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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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작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이가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책들을 헤아리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실은 우리 불안의 응답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책을 구매하려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불안을 긍정하게 만들고 정당화시켜 주는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내용이 있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며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경쟁의 고도화와 유연화로 관계가 파편화되고 개인이 점점 고립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인, 바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대해서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불안은 사회에서 당연하며 그러므로 부정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위적 체험이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미움을 받으라고 말해주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불안을 가진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던 대답, '넌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넌 네 자신을 긍정해도 돼!'를 그 책이 쉽고 설득력있게 들려주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해 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자르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말해주는 것을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그 응답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것이 원인이 된 불안 속에 끊임없이 떨고 있냐고 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야마다 히로키에게 묻는다면 거대 이념의 종말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대 이념의 퇴조로 이제 모든 평가를 오롯이 개인이 감내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하와 불안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자면 이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거대 이념의 붕괴 이후 패권을 차지해버린 신자유주의가 명확히 의도한 결과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목적이 오로지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시장에서 당하는 결과에 대해 그것이 의도든 불운이든 사회가 전혀 책임지지 않듯이 그렇게 한 개인이 당하는 모든 위험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또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듯 개인 역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이다. 즉 개인은 이제 사회에게도, 노조에게도 기댈 수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오로지 홀로 파악하고 관리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와 같은 푸코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덩달아 불안도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우리를 너무도 옥죄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긍정해 줄 무언가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상적이거나 허약하지 않다. 생생한 힘으로 구체적이면서 물리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문 또는 그것을 주로 만나게 하는 통로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호사가의 취미라든가 정보 축적만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는 말을 낳은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고대 문헌 학자가 그랬듯이 몇 백년간 지속된 중세의 어둠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낼 힘도 얼마든지 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자기 정당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호 심화되는 이런 질곡이 힘겹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기대야 할 것도 오로지 언어, 담론 밖에 없다. 언어가 불안과 절망을 가져왔으나 구원 역시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수록 읽어야 한다. 그 언어들을 매개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지금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전을 만나야 한다. 탈옥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주인공이 감옥 전체의 지도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이렇게 탈출에는 내가 지금 갇혀 있는 장소를 전체로 조감할 수 있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것을 고전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많이 다르거나 혹은 지금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유인 지라 동시대의 담론들 보다 훨씬 더 내가 갇힌 이 시대의 외곽을 잘 드러내어 그 안에 담긴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우리에게 자유 정신의 힘을 준다'라고. 그 자유의 힘이란 바로 현실이 가진 중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바깥으로 데려가는 힘, 그리하여 객관적인 시야로 시대를 조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우리를 넘어서 나아감과 해방된 공간에서 홀로 던지는 시선이 이하준이 말하는 '대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유를 향한 월담과 해갈을 위한 대화를 체험해 보기에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일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 책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사랑', '관계' 그리고 '삶'인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연속성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나'에서 나아가면 '타인'이 있고, 그 '타인과의 함께'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연쇄와 집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확장의 경로인 것이다.


