이유가 있을 터. 그건 어쩌면 소설적 재미보다 다른 것을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다카아냐기라 여기는 이들에게 어떤 깨달음이나 격려 같은 것을. 진정 자유로워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이며, 그리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이다와 같은 격려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풍 속에서 힘겹게 날개짓 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데 소세키가 다가와 아직은 이르다면서 내 등을 토닥이며 저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이 책이 나를 위해 꼭 나와준 것만 같았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는 나비떼를 본 적이 있다. 아주 작고 연약한 나비들이었다. 그 먼 거리를 횡단하면서 그들 역시 더러는 바람에 날개가 짓이겨지고 파도의 몸 전체가 휩쓸리기도 했을테지만 날개짓을 멈추거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그 작은 날개로 그들은 바라는 대로 대서양을 건넜다. 그래, 우리에게 태풍으로부터 지켜줄 울타리는 없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리고 이 작은 몸이 어디에 내동댕이 쳐질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게 울타리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오늘 이만큼 왔다고 하더라도 내일 또 어떤 바람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되는 날개짓에 보다 의미를 두며 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영화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가 이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세상엔 발 없는 새가 있어.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다더군. 그 새는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 때는 그 새가 죽을 때야."

 

 이왕이면 나 역시 멈추는 순간이 그 때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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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옷!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이 새로 모습을 바꾸어 나오는 군요. 

번역까지 새로이 해서 말이죠.


당연하겠죠. 무려 40주년 기념판이니까요!

벌써 책이 나온지 40년이 지났군요. 번역만이 아니라 이 40주년을 위해 르 귄이 새로운 서문과 작가 노트까지 썼다고 합니다. '어둠의 왼손'에 실린 머리말이 정말 좋았기에 이번 40주년 기념판의 서문도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더구나 작가 노트까지 있다니!


참고로, 69년 하드커버 초판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일명 겨울이라 불리는 얼음 행성인 '게센'이 무대인데 표지는 그것을 표현한 것 같군요.

저 위에 성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아리코스토르 성' 같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이죠.(참고로 이 그림도 '어둠의 왼손' 커버 중 하나입니다.)


아무튼 두 눈에 하트 뿅뿅 그리는 것은 이만하고...


1976년 미국의 SF 전문잡지 'LOCUS'가 독자들(주로 SF분야 종사자나 골수 SF팬들)을 대상으로 'SF 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를 설문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슐러 르 귄은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에 이어 4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 1975년엔 '최고의 SF 장편'을 설문조사했는데 그 때에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과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 이어 이 작품 '어둠의 왼손'이 3위에 올랐습니다.


물론 좀 오래된 순위이긴 합니다만 어슐러 르 귄이나 '어둠의 왼손'이나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이죠. 물론 그 가치는 지금도 전혀 바래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명한 영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1994년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어둠의 왼손'을 서양 문학의 정전 중 하나로 꼽았고 르 귄은 톨킨보다 더 판타지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켰다고 평했었죠. 그러니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자주 우리 곁으로 오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잦은 귀환 자체가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죠.


아무튼 새로운 판본이 나온다고 하니, 제가 '어둠의 왼손'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어슐러 르 귄을 알게 된 것은 박상준의 '멋진 신세계' 덕분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이 아니고 박상준 작가가 SF의 역사나 작품들에 관한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었는데 덕분에 SF의 좋은 소설과 작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거기서 이 어슐러 르 귄과 '어둠의 왼손'도 만나게 되었죠.


정말 어떤 작품인지 보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나와 주더군요.

그리폰 북스 시리즈 중 하나로.



이것이 바로 그 때 나온 '어둠의 왼손' 모습입니다.

SF 소설 하면 역시 커버 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어둠의 왼손' 커버는 정말 멋졌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커버 때문에라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


보시는 바와 같이 1995년 5월에 나왔습니다. 가격은 지금이라면 '겨우'가 붙을 6천원^ ^

나온 시기가 영화 잡지 'KINO'가 나왔을 때랑 비슷하네요.

'그리폰 북스'랑 '키노' 둘 다 열심히 모았던 것 같습니다^ ^


그리폰 북스의 시작을 연 '내 이름은 콘라드'와 나란히 찍어 보았습니다.

앞에 있는 엽서들은 당시 출간된 그리폰 북스 책에 들어있던 우편 엽서입니다.

그 때는 독자로부터의 피드백을 대부분 이런 엽서로 받았었죠.

