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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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은 마이클 코넬리의 그 많은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이다. 그녀의 이름은 캐시 블랙. 2000년에 첫 등장한 그녀는 비록 그녀 자신이 주인공인 속편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뒤 해리 보슈의 '시인의 계곡'이나 미키 할러의 '탄환의 심판'등 다른 작품에서 자주 얼굴을 내밀게 된다. 그렇게 마이클 코넬리는 카메오처럼 그녀를 출연시키는데 거기서 코넬리의 연출 방법이 자못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단 한번도 캐시 블랙의 온전한 실체와는 만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녀의 흔적일 뿐이다. 기억 속의 존재나 머그샷과 같은 기록 속의 존재일 뿐이다. 유일하게 실존하는 캐시 블랙을 만날 수 있는 '시인의 계곡'에서 조차 그녀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캐시 블랙이란 진짜 이름의 온전한 실체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 밖에는 없다. 그 외는 모두 흔적이거나 위장일 뿐이다. 실재가 아닌 실재의 잔여물들. 그러니까 유령이다. 유령이야 말로 실재를 추정하게 만드는 실재의 잔여물이 아니던가. 단적으로 말해버리자. 마이클 코넬리는 '보이드 문'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인 캐시 블랙을 오로지 유령으로만 출현시키고 있다고.

 

  마이클 코넬리의 세상은 단적으로 버림받은 수컷들이 배회하는 세상이다.

  그 가득한 수컷들의 아귀다툼 가운데 캐시 블랙은 홀연히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마이클 코넬리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을 잔여물로써의 유령으로 만든 것일까? 먼저 이 의문을 풀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풀려야 '보이드 문'에서 마이클 코넬리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보이드 문'은 거꾸로 풀어가야 하는 작품이다.

 

  마이클 코넬리에게 유령은 무엇인가?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캐시 블랙이 유령이 되었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의 단서를 우리는 보슈라는 캐릭터를 만드는데 영감을 줬던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코넬리 기자 시절 그가 앉는 책상 위자 뒷 벽에 늘 붙어 있던 그림으로 '블랙 에코'에서도 나오듯이 보슈란 이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쾌락의 정원'이란 그림인데 사진은 그 중간 부분, 그러니까 점점 죄악에 물들어가고 있는 현세를 나타내는 그림 중 윗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령이 나온다.

 

  그러니까 저기 하늘을 날고 있는 존재들이 유령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늘의 색깔은 앞쪽에 있는 천상에 있는 하늘의 색깔과 같다. 이러한 동일함은 여기의 유령 또한 하나의 잔여임을 말해준다. 잔여는 흔적이지만 알고보면 실재의 연장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그 흔적을 통해 실재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잔여들은 일종의 틈새와 같다. 그 찢어진 틈새로 현실이 뒤덮고 있는 장막 너머의 진정한 대안 혹은 구원을 보게 하는 그런 창구인 것이다. 유령은 그런 존재다.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 헤메이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오아시스가 실재함을 말해주는, 그렇게 그들의 확신을 보증하는 존재다.

 

  이는 '보이드 문'에서 캐시 블랙이 새로이 만든 가명이자 '시인의 계곡'에서 해리 보슈에게 나타났을 때의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라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마이클 코넬리가 하도 노골적으로 이름을 지어놓아서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제인(Jane)'이란 이름은 원래 'God is gracious!', 즉 '신은 자비롭다'를 뜻하고 '데이비스(Davis)'는 'Son of David', 즉 '다윗의 계승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뜻하는 존재가 가지는 이름으로써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이클 코넬리가 일부러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후의 출연이 모두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찾고 있는 구원의 증표임을 뜻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정말로 캐시 블랙을 '쾌락의 정원' 하늘 위를 홀연히 날아다니는 유령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캐시 블랙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캐시 블랙이 어떤 의미의 존재이기에?

  그제서야 우리는 '보이드 문'으로 들어갈 것이 허락된다.