 그 확장의 경로를 따라 철학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철학자의 담론에 저자 자신의 담론을 가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의 담론은 삶에서 우리가 가지거나 만날 수 있는 질문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세계와 윤리에 대해 대부분의 의문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다고 현학적이진 않으며 담론이 추상적 차원에 갇히지 않도록 구체적인 현실 문제와 연계되도록 하고 철학자의 언어도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급적 일상적인 어투로 순화하고 있다. 초심자를 많이 배려하는 책이며 그러므로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입문에 그치진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써의 완결성을 엄연히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으로 고전의 대화가 어디로 데려갈 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을 확장의 경로인 네 파트의 제목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는 주체로 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찬양은 고독의 향유를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즐겨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뒤이은 니체의 '초인'은 초인의 의미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정과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라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엄습하는데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동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강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동경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 이런 식으로 왜 먼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밀의 '용기와 관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스의 '외부의 자극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내심의 평정' 마지막으로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숙고'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랑'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먼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롬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적 사랑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이 양자의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체'로 서기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타자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왜곡된 애착에 있다(P. 10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은 칸트와 마지막 아도르노에게서도 확인되며 특히 울리히 벡 부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계를 파현화 시키는 지금 사회의 유연화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때문에 저자는 독립된 주체의 성립을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의 긍정을 통해 자신을 먼저 내려 놓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나 자신의 긍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은 '관계'와 '삶'까지 주욱 이어진다. 현실적인 관계 양상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거기에 과연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재검토되고 '삶'에 가서는 누구나 겪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과 '노년' 그리고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경험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의미 짓는다. 그리하여 경로 전체를 통해 온전히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나로 하여금 그토록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줄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 확고한 자리로 우리를 넌지시 데려간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제안은 꽤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신자유주의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 스스로 항상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데 있고 그런 관리는 우리도 경험상 잘 알고 있듯이 많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의 소비는 어디까지나 과시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 바 있듯이 실제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라캉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조차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비극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견주어 날 볼 수밖에 없고 항상 나보다 뛰어난 존재들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내 모자람과 부족으로 인한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또한 이런 시선은 언제나 우열의 휘장을 두르기 마련이다. 나와의 높낮이에 따라 질시와 경멸의 시선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서 사회적 보호막을 벗겨내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으로 이끌어가려 하는데 이런 개인의 '기업가화'는 그것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그들의 눈이 아니라 온전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층위에서의 나와 만나는 타인에 대한 차이의 긍정 또한 진정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면 기필코 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이런 태도와 노력의 당위성을 조용히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쉬운 내용과 평이한 서술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감 같은 것이 떨어지길 바란다. 언제나 감처럼 부와 성공 같은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것들이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 자신 보다는 늘 외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에 종속되었고 점점 기울어진 중심으로 인해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 지를 고찰한다면 언어가 오히려 현실과 물리적인 것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법만 봐도 자명하다. 지금 우리의 절망을 낳은 것도 기실은 언어고 구원을 위한 진정한 힘도 언어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이 고전이 만능 열쇠인 것은 아니다.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상식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의 내면을 신선한 시야와 사유로 가득찬 처녀지로 바꾸는 데 있어 고전만큼 좋은 자극은 없는 것 같다. 고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시대상의 간격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과학적 진리라고 해도 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형성한다는 것을. 간격은 그 패러다임의 막을 찢고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그리로 자유로운 상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오래된 생각'은 그런 자유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 정당화를 향한 목마름을 진정 가시게 해 줄 우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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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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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라마구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노래, '카인'. 신약을 인간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했던 '예수복음'에 이어 다시 한 번 똑같은 입장에서 구약을 재해석 한 것이 바로 '카인'이다. 이 소설의 목적은 '예수복음'이 그랬듯, 구약을 지배하는 신성의 기운을 말끔히 지우고 아주 인간적인 입장에서 독재적이고 무자비한 여호와에게 항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변호랄까. 그 변호인이 되는 것이 바로 '카인'이다. 그렇다고 소설에 카인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제사, 또한 바벨탑과 욥기 거기에 노아의 방주까지, 구약에서 유명한 이야기는 다 나온다. 그런데도 왜 '카인'인 것일까? 의문이 당연히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인이 최초의 선악과 사건만 빼고 모든 사건에 다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카인만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구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비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왜 카인을 그 모든 사건에 다 참여시켰던 것일까? 이유는 카인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최초로 거역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라마구가 카인에게 인간의 변호인 역할을 맡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역한 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서에서 자발적으로 탈주했기에 그에 항변하여 인간의 입장을 변호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어 거역한 아담은 왜 자격이 안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자발적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담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하와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진정한 자발적 거역자는 하와였다. 사라마구는 그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여기에 또 한 번 더 가질 수 있는 의문, '촉발이라고 한다면 뱀이 먼저가 아니냐?'에 대한 대답과도 같이 이런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낙원에는 뱀이 없다. 주여, 낙원에 뱀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거기에서 뱀이 나타나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래서 나는 말했죠. 아니, 그렇지 않아. 오직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 먹을 수 없어. 그걸 만지면 우리는 죽으니까. 뱀은 말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쉭쉭 하는 소리나 낼 뿐이지. 여호와가 말했다. 내 꿈속의 뱀은 말을 했어요.(p. 18~19)