이 카드를 작성해 보내면 자동적으로 그리폰 북스 회원이 되고 안내책자와 팜플렛 그리고 신간 정보를 받을 수 있다고 엽서에 나와 있네요.

한 번 보내볼 걸 그랬어요^ ^ 
 


뒷 날개에 적혀 있는 앞으로 출간될 책의 리스트들.

'어둠의 왼손'이 첫 출간 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리스트들을 보고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이 '멋진 신세계'에서 좋은 작품으로 언급된 것들이라 더욱 그랬죠.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있고 아직 나오지 않은 것도 있네요.
아무튼 이 리스트 하나만큼은 SF의 필독서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뒷 모습

 

어슐러 르 귄의 모습과 작가 설명 그리고 간략한 책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어둠의 왼손' 1969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SF 상의 양대 산맥인 네뷸러와 휴고상을 동시에 석권했죠.

하나 타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1974년에 어슐러 르 귄은 '빼앗긴 사람들'로 다시 한 번 네뷸러와 휴고상을 동시에 수상하게 됩니다.

괴물 같은 작가죠, 한 마디로...

 

 개인적으로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머리말을 꼭 읽어보시라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어요.

 

 어슐러 르 귄이 SF 소설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썼는데

 정말 잘 썼습니다. 우리가 왜 SF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입니다.

 

 도대체 무슨 글인데? 하실 분들을 위하여 살짝 인용해 볼까요?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 과학소설은 은유이다. 이 과학소설을 고전적인 허구 형태와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현대생활의 골격을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 - 그 가운데는 과학, 즉 각 분야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관점 등이 있다 -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주여행은 이 은유들 중의 하나이다. 대체역사도 그렇고, 대체 생물학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허구화된 미래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은유한 것인가?

만일 내가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도 물론이다. 그리고 조금은 장엄한 투로, 이 소설의 주인공 겐리 아이가 나와 당신에게 진리란 상상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내 책상에 앉아 잉크와 타자기의 리본을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P. 11) 

 

 이런 글입니다. '이 정도로 뭘~?' 하신다면 분명 전체를 읽어보면 다를 것이다라는 말을 꼭 드리고 싶네요. 인용한 글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진리란 상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르 귄의 SF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죠. '어둠의 왼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저 말처럼 뒤흔들고 있지요. 결국 르 귄의 SF도 독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자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란 이름으로 우리의 머리와 몸을 가두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해방시키고자 한다구요.

우리에게 얽혀 있는 모든 관습적인 사고와 편견의 사슬을 은밀하게 푸는 '어둠의 왼손', 그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파세의 이 말 그대로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예견되지 않은 것, 증거되지 않은 것.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이 행동의 근거입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증명되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게 됩니다. (...) 내게 말해 주시오, 겐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또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무엇을 피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로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답될 수 있는 질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는 '불확실성'입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 바로 그 한 가지 인 것입니다.(p. 93 ~ 94)



 


 '어둠의 왼손'은 르 귄의 대표 시리즈인 헤인 시리즈의 대표작입니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도 그 헤인 시리즈에 속하는 단편집이죠. 처음으로 소개되는 헤인 시리즈 작품이라 역시 많이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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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카버의 아우라를 느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하루키는 카버의 여파를 자기 스타일로 잘 소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드디어 카버의 아우라가 듬뿍 느껴지는 단편을 만났다. 그냥 누가 쓴 것인지 모르고 만났다면 '이거 혹시 카버 소설 아니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바로 '도쿄 기담집'에 두 번째 단편인 '하나레이 해변'이다.


 카버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상실의 파문' 같은 것이었다. 카버의 세계란 썰물에 끊임없이 모래가 쓸려나가는 해변이랄 수 있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열심히 달리다 보니 문득 자신이 허공 위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만화영화의 캐릭터처럼 어느 순간 시간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으며, 소중한 존재를 잃었고, 자신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카버가 해부하는 것이 '상실' 자체는 아니었다. 카버에겐 바로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 상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카버의 소설은 화두처럼 던져진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여정이었다.



 '도쿄 기담집'도 그랬다. '도쿄 기담집'엔 다섯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물론 '기담'이라는 것은 아니다. 바로 '상실'이다. 다섯 개의 '기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잃고 있는 중이다. 소설 어디를 펴 보아도 우리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는 세번 째 단편 제목 그대로 상실이 도래했음을 보게 된다. 카버처럼 하루키도 상실의 물방울이 삶이라는 수면으로 떨어질 때의 그 접촉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하루키의 돋보기가 향하는 곳은 그 접촉이 바깥으로 그려내는 파문의 무늬다. 처음의 진한 아픔을 동반한 선명했던 파문의 동심원이 어떻게 차츰 묽어져 다시 고요한 삶의 수면과 하나가 되는지, 그것이 하루키가 들려주고자 하는 기담이다.