 

  

 

    

  생각해보자. 대관절 마이클 코넬리는 왜 여성 주인공을 가져온 것일까?

  그것도 그냥 여성이 아닌, 엄마를?

 

  그렇다. 엄마다! 이 소설은 엄마가 주인공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해리 보슈를 생각해 보자. 그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그는 거친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 살아남기 위한 수컷의 악전고투가 앞에 놓여졌고 죄악 가득한 세상으로 자신을 삼키려드는 '블랙 에코'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형사가 되었다. 그가 형사가 되었던 진짜 이유는 물론 따로 있다. 자신에게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엄마가 죽게 된 진상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 진실을 찾음은 세상이 앗아가 버린 엄마를 다시 찾아오는 것과 같다. 그것이 검은 메아리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이었다. 갇혀진 곳에서 메아리는 더욱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메아리로 부터 벗어나려면 비워야 했다. 엄마를 되찾음이란 바로 그것과 같았다. 세상이 덮어버린 어둠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로 메아리를 빠져나가게 하여 비우는 것. 그리고 그 텅 빈 공간(void) 안으로 엄마로 상징되는 구원의 빛을 들어오게 하는 것. 형사로서의 해리 보슈의 길은 그런 것이었다. '진실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란 말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과 같은 길.

 

  여기서 두 가지가 얼른 밝혀진다. 왜 코넬리가 하필 이 작품에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 그리고 제목으로 빈 공간을 뜻하는 '보이드(void)'를 쓴 것인지. 단적으로 그 둘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앞서 왜 코넬리가 캐시 블랙을 유령처럼 만들었는가에 대해 누누히 말했는데 그것도 이 때문이다. '엄마란 존재 = 보이드(void)' 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필연적으로 '보이드 문'이 되어야 했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대안의 궁극적 모습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코넬리는 이후의 작품에서 비록 그녀가 구원의 존재이긴 하지만 유령처럼 만들어 그 실체를 지워야했던 것이다. 모든 건 다 연결된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마이클 코넬리를 그저 평범한 스릴러 작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보이드 문'은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 결론처럼 덧붙인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마이클 코넬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픈 대안의 구현체라고. 그래서 코넬리의 작품 중 사실은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물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덧붙인다.)  

 

  이제 설명이다. 아니, 나만의 견해이므로 변론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버지'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같은 국적을 가진 작가, 존 하트처럼 마이클 코넬리도 사실은 '아버지'가 핵심이다. 그건 단적으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미키 할러는 중심에 있지만 해리 보슈는 변방 혹은 경계에 있다. 쉽게 말해 미키 할러는 '인사이더'지만 해리 보슈는 '아웃사이더'다. 이 둘은 사촌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이유는 단 하나다. 해리 보슈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다. 반면 미키 할러는 아버지가 죽을때까지 내내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해리 보슈는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축출된 자고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그래서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악습까지도 닮아 그의 복제가 되고 해리 보슈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결국 아버지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따지고 보면 늘 나쁜 아버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상대하는 자들은 모두 아버지이거나 그 아버지의 복제판이다. 한마디로 마이클 코넬리의 분신들이 맞짱을 뜨고 있는 대상은 '아버지'(라캉적 의미에서 지금 현실 사회의 상징계 질서 전체를 조직하고 떠받치는 주인 기표로써의)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와도 같다. 그런데 독자들이 이걸 못 본단 말이지. 해리 보슈만 해도 모두 6편에 걸쳐 그걸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스릴러라고만 생각한단 말이지. 어쩌면 마이클 코넬리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기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으며 자신의 소설은 바로 그 나쁜 아버지와 싸우는 것임을 몰라줘서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스탠드 얼론 '보이드 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얘기해주마. 도저히 못 알아듣지 못하게!'란 마음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드 문'은 설정은 단순해진만큼 의미는 더욱 노골적이 되어 하려는 얘기를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드 문'은 신기하게도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만나는 '탄환의 심판'을 닮았다.