 이렇게 사라마구는 여자의 거역이 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 의지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하와의 모습 혹은 위치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여성의 자리는 소설 전체에 걸쳐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아의 며느리처럼 가부장제에 완전히 포섭된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성적 질서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자리해서는 남성과 대등 혹은 더 우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와가 그렇고 나중에 카인이 만나는 릴리스도 그러하다. 그런데 구약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 릴리스란 이름에 좀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구약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릴리스란 이름이 적어도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릴리스란 이름이 참 재밌는 것이 원래 아담의 첫 아내로 알려진 여자의 이름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잘 읽어보면 모순된 점이 보인다. 1장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2장에선 여자가 아담 이후에 창조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 때문에 옛 신학자들은 아담과 동시에 창조된 여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그녀의 이름을 릴리스라 지었다. 그들이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 이름이 당시 전승된 많은 서양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여 남자를 유혹하여 파괴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팜므파탈의 대명사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와와 릴리스는 여호와와 대척점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여호와가 대변하는 남성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존재들 말이다. 일부러 전복이란 단어를  쓴 것은 릴리스의 행위 때문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은 아담과의 잠자리 위치 때문이었다. 릴리스는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계속 아담의 아래에서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항변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인류 최초의 저항자가 되었다. 육체 상하의 자리바꿈이니 문자 그대로 전복인 것이다.


사라마구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릴리스는 카인이 살인 후 최초로 가게 되는 도시에서 여왕으로 군림하여 그녀의 거처엔 남편조차 그녀의 허락을 얻고서야 들어올 수 있는 것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남성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그녀는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마음껏 과시한다. 릴리스의 전복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릴리스의 거처는 절대적인 여성 해방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카인이 누군가 자신을 위해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방에 벽을 쌓아 성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카인은 인류 최초의 도시 건설자였던 셈이다. 도시는 인간 문명의 대표적 산물이다. 에덴 동산이 온전한 신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온전한 인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신과 카인이 대척점이듯, 에덴 동산과 도시는 정반대에 자리한다. 도시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모두 여호와에게 파괴당한다는 점에서도 이 같은 특성을 거꾸로 강조하고 있다. '살인한 남자'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역한 인류 최초의 존재인 카인이 만든 도시를 릴리스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카인이 릴리스가 대표하는 질서에 속해있으며(다시 말해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하와가 했고 릴리스도 했던 독립된 주체를 갈망하는 인간주의적 항변에 참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구나 그 릴리스의 공간에서 카인은 기꺼이 스스로를 종속된 존재로 자처하여 여호와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여호와는 남자를 지배자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인이 남자라는 게 중요해진다. 그는 여성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질서를 전복하며 '여성화된 남자'가 되어 여호와 질서의 구멍을 만든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곳곳에서 카인은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엔 여호와 질서 자체를 자신의 구멍 안으로 삼켜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쓴 바와 같이 난 '카인'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정치적 의미도 투영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 속 여호와는 아무리 봐도 독재자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 때, 생각나는 소설은 사라마구의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다시 창궐하는 우익을 우려의 시선으로 보는 소설로 지금과 같은 우리나라 상황에선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사라마구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우익이 다시금 창궐하게 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 난감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 바로 '눈 뜬 자들의 도시'이다. 내 생각에 '죽음의 중지'나 '예수 복음' 그리고 '카인'과 같은 일련의 성경 재해석은 바로 이 난감을 가져온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혼돈을 먼저 겪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안내서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엔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그것을 집약한 존재가 바로 카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카인'은 '눈 뜬 자들의 도시' 이후 그가 찾아온 길의 모범 답안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라마구, 그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한 셈이다. 카인의 태도에 대해선 앞에서 내내 얘기했으니 여기서 다시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한 번 직접 읽어보시라는 한 마디로 족할 것 같다. 그러면 명확하게 아시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 왜 사라마구가 카인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천명했는 지도.


