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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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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닝 만켈의 백조의 노래, '불안한 낙원'을 읽었다. 내게 이 작품은 조국 스웨덴을 떠나 오래도록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그 자신의 마음을 많이 투영한 것으로 보였다. 헤닝 만켈은 자신을 세계적 거장의 위치로 격상시켜준 장본인인 '발란더' 형사 시리즈로 유명하다. 스웨덴에선 이미 여러 차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영국에서마저 케네스 브래너 주연의 드라마로 방영될만큼 인기와 작품성이 검증된, 말하자면 전세계적으로 성공한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 '얼굴 없는 살인자'는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한 부부의 살인사건을 출발점으로 하여 스웨덴에서의 극우의 부상과 더불어 점점 늘어나는 인종 차별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시리즈를 시작했던 헤닝 만켈은 그 뒤로도 시리즈 내내 꾸준하게 인종 차별이란 주제를 이어갔는데 그런 이유로 헤닝 만켈이 아프리카에 정착했던 것도 어쩌면 인종 차별의 부상으로 드러나 버린 스웨덴의 민낯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무엇보다 이번에 '불안한 낙원'을 읽고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여성, 한나 뢴스트렘 또한 헤닝 만켈처럼 스웨덴에서 아프리카로 떠난다.1904년. 그 때는 스웨덴에 굶주림이 만연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기근이었다. 산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던 한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한 명의 입이라도 덜려는 어머니에 의해 도시로 떠나라고 강요 받는다. 가족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지만 한나는 선뜻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내 앞날이 어떨지 전혀 모르겠어요."(p. 42)


 이 말을 하기 전에 한나는 엄마 엘렌에게 바다에 대해 묻고 있었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바다를 본 아버지는 그저 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다라는 커다란 세계, 그리고 그것의 정체 불명은 그대로 가족이라는 폐쇄적이고 작은 세계를 떠나 더 크고 한껏 개방되어 있어 그만큼 정체가 쉽사리 파악되지 않는 도시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은연 중 반영한다. 여기서 더 주목할 지점은 가정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다. 거기는 이방인들이 가득한 도시이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바다는 그것을 좀 더 강조한 공간이다. 바다는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나의 진짜 두려움이 정작 거기에 있다는 게, 바로 다음의 말에서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될까요?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될까요?"(같은 곳)


 그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공존이다. 이것은 그대로 인종 편견에 사로잡힌 스웨덴을 암시한다. 이런 한나에게 엄마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야무지게 나무란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분명한 것 하나는 여기 남으면 미래 자체가 없다는 거야."(p. 42)


 엄마의 말이 소설의 주제를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더하여 헤닝 만켈이 스웨덴을 떠났던 이유도 이와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점점 하나의 정체성만 고집하고 강요하려 드는 스웨덴에 미래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시에 있고, 바다에 있는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곳,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타자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실제 한나가 정착하게 되는 아프리카에서 그녀는 그렇게 된다. 헤닝 만켈은 무엇보다 세 차례나 변하는 그녀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긍정의 의미를 가진다. 마치 아프리카로 떠난 작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도 같이.


 하지만 그게 다일까? 보다 좋은 곳을 찾아서 떠난다는 것만으로 족한 것일까?


 헤닝 만켈은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스웨덴을 떠나온 자신을 반추하면서 과연 이 길만이 있었던 것인지 성찰했던 것 같다. '불안한 낙원'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 때문에 붙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앞에 붙은 '불안한'은 낙원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인지 은근히 동요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누구나 낙원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낙원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기 훨씬 전의 고대 그리스에도 아르카디아란 낙원이 있었다. 서양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고대에서부터 이상향은 있어왔다. 이런 면에서 유토피아의 희구는 인간의 본성상 욕구라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집단적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라면 어떨까? 그저 나 혼자 여기의 현실이 어둡고 미래가 없다고 해서 내버려두고 낙원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괜찮은 것일까? 여기에 윤리적 위험은 없을까? 헤닝 만켈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불안한 낙원'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한나 뢴스트렘의 삶은 내가 있을 낙원은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여기에 있다고 깊이 깨닫게 해주는 작품인 것이다. 만켈은 한나의 삶을 통해 나의 향유가 아닌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을 강조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그 현실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말년의 만켈은 스웨덴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홀로 아프리카로 와버린 것을 조금은 후회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마음을 한나에게 의탁해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은 아닐런 지.무엇보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한나의 선택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 선택은 내게도 꽤나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나 역시 예전의 만켈처럼 헬조선인 이 나라를 그저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안 보면 그만이라고, 나만이라도 구하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 나는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 연설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굳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요즘 이렇게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운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한 낙원'을 다 읽었을 때, 난 과연 이대로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만 혼자 잘 살자고 떠나는게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필리버스터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나만큼이나 희망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희망의 빛을 지연시키려 애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빛에서 위로 받고 그 빛을 좀 더 크고 밝게 만들기 위해 찾아올 이들을 위해. 한나의 아프리카 호텔처럼. 한나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의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흘러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었을 때'와 같이 자주 울컥했고 은수미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그녀의 연설에 감동되어 새벽 기차를 타고 마산에서 온 여고생 이야기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배재정 의원이 인용한 한 중학생 덕후 소녀의 글도 그랬다. 그 어린 영혼들을 지켜주지 못해 정말 많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배재정 의원은 우리 후세대까지 이런 아픔을 물려줘야 하냐고 말했다. 맞다. 이런 아픔은, 이런 불법은 우리 때에서 끝나야 한다. 그들의 낙원은 결코 불안해서는 안된다. 지금 나는 그것만 생각하려 한다. 그것을 위해 나는 뭘 해야 하는 가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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