 혹은 그래서 정말 '기담'이다. 도저히 잊힐 것 같지도 않고, 극복될 것 같지도 않을 상실이 어떻게 하다 보니 껴안고 살면서도 더 이상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사납게 울부짓던 바다가 아침에 보니 언제 그랬나 싶게 잔잔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상실을 잉태한 삶도 결국엔 그렇게 되기에 '기담'인 것이다.


 "제가 한 가지, 부인에게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요." 사카타라는 초로의 경관은 헤어지는 참에 사치에게 말했다. "이곳 카우아이 섬에서는 이따금 자연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곳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때때로 거칠고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런 가능성과 함께 여기서 살아갑니다. 아드님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부디 이런 일로 우리 섬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인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중략) 대의가 어떻든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p. 51~52)


두 번째 기담인 '하나레이 해변'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기담의 주인공 사치는 오래전에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런 아들이 서핑을 하러 하와이에 있는 하나레이 해변에 갔다가 거북이를 쫓아 해변까지 들어온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놀란 나머지 익사해 죽는다. 소식을 듣고 놀란 사치는 바로 하와이로 달려왔고 아들의 시신을 인도받기 위해 찾아간 경관에게서 저 말을 듣는 것이다. 사실 읽다보면 경관의 이 말은 다소 맥락없이 느껴진다. 불현듯 어디선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린 테니스 공 같기도 하다. 아마도 경관은 머나 먼 타국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려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말은 꼭 그것만은 아니라 하루키가 사치처럼 언제 뜻하지 않게 상실을 안게 되어버릴지 모를 독자에게 보내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핑 장소인 '노스 쇼어'에서 가장 커다란 곳이 바로 '하나레이 베이'이다.

           큰 파도가 많아 서브 포인트가 정말 많아서 서핑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사실 저 말은 소설의, 아니 같은 상실을 다루고 있는 '도쿄 기담집'의 주제라 해도 좋을 정도다서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게 서핑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삶의 의미를 오로지 거대한 파도를 서핑하는 것에 두고 있는 패트릭 스웨이지는 이제 겨우 서핑을 시작한 키아누 리브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탈 수 없어.' 결국 '도쿄 기담집'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나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한데 이 소설은 상실이 주는 아픔을 과장하지도 않고, 상실을 억지로 피하려 하거나 극복할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이라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근다. 그대로 가라앉아서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하지만 버둥거리지 않는다. 조용히 바닥으로 이끄는 중력의 손길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소설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스쳐 지나가는 물결과 하나가 되는 시간. 거부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침전.



 서핑과 같다. 파도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지 않으면 파도를 잘 탈 수 없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활의 명수인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말한다. "바람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극복은 바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걸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말하는 상실의 치유도 그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상실에 극복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을 극복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다. 카우아이 섬 경관의 말처럼 늘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은 그러나 자연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위험이나 상실마저 모두 자연의 순리 안에 있는 것이라 여긴다. 사치는 아들을 화장한 뒤,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해변으로 간다. 경관의 말대로 하나레이 해변은


 몇 년 전에 들이닥친 거대한 태풍 탓에 섬의 수목은 대부분 크게 변형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지붕이 날아가버린 목조가옥의 흔적도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산의 형태가 변해버린 곳도 있었다. 자연이 혹독한 땅이었던 것이다.(p. 53)


 하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유롭게 살고 있었고 하물며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죽은 서브 포인트조차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서퍼들은 여전히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사치는 아무래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치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상어가 무섭지도 않은가. 아니면 내 아들이 며칠 전에 이 자리에서 상어 때문에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일까? (p. 53)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사치조차 모래사장에 앉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나리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방금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왔는데도 그러하다.