 소설은 사라마구의 마지막 노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나 아쉽게도 짧다. 읽기엔 별 부담이 없다. 거기다 너무 재밌다. 아마도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 시간 사라마구의 소설을 읽어 온 한 사람으로서 기꺼이 추천드리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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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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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닝 만켈의 백조의 노래, '불안한 낙원'을 읽었다. 내게 이 작품은 조국 스웨덴을 떠나 오래도록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그 자신의 마음을 많이 투영한 것으로 보였다. 헤닝 만켈은 자신을 세계적 거장의 위치로 격상시켜준 장본인인 '발란더' 형사 시리즈로 유명하다. 스웨덴에선 이미 여러 차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영국에서마저 케네스 브래너 주연의 드라마로 방영될만큼 인기와 작품성이 검증된, 말하자면 전세계적으로 성공한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 '얼굴 없는 살인자'는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한 부부의 살인사건을 출발점으로 하여 스웨덴에서의 극우의 부상과 더불어 점점 늘어나는 인종 차별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시리즈를 시작했던 헤닝 만켈은 그 뒤로도 시리즈 내내 꾸준하게 인종 차별이란 주제를 이어갔는데 그런 이유로 헤닝 만켈이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것도 어쩌면 인종 차별의 부상으로 드러나 버린 스웨덴의 민낯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무엇보다 이번에 '불안한 낙원'을 읽고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여성, 한나 뢴스트렘 또한 헤닝 만켈처럼 스웨덴에서 아프리카로 떠난다.1904년. 그 때는 스웨덴에 굶주림이 만연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기근이었다. 산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한 명의 입이라도 덜려는 어머니에 의해 도시로 떠나라고 강요 받는다. 가족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한나는 선뜻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내 앞날이 어떨지 전혀 모르겠어요."(p. 42)


 이 말을 하기 전에 한나는 엄마 엘렌에게 바다에 대해 묻고 있었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바다를 본 아버지는 그저 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라는 커다란 세계, 그리고 그것의 정체 불명은 그대로 가족이라는 폐쇄적이고 작은 세계를 떠나 더 크고 한껏 개방되어 있어 그만큼 정체가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 도시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은연 중 반영한다. 여기서 더 주목할 지점은 가정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거기는 이방인들이 가득한 도시이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바다는 그것을 좀 더 강조한 공간이다. 바다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나의 진짜 두려움이 정작 거기에 있다는 게, 바로 다음의 말에서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될까요?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될까요?"(같은 곳)


 그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공존이다. 이것은 그대로 인종 편견에 사로잡힌 스웨덴을 암시한다. 이런 한나에게 엄마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야무지게 나무란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분명한 것 하나는 여기 남으면 미래 자체가 없다는 거야."(p. 42)


 엄마의 말이 소설의 주제를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더하여 헤닝 만켈이 스웨덴을 떠났던 이유도 이와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점점 하나의 정체성만 고집하고 강요하려 드는 스웨덴에 미래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시에 있고, 바다에 있는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곳,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타자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실제 한나가 정착하게 되는 아프리카에서 그녀는 그렇게 된다. 헤닝 만켈은 무엇보다 세 차례나 변하는 그녀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 마치 아프리카로 떠난 작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도 같이.


 하지만 그게 다일까? 보다 좋은 곳을 찾아서 떠난다는 것만으로 족한 것일까?