  당신이 만일 그 둘의 협력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싶다면 '보이드 문'은 가장 적합한 선택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보이드 문'은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과도 같으니까. 어째서냐고? 그건 설정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명의 주인공의 설정이 해리 보슈, 미키 할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캐시 블랙은 해리 보슈처럼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다. 반면, 캐시 블랙을 뒤쫓는 사립탐정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를 우상으로 여기며 그의 자리에 서고 싶어한다. 이런 의심도 해 본다. 미키 할러의 원본이 바로 이 잭 카치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쨌든 참 닮아있다. 앞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차이점을 이야기 했는데 그건 그대로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는 일도 똑같다. 해리 보슈가 아웃사이더로서 사회가 정형화시킨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듯이, 캐시 블랙 역시도 그러하다. 그녀 역시 절도범으로 아웃사이더이고 오로지 카지노에서 거액을 딴 사람들만 노리는 나름의 신념이랄까 철칙이 있다. 해리 보슈가 비록 형사이긴 하지만 세상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들추어내어 사실은 세상에 균열을 야기하는 것처럼 캐시 블랙 역시도 숨겨놓은 잉여의 돈을 훔쳐 세상의 질서를 교란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일찍 축출된 자들이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교란하니 그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는 아들들은 그 균열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둘러 봉합할 수 밖에. 그렇게 미키 할러는 진실 보다는 협잡과 은폐로서 아버지의 법질서를 봉합하고 잭 카치 역시도 원래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는 것으로 벌어진 사회의 틈을 얼른 메우려 든다. 그는 돈을 찾기 위해 추적에 나섰으며 절도에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늘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같다. 이 소설은 그동안 해리 보슈가 해왔던 대로 잭 카치로 대변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싸우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주제를 명확히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맞서는 대상 역시 보다 쉽게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변형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캐시 블랙은 여성이 그것도 모자라 엄마가 된 것이다. 소설은 5년전 불의의 사고로 애인을 잃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다행히 가석방되어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살고 있는 캐시 블랙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현재 자동차 판매원이다. 그것도 운좋게 성공하여 일확천금을 얻은 주로 젊은 백만장자들을 상대로 차를 파는 판매원이다. 그녀가 주로 상대하는 새롭게 사회의 상층부에 편입한 젊은이들은 미키 할러와 같이 닮고싶은 아버지의 자리로 오르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뜻한다. 캐시 블랙이 그들이 더욱 재빠르게 달려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판매한다 함은 그녀가 이제 벗어나 있었던 아버지 세계로 편입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걸 지속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수감 당시 출산한 딸을 입양한 가정이 이제 자기가 못 볼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딸의 곁에 있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전의 그 일을 반복할 생각을 한다. 딸만 포기하면 언제든 세상인 마련한 안정된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걸 내팽개치고 딸을 위해 기꺼이 불안정한 경계 위의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는 해리 보슈와 캐시 블랙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정반대의 행동이다. 보슈와 블랙의 아버지는 책임지기 싫어서 그들을 버렸다. 하지만 블랙은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기 위해 오히려 사회가 주는 안정을 버린다. 이로서 분명해진다. 마이클 코넬리가 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가. 그가 벌이는 아버지와의 싸움에 있어 엄마의 존재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이유와 그 대안을 아울러 보여줄 최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을 떠맡고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잭 카치의 추적은 사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즉 양립불가능성 이다. 아버지의 질서 안에 거하면서 엄마로 있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진정한 엄마가 되려고 한다면 타협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캐시 블랙이 딸에게 진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에서 완전히 떠나든가 아니면 딸을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다. 자기 구원을 위한 대안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곳에서만 가능하다.