 사치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런 광경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았다. 윤곽이 잡히는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무게를 지닌 과거는 어디론가 어이없이 사라져버렸고 미래는 아득히 머나먼 어둠침침한 곳에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그녀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이행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주저앉아 파도와 서퍼들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반복의 풍경을 그저 기계적인 눈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구나. 그녀는 어느 시점에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p. 53 ~ 54)


 거대한 태풍이 할퀸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고 갑작스런 상어의 출몰로 아들이 익사한 '하나레이 해변'은 사실 상실을 안고 있는 삶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루키는 상실을 안고 나아가는 삶을 '하나레이 해변'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치는 오래도록 거기에 머무는데 그건 그대로 상실을 억지로 피하거나 쳐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앞서 말한 조용히 가라앉는 '침전'인 것이다. 사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간도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특별히 가라앉는다는 말을 쓰는 것은 온 몸이 젖어 그만큼 물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상실을 받아들임은 바로 그러한 젖음이다. 그런 상태로 하지만 단조롭게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시간. 그것이 사치가 원했던 시간이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런 시간을 준다.


 하여, '하나레이 해변'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치는 거기서 삶에서 무엇하나 원하는 것이 없었던 그녀가 그나마 가장 좋아했었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음악실에서 재미삼아 쳐보고 매료되었던 피아노는 결국 그녀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한 때는 타고난 엄청난 재능에 비해 독창적인 면모가 부족하여 프로 피아노 연주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그만 지금까지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일까?


 하루키가 사치에게 하필이면 '피아노 연주'를 가지고 온 것은 그것이 아들의 '서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핑이 부드러운 곡선의 파도를 타는 것이라면 피아노 연주는 부드러운 곡선의 선율을 탄다.


 한 마디로 피아노 연주란 손으로 하는 서핑이다. 이런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 때문에 하루키는 사치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다 둘은 행위의 단조로운 반복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퍼들을 본다. 그들처럼 사치 역시도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친다. 사실은 그게 바로 그녀의 재능이다. 무심하게 쳐가는 것. 이러한 사치의 재능은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건반 위에 열 개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툭 트였다. 그것은 재능이 있고 없고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다. 아들도 아마 파도를 타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사치는 상상했다.(p. 70)



 바로 이것이 하나레이 해변이 가진 치유의 힘이었다. 아들의 서핑도, 사치의 피아노 연주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조로운 반복. 그 단조로운 반복의 궤도가 결국엔 상실이 안겨준 절망에서 스스로 기어나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리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나오는 주인공 쓰쿠르이다. 쓰쿠로도 사치처럼 아주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다. 완벽한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모임에서 혼자 버려진 것이다. 그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절망했지만 결국 그 어둠에서 헤어나오게 만든 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쓰쿠르는 그 단조로운 반복을 성실히 행했고 그러다 끝내 그 아픔을 무심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소설이 쓰쿠르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순례라고 한다면 진짜 치유는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 치유는 다른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쓰쿠르가 바로 사치의 연장이라는 걸 이제 깨닫는다. 아마도 사치가 없었다면 쓰쿠르도 없었을 것이다. 사치와 쓰쿠르라는 분신을 통해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바라는 치유란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리라.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와도 같이.


 상실을 주는 삶은 치유도 준다.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모든 것엔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조르주 깡길렘이라는 프랑스 학자에 따르면 질병도 사실은 치유를 위해 몸이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징후라고 한다. 삶에는 저마다 자기 치유 능력이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시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상실을 그토록 힘들어하는 것은 어떤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둘러 이 상실감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얼른 이 모든 상실로 인한 아픔들을 없던 것으로 지우고 싶다.'는 바로 그 마음이 상실을 가시처럼 여기게 만들고 상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성급하게 지우려해도 그렇게 안되는 것이 상실이다.


 뜸을 들여야 제대로 된 밥이 되듯이 상실에게도 저마다 필요한 기간이 있다. 사치가 아들에 대해 고백했듯 한 인간으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듯이 이별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그건 온전히 부정의 경험만이 아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분명히 보여준다. 상실이 어떻게 또 다른 새로운 삶의 다음 문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상실로 인한 그 침전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시간들을 삶은 또 어떻게 마련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레이 해변'은 기담의 장소가 된다. 부정을 받아들이게 하여 더 커다란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 상어가 있지만 상어를 더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너희, 하나레이에서 상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치?"

 "거기, 상어 있어요? 진짜로?"