 헤닝 만켈은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스웨덴을 떠나온 자신을 반추하면서 과연 이 길만이 있었던 것인지 성찰했던 것 같다. '불안한 낙원'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 때문에 붙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앞에 붙은 '불안한'은 낙원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인지 은근히 동요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누구나 낙원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낙원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기 훨씬 전의 고대 그리스에도 아르카디아란 낙원이 있었다. 서양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이상향은 있어왔다. 이런 면에서 유토피아의 희구는 인간의 본성상 욕구라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집단적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라면 어떨까? 그저 나 혼자 여기의 현실이 어둡고 미래가 없다고 해서 내버려두고 낙원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괜찮은 것일까? 여기에 윤리적 위험은 없을까? 헤닝 만켈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불안한 낙원'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한나 뢴스트렘의 삶은 내가 있을 낙원은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여기에 있다고 깊이 깨닫게 해주는 작품인 것이다. 만켈은 한나의 삶을 통해 나의 향유가 아닌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강조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그 현실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말년의 만켈은 스웨덴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홀로 아프리카로 와버린 것을 조금은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마음을 한나에게 의탁해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은 아닐런 지.무엇보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한나의 선택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 선택은 내게도 꽤나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나 역시 예전의 만켈처럼 헬조선인 이 나라를 그저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안 보면 그만이라고, 나만이라도 구하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 나는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 연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굳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요즘 이렇게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운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한 낙원'을 다 읽었을 때, 난 과연 이대로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만 혼자 잘 살자고 떠나는게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희망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희망의 빛을 지연시키려 애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빛에서 위로 받고 그 빛을 좀 더 크고 밝게 만들기 위해 찾아올 이들을 위해. 한나의 아프리카 호텔처럼. 한나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의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흘러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을 때'와 같이 자주 울컥했고 은수미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그녀의 연설에 감동되어 새벽 기차를 타고 마산에서 온 여고생 이야기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배재정 의원이 인용한 한 중학생 덕후 소녀의 글도 그랬다. 그 어린 영혼들을 지켜주지 못해 정말 많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배재정 의원은 우리 후세대까지 이런 아픔을 물려줘야 하냐고 말했다. 맞다. 이런 아픔은, 이런 불법은 우리 때에서 끝나야 한다. 그들의 낙원은 결코 불안해서는 안된다. 지금 나는 그것만 생각하려 한다. 그것을 위해 나는 뭘 해야 하는 가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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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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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의 대선용 여론 몰이를 위한 댓글 선동 공작이 계기가 되어 쓰여졌다는 장강명의 '댓글부대'는 정작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는 않고 에둘러 돌아가선 그저 댓글 조작의 위험성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답게 이번에도 역시 빠르게 술술 잘 읽혔다. 흡인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이 꼭 재미만이 아니라 동시대에 뭔가 의미있는 목소리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댓글부대'가 꽤나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 댓글이 어떻게 조작되고 대중을 선동하는 지를 여과없이 담아내자는 정도였을까? 사실 소설은 딱 그 정도만 보여준다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댓글 선동에 뛰어든 팀-알렙의 시작과 성공 과정이 이야기의 전부니까 말이다. 겨우 세 명으로만 이루어진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 것을 그 중 한 멤버가 기자에게 내부고발 하는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국정원의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이 둘 정도 나와 그들과 얽히고 나름 반전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경마장의 말처럼 한 라인만 직선으로 돌파하는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한없이 얄팍하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갈등인데, 이 소설엔 아무런 갈등이 없다. 팀-알렙은 한 몸의 유기체처럼 잘 통일되어 움직이고 별다른 고난도 없이 하는 일마다 척척 성공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들에게 접근해 오고 성공의 달콤한 향기를 맡게 하더니 정치와 여론 조작이라는 더 큰 판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인터뷰는 얼른 보면 그들의 패망 같지만 실은 그들 성공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물의 깊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잇장처럼 한없이 얇게만 보인다. 때문에 소설은 다큐멘터리 보다는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후속편에 가깝다. 인물과 이야기가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소설이 들려주고자 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채 와닿기도 전에 그저 영상만 현란하게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독자를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아이-쇼핑 하는 이로 만든다. 공감이 차단 당한 쇼윈도 안의 진열품을 눈으로 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인물들이 편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최대의 약점 같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저 장기말 이상의 존재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니 당하는 자들은 마냥 바보 같고 덕분에 댓글 공작은 그 위험성이 원래보다 더 과잉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과잉된 위험은 독자로 하여금 설마 댓글이나 이런 저열한 조작이 그 정도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댓글부대'는 그런 영향력을 경고하고 스스로 먼저 그것의 진리치를 독립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것을 고취하자는 목적에서 나왔다. 이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원래 자신이 가진 목적과 정반대를 독자에게 행하고 있다. 자기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작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출발부터 작가가 우월적 시선에서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이 소설은 위험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명한 대사, '대중들은 개, 돼지 입니다. 조금 짖어대다가 조용해 질 겁니다' 처럼 대중에 대한 경멸을 은근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잡한 조작에도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대중이라니! 이런 작가의 조소가 팀-알렙이 인터넷으로 뭔가 저지를 때마다 은연중 느껴지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감정을 성급히 일반화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립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중을 소설 속 인물들만큼이나 얄팍하게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라가 망해도 여전히 여당을 지지하는 35%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설의 주제를 강조하다 보니 조금 무리를 해버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우월의 시선은 날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여기엔 이 현실이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런 대중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가 있을 뿐, 이 현실을 타개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내 생각일 뿐이지만, 좋은 소설은 독자를 홀로 유폐시키지 않고 타인과 연대하게 만든다. 우리가 유포되는 흑색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제대로 성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연대를 강고히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설은 나 아닌 타자를 그저 의심하거나 경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위험하다. 이 소설은 달콤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삼키면 독약이 된다. 이런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가, 이런 태도에 문제는 없는가 천천히 따져보며 삼켜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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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7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8 0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97년 1월, 주로 첨단 기술이 우리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루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와이어드'에 존 칼린이란 기자가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제목으로 한 기사를 실었다. 그건 인터넷 환경의 발달과 함께 지금까지 초강대국들이 고수하고 있었던 전쟁 수행 양상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워싱턴에서는 특정 상황 대응 전략을 만들기 위해 늘 가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 중 압도적으로 많이 수행되는 것이 'THE DAY AFTER'인데, 이는 미국이 핵공격을 당하는 시나리오의 게임이라고 한다.