 

 

 

 

 

   제목 '보이드 문'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p. 82 ~ 83)

 

  이렇게 '보이드 문'이란 달이 그 어느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완전히 비어 있는 곳에 있는 달. 그것이 바로 '보이드 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캐시 블랙이 진정한 엄마가 되려면 있어야 할 곳이다. '보이드 문'이 무엇인지 캐시 블랙에게 설명해주는 레오는 그 말을 하면서 그 시간에는 절대 절도를 하려는 방에 있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 방이 있는 호텔은 사실 캐시 블랙에게 트라우마의 공간이기도 하다. 같이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그래서 같이 사회 바깥에서 경계 위의 삶을 살았던 애인 맥스가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던 순간 추락해 죽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꿈이 한 번 좌절된 곳이고 아버지의 질서를 넘어서려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한 번 꺾인 곳이다. 그렇게 호텔 쿨리오 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아버지 질서의 중심이다. 그런 곳답게 거기서는 오로지 내려다보기만 한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주인 기표가 그렇듯이 '까마귀 둥지'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잭 카치 역시 거기에 고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캐시 블랙이 다시 그 쿨리오를 턴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건 아버지 질서 자체와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쪽에서는 가장 중대한 위반이지만 캐시 블랙에게 있어서는 그로 부터 가장 머나 먼 벗어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녀는 레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보이드 문'이 일어나는 그 때 있지말아야 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구원이 오로지 '보이드 문'에서만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선언 같은 장면 연출이다.

 

 여기까지도 길게 썼다. 하지만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실 리뷰에 이런 설명까지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김에 이쯤에서 결말을 맺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자꾸 들지만 그럴 수 없다. 소설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 그걸 생략한다면 왠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아, '보이드 문'은 정말 훌륭한 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정도로 치밀한 작가였나 왠지 혀를 내두르고 있다. 아무튼 그걸 설명해야 한다. 남은 힘을 다시금 짜내보자.

 

   자, 앞에서 '보이드 문'은 타협의 여지가 없음 을 뜻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기엔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왜 없는가? 지금은 타협과 관용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게 얼마든지 대화와 타협 그리고 관용이 가능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마이클 코넬리의 대답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연히 'NO'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이클 코넬리가 높은 혜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해리 보슈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어쩌면 코넬리 자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왠지 그렇게 짐작된다.

 

   그래, 그런 세계가 있다. 타협과 관용이 가능한 세계. 물흐르듯이 얼마든지 어울려 살 수 있는 세계가.

 

   요 네스뵈는 그러한 세계를 '조용한 사회'라고 불렀다. 물론 비아냥이지만.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러한 세계를 '무조음의 세계(MONDE ATONE)' 이라 불렀다. 무조음이란 음악용어로 으뜸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조음의 세계란 뚜렷한 중심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온갖 다수성으로 넘치는 세계. 그 모든 다수성들이 서로 타협과 관용으로 대등하게 어울리고 있는 세계. 그것이 '무조음의 세계'이다. 굉장히 좋게 보이는 세계다. 하지만 요 네스뵈의 말이 비아냥이었듯이 이 바디우의 말 또한 비아냥이다. 진실로 그리되면 좋겠지만 지금의 세계가 무조음인 건 어디까지나 외양에 불과하다는 비난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정말 그러하다. 많이도 분화되고 복잡하게 갈라져서 뭔가 뚜렷한 중심이 없다. 거대 이념들은 애시당초 사라졌고 이제는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똑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다. 한 끼 밥을 못 먹어 굶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산업개발이 한창이던 때를 못 벗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TV에서는 동성애자를 비롯 진보된 성담론들이 당당히 나오고 있다. 그렇게 어디는 정말 말도 안되게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또 어디는 정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앞서고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것들이 마구 뒤섞인 시대다. 그 잡탕찌개와도 같은 상황 앞에서 아무 것도 정의내릴 수 없는 시대, 그래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이건 환영에 불과하다. 정말은 여전히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갈등을 가리기 위하여 사회가 쓰고 있는 은폐 전략인 것이다. 그건 우리들이 바라보는 무조음이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분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은밀하게 선별과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판결이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 세계의 무조음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화하고 있는 조음성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사람들이 거짓 타협과 그로 인한 위안에 만족하고 살 수 있게끔 환영의 무조음을 조율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마치 마술사가 본래 의도를 감추기 위해 다른 손의 현란한 손동작으로 상대방의 시선을 교란시키듯이...