 "있어." 사치는 말했다. "진짜로." (p. 81)


 이러한 하나레이 해변을 하루키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의 삼 주일 동안 하나레이에서 지낼 일을 생각한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아이언트리의 술렁임을 생각한다. 무역풍에 휘날리는 구름,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가는 앨버트로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게 현재 그것 말고는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레이 해변. (p. 82)


 하지만 하나레이 해변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당신의 삶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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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특허 표류기
이가라시 쿄우헤이 지음, 김해용 옮김 / 여운(주)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제조업과 같은 전통 분야의 산업들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달았다는 분석이 많다. 언론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무한정 늘어날 것이라 설레발을 치지만 연구에 따르면 벌써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더이상 파이는 늘어나지 않는다. 그 때 활로를 뚫어줄 것이라 기대되는 분야가 바로 '바이오 산업'이다. 대표적인 차세대 유력 분야인 바이오 산업은 과연 그에 걸맞게 왕성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2007년 3조 7천억이었던 바이오 산업이 2011년엔 6조 6천억의 시장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한국만 해도 이러하니 전세계적으로 보자면 얼마나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을까? 안 봐도 비디오다. 사실 바이오 산업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 수익 대부분이 '특허'를 통해 보장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특허'를 가지고 있어야 수익의 현실화를 도모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 인체 곳곳이 특허의 대상이다. 그 중 인간의 유전자는 특허를 얻기 위한 각축전이 가장 치열하다. 한 마디로 우리 몸 자체가 바이오 산업에서 보자면 특허의 전장터인 것이다.


 이가라시 쿄우헤이의 '인체특허 표류기'는 그러한 현실의 단면과 그 그늘을 추적하는 책이다. 원래 그는 NHK의 다큐멘터리 PD로 2001년에 '인체 특허'란 제목으로 유전자 특허와 관련된 산업의 명암을 그려내 일본의 문부과학대신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그 내용과 그 이후의 것까지 포함하여 한 권의 내용으로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유전자가 뭐길래 특허 때문에 그 난리가 나는 것일까 생각하실 분들을 위하여 잠깐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면 이러하다.


 'CCR5'란 유전자가 있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는 저 혼자 에이즈를 인간에게 감염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세포 표면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는데 바로 그 도움을 주는 것이 'CCR5' 유전자라 한다. 이 유전자는 우리들 세포 표면에 있다. 문제는 HIV와 이 CCR5가 정확히 들어맞아야 우리 몸 안으로 HIV가 들어와 에이즈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HIV와 CCR5를 열쇠와 열쇠구멍으로 표한한다. HIV가 열쇠라면 CCR5는 열쇠구멍이다. 열쇠와 열쇠구멍이 제대로 들어맞아야 문이 열리듯이 HIV와 CCR5도 제대로 들어맞아야 HIV는 우리 몸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CCR5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그 형태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면 HIV는 결코 우리 몸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즈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간단하다. 열쇠구멍이 되는 CCR5를 바꿔버리면 되는 것이다.


사실 에이즈 치료 연구는 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CCR5' 유전자는 과학자들 혼자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한 사람의 자발적 신고로 이루어졌다. 그 장본인은 바로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스티브 크론이란 화가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성적 성향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에이즈에 감염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감염되지 않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발적으로 연구소를 찾아가 자신의 혈액을 제공했다.


 그 제공된 혈액 덕분에 연구팀은 에이즈 치료의 획기적 대안을 제공할 'CCR5' 유전자를 찾은 것이다. 만일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다면 그 수익은 천문학적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제공했던 당사자인 스티브 크론은 그 수익을 하나도 얻지 못한다. 특허권자에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스티브 크론에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가 혈액을 제공했던 것은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이즈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인류 때문이었으니까. 자신의 혈액으로 많은 이들이 에이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면 그것으로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연구소의 기업이 'CCR5'의 특허권을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된 수익은 오직 그 기업만의 것이며 다른 연구소가 더 좋은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그것을 연구하려고 해도 그 기업은 특허권을 이용해 막을 수 있다.


 스티브 크론의 바람과는 반대로 오히려 특허권이 인류가 에이즈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장애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어둠을 정말로 잘 보여준 사례가 있다. 그것 역시 유전자 특허권 때문이었는데 바로 'BRCA1'이란 유전자다. 여성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안젤리나 졸리 때문에 유명해진 유전자이기도 하다. 2013년 5월 14일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미국에서 있었다. 브래드 피트의 아내이자 '툼레이더'로 유명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도 아니면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바로 'BRCA1' 유전자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죽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그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받았는데 그녀에게 BRCA1이란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유방암이나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저의 경우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87%이며, 난소암에 걸릴 가능성은 50%라고 했습니다.(P. 136)


 그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유방을 절제했다. 사실 BRCA1 유전자의 발견은 유방암으로 고통받거나 고통받을 지도 모를 여성과 소수의 남성들에게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책에 따르면 남성도 유방암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남성의 4% 정도는 유방암에 걸린다고 한다.) 특히나 잠재적 유방암에 있어서는 획기적이었다. 유전자 검사로 BRCA1이나 BRCA2 유전자 존재의 확인 유무를 통해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방암의 가능성을 손쉽게 점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전자의 검사가 거센 환영을 받을 것은 당연해 보였다. 유방암의 소멸이라는 장밋빛 미래도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특허권 때문이었다.