 전략 게임이 빈번하게 치뤄진다는 것은 거기에 대한 대응 전략 수립이 그만큼 중요하고 절실하다는 뜻일 것이다. 하긴 핵공격만큼 엄청난 것도 없을테니 그만큼 많이 수행되는 것엔 얼른 수긍이 간다. 그런데 말입니다.(김상중 톤으로...) 이제는 그 게임의 시나리오가 완전 달라졌다고 한다. 뭬야~!, 핵공격 보다 엄청나서 그 대응 전략이 중요하고 시급한 게 있단 말이야? 북한의 인공위성 로켓마저 핵을 위한 미사일이라며 오도방정을 떠는 작금의 정부와 언론 현실을 보노라면 얼른 이런 의문부터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공격은 무엇일까? 일단 게임은 이렇게 이뤄진다. CIA, FBI, 외국정책 전문가, 국방성 과학자, 국가안보국 지역책임자 등 각 파트의 전문가들을 망라하여 모두 50명이 게임에 참여한다. 인원 규모나 참가자들 전문 분야를 고려해 보니 얼마나 이 공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더욱 느껴지는 것 같다.


 아무튼 이들은 한 팀에 10명씩, 다섯 팀을 이루어 불과 24시간 안에 미국에서 일어난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응하여 적절한 대처 전략을 짜야 한다. 상황은 이러하다.


 해킹으로 조지아 주의 통신 시스템이 다운된다. 덴버 시는 수도 공급이 중단되고 뉴욕과 워싱턴 사이의 암트랙 철도는 마비된다. 신호 교란으로 열차 정면 충돌마저 일어난다. 로스엔젤러스 공항은 관제탑의 전산이 모두 망가져 이착륙을 비롯한 항공기 통제를 할 수가 없다. 항공기 추락도 시간문제다. 거기다 텍사스 기지 지하 창고에 보관된 폭탄들마저 불법 입력된 명령으로 폭발하기까지 한다.