 

 궁극적으로 아버지란 마술사이다. 그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가 만들어낸 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협은 불가능하다. '보이드 문'이야 말로 구원을 위한 절대 공간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이클 코넬리는 마술과 환영을 소설에 가져온 것이다. 아버지 질서를 대변하는 잭 카치의 아버지는 마술사이다. 잭 카치 역시 소소한 마술을 부린다. 그것도 주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단적으로 마술에 의해 지탱되므로 타협이 불가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소설 곳곳에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것이 환영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초반 캐시 블랙이 타고 다니는 차 벅스터는 어떠한가? 왜 그 차에다 마이클 코넬리는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설정을 한 것일까? 거기서 캐시 블랙이 타고다니는 벅스터는 사실 그녀의 차도 아니고 '새 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할부금 미납으로 회수된 차' 라고 굳이 밝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캐시 블랙 자체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고 살고 있지 않나?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첫머리부터 그녀는 남에게 본명을 속이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군다. 마이클 코넬리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인가? 더구나 잭 카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까마귀 둥지를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한다.

 

  잭 카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까마귀 둥지'였다. 카치는 빈센트 그리말디가 지금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말디가 둥지 위에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노가 문을 연 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둥지 위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반드시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말디가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카치는 그 모든 게 이미지 관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묘한 속임수. 보안에 대한 착각이 보안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P. 166)

 

  소설의 이야기와는 크게 상관없는 그래서 안해도 그만일 말을 이렇게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위장과 착각은 곳곳에 있다. 모두가 남을 속인다. 그리고 모두들 속는다. 남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기도 하지만 어떤 땐 자신이 만든 환영에 스스로 속기도 한다. 소설에서 뭐든 다 알아내는 잭 카치마저도 커다란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드러난다. '보이드 문'은 연속된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파노라마다. 진실을 알기란 어렵고 반드시 배신이 뒤따라 붙는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았던 무조음의 평온한 세계가 알고보니 그 밑에 도사린 협잡과 배신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막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질서 자체가 인위적 마술과 같은 환영으로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을 알 수도 없으며 배신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어떻게 관용을 베풀고 타협을 하겠는가? 소설 속에 그 자신이 이리도 잘 형상화한 것처럼 마이클 코넬리는 아버지 질서의 이러한 기만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보이드 문'이야 말로 유일한 구원의 장소임을 캐시 블랙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 빈 허공이 아닌 다른 모든 공간은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이 같은 주제는 사실 소설 처음에 다 드러난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서 마이클 코넬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 것이나 같다. 소설의 처음에 캐시 블랙은 한 집을 방문한다. 그 집은 팔려고 내어놓은 집으로 텅 비어있다. 일상의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는 그 집은 그야말로 아버지 질서가 만들어 놓은 무조음의 세계다. 하지만 텅 비어있다. 실체가 없는 환영의 집인 것이다. 거기에 캐시 블랙은 위장된 차를 타고 위장된 존재로서 위장된 대화를 이어간다. 그게 아버지 질서에 속해 살던 캐시 블랙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처럼 포섭되어 있는 우리 모두의 진실이기도 하다.

 

  집을 나오며 그녀는 이제 '그 수평선을 향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캐시는 그렇게 마냥 달렸다'로 끝난다. 그게 마이클 코넬리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그는 우리 역시도 얼른 그녀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얼른 우리 자신을 위한 '보이드 문'을 만들어 놓을 것. 이게 소설의 진언이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 눈을 홀리는 환영의 영사막을 찢고 홀연히 캐시 블랙의 유령이 들어설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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