 BRCA1과 BRCA2의 특허권이 모두 '미리어드'라는 미국의 한 벤처 기업에게 있었던 것이다.(참으로 이상하게도 대부분 유전자의 특허권이 이런 벤처 기업들에게 있다.) 그 기업은 재빨리 이 유전자의 특허권을 미국에서 인정받았고 그 특허권을 바탕으로 바로 독점권을 행사했다. 그 유전자를 소재로 한 모든 연구는 중지되었고 유전자 검사 또한 미리어드가 지정한 병원에서만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비용 또한 유관 기관에게 천문학적인 액수를 요구했다. 그 모든 건 당연히 환자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리어드는 획기적인 치유로 나갈 수 있었던 진로를 탐욕과 독점으로 망쳐버린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허권엔 이런 어둠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어둠이 막대한 수익을 보장한다. 그것도 언제까지나. 그러니 바이오 기업들은 앞다투어 이 어둠을 소유하려 달려든다.


 여기서 우리는 스티븐 크론의 분노에 찬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유전자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인류 전체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유전자 특허를 취득한 사람이 그것을 독점해도 괜찮을까요? (P.24)


 이 책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의 독점으로 오히려 치유에 장애가 되는 유전자 특허권을 과연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될까하고 묻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여기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이 유전자 특허권에 앞장서고 미리어드와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지적재산권을 만들고 그것을 널리 유포시키려 애쓰고 있는 미국이다.


 생명체에 대해 특허권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것도 바로 미국이다. 1972년 6월에 그 일은 일어났다.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연구원이었던 인도인 아난다 차크라바티는 당시 잦은 유조선 사고로 바다가 원유에 오염되자 그 원유를 미생물을 통해 정화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원유를 분해하는 미생물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미생물의 특허를 신청한 것이다. 처음 미국의 특허를 관리하는 특허상표청은 그 신청을 기각했다. 당시 특허법 101조는 특허의 대상을 어디까지나 생물이 아닌 조성물이나 제조물에만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없었던 것을 새로 발명한 것은 인정되었지만 미생물이 생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음으로 기각되었다. 차크라바티는 항소했다. 특허항소법원은 차크라바티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허의 강조점을 생물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없은 것을 만들어낸 것에 두었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생물이라는 사실은 특허법의 목적으로 보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P. 164)


 그들은 결국 이렇게 판결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미생물은 특허법 101조에 따라 특허의 대상이 된다. 심리의 대상이 된 미생물은 제조물 또는 조성물에 해당한다.(P. 165)


 이렇게 하여 세계 최초로 생명에 대한 특허가 인정되었다. 그들은 생명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두 특허의 대상으로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유전자와 같은 생명 특허는 거침없이 확장되어갔다. 지금은 그 권리가 더욱 넓혀져 과정 일체에 포괄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본특허까지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더욱 나아가 약의 조합과 투약 방법까지 특허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뜨겁게 공방 중이기까지 하다.


 유전자는 발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신체에 본래 있던 것으로 발견의 대상이다. 약의 조합이나 투약 방법 역시 발명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허의 대상으로 삼으려 치열하게 로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름아닌 독점을 통한 고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오 산업에 있어 하나의 특허권엔 반드시 기다란 암울의 그림자가 뒤따르므로 여기엔 상세한 권리의 바운더리가 만들어져야 하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킨 미국은 수수방관이다. 사실 그들의 관심 영역도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끊임없이 유포하고 주장하고 있는 지적재산권이야말로 미국의 가장 커다란 수익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득에 점점 눈이 멀어 무분별한 특허권의 남용이 가져올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방치되어서는 안되는 위험이다. 왜냐하면 질병은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 특허권에 따르는 위험은 언젠가 결국 우리 모두의 위험이 된다. 더구나 바이오 산업이 한창 성장 중이다. 이제 우리의 또 어떤 부분이 특허의 대상이 되어 연구와 치료에 어떤 제한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 같은 위험을 막으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다. 특허권을 그가 진정 봉사해야 할 대상인 인류의 공영을 위해 쓰여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정당한 사용을 고취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자체도 흥미롭지만 결코 모르쇠할 수 없는 문제라서 더욱 귀기울여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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