 자, 이만하면 얼른 떠오르는 대답이 하나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사이버 테러다. 이렇게 가장 많은 비범한 두뇌들을 가지고 자주 치뤄지는 대응 전략 게임마저 핵공격에서 사이버테러로 바꼈을만큼 세계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이미 병기에 의한 물리적 공격보다 안보와 기반 시설에 은밀하게 들어와 통제권을 빼앗아가는 사이버 테러를 더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사 사회의 모든 기반 시설들이 이제는 인터넷으로 통제되고 있으니 그렇게 여기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열거한 공격 상황들을 보노라면 얼른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지 않은가? 맞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했던 영화 '다이하드 4.0'이랑 많이 비슷할 것이다. 그 영화도 사이버 테러로 뉴욕처럼 아무리 거대한 도시라 해도 얼마나 손쉽게 도시의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당연하다. '다이하드 4.0'의 시나리오는 존 칼린의 이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졌으니까.


 사이버 테러로 뉴욕의 통제권을 빼앗는 해킹 집단의 리더로 분했던 저스틴 롱. 인터넷을 장악하면 아무리 소수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도시를 장악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에 '다이하드 4.0'이 있다면, 소설엔 '사이버 스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간적인 배경도 동일하게 뉴욕이다. '사이버 스톰'은 고유 명사가 아니다. 소설은 정체불명 해커 집단에게 잇단 기반 시설을 공격 받아 통신도, 전기도, 가스도, 물도 공급이 중단된 뉴욕의 혹한을 그리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뉴욕을 고립시키고 파괴시킨 두 상황, 그러니까 사이버 테러와 때마침 불어닥친 거대한 눈 폭풍을 합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이버 스톰은 다이하드 같은 액션물은 아니다. 뉴욕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가장이 사이버 스톰을 맞아 가족의 생존도, 안전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캐나다 출신의 매튜 매서. 사이버 스톰은 그의 데뷔작이다. 그는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엔 사이버 보안도 있다. 이 소설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그런 까닭에 소설이 그리는 사이버 테러로 인한 사회 혼란이 꽤 현실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사실적인 묘사가 작가의 특색이라고 한다. 무너진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고립되고 질병과 허기로 점점 파괴되어가는 인간 군상을 눈이 내리는 것처럼 차분하고 얼음처럼 냉정하게 그린다. 그래서 더욱 '혹시나 이런 일이 나에게도 닥친다면?' 하는 상상으로 공포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사이버 스톰이 시작된지 한 달 정도 지나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장면도 그리고 있는데 혹자는 이것이 너무 나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장면들은 작가가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쓴 것 같다. 스탈린그라드는 20세기의 가장 참혹한 전투로 손꼽히는데 거기서 양쪽의 병사들은 전투가 길어지고 군량이 바닥나자 실제로 인육을 먹었기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를 다룬 책 중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책인 '피의 기록,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저자 안토니 비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굶주림은 정신과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개인의 사고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행동 패턴에서는 그대로 드러났다. (…) 루마니아 병사뿐 아니라 독일군 병사도 살아남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시체에서 살점을 얇게 잘라내어 끓인 뒤 ‘낙타고기’라고 하면서 나누어 먹었다. 인육을 먹은 자들은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안색이 파리한 대다수 포로들과 달리 얼굴에 붉은 빛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막나간 과장은 아니다. 시쳇말로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 않는가.


 단 몇 달만의 허기로 인육을 먹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아주 허약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라캉에 따르면 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내 욕망으로 믿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문명이 그토록 얄팍한 것이라면 그런 문명 안에서 과연 우리는 정말 무슨 영화를 얼마나 보겠다고 문명으로 총체화되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이토록 나를 억누르고서 내 것이 아닌 남의 꿈을 쫓으며 사는 것인지 의아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사이버 스톰은 모든 재난 소설이 그런 것처럼 이전 문명의 상상적 그라운드 제로에서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오늘 나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 실마리를 준다고 하겠다. 거기서 내가 느낀 나를 둘러싼 삶의 껍질이 가진 두께의 크기에 따라 그것이 자유일 수도, 책임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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