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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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쌓여 있는 시간만큼 많은 대답이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도구였습니다.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여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죠. 경험칙상 맞기도 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1960년대 제인 구달이 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인간과 똑같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함에 따라 비로소 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동물은 말할 수 없고 말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래지 않아 깨어졌습니다. 오래도록 침팬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로저 파우츠가 '워쇼'라는 침팬지를 통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강력한 선 하나가 이렇게 하여 사라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속 상의 한 존재라는 게 밝혀진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와의 대화'는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원래는 아동 심리학을 전공하려 했던 로저 파우츠가 어쩌다 '워쇼'를 통해 동물 행동학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워쇼는 동물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세상, 또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놀라운 여행에서 나는 다른 침팬지도 수십 마리 만났는데, 다들 워쇼만큼이나 개성 있고 표현을 잘했다. 결국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엇다. 인간 지성의 본질, 인간 언어의 근원에 대해서, 또 우리가 어디까지 연민을 느끼는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p. 17)


 진실로 이 책은 그가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워쇼와 함께 한 로저 파우츠의 기록을 따라서 당시까지만 해도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키너의 '동물의 행동이란 그저 자연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 뿐이다'라는 <조작 형성 이론>과 노엄 촘스키의 '인간의 언어 습득은 뇌 어딘가에 언어 통사론 규칙이 코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보편 문법 이론>이 어떻게 차레대로 오류로 드러나는가와 이러한 침팬지의 수화 학습 능력이 자폐아와의 소통과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인류 공영을 위해서라면 동물을 기꺼이 실험의 희생자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로저 파우츠가 워쇼와 함께 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혈족인 침팬지에게 그동안 과학과 인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들을 보며 그런 인간의 하나로서 참회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침팬지에겐 달갑지 않은 운명이 닥쳐왔습니다. 미국이 우주 비행을 소련과 경쟁하던 무렵에는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60마리 이상의 침팬지가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작은 종 모양의 캡슐을 타고 우주로 돌진할 경우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직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인간 대신 침팬지를 보내 알아보려는 속셈으로 말이죠. 네, 침팬지는 옛날에 흔히 광산에서 갱도에 혹시 유독 가스가 나오지 않을까 알기 위하여 유독 가스를 맡으면 바로 죽기 때문에 가져갔던 카나리아와 똑같았습니다. 그런 침팬지를 스키너의 조작 형성 이론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하면 바나나가 나오는 보상을 주면서 열심히 훈련 시켰지만 최초로 궤도에 진입하여 지구를 돌았던 침팬지 <에노스>는 기계 고장으로 제대로 조작 했는데도 바나나가 나오기는 커녕 전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버튼을 잘 눌러서 결국 로켓 결함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스키너의 이론에 보기좋게 엿을 먹였습니다. 동물이 단순히 조건 반사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에노스>는 비행 1년 후, 비행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요? 이질로 죽고맙니다.


 소련과의 우주 경쟁이 끝난 뒤에도 침팬지에게 안식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침팬지는 인간을 대신하여 다양한 실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의학 실험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엄마 품에서 강제로 떼어내 연구소로 운반되는 어린 침팬지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침팬지도 인간만큼 모성이 강한 존재라 그렇게 아이를 잃어버리면 커다란 상처를 받습니다. 그건 강제로 어미와 헤어진 어린 침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AIDS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던 80년대엔, 인간처럼 감염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침팬지가 치료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AIDS 바이러스를 투여 받았고 그것으로 죽어갔습니다. 정말 인간의 침팬지에 대한 잔혹한 만행이 끝도 없습니다. 워쇼도 그렇게 실험을 위해 끌려온 침팬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의학 실험체로 쓰이기 전에 앨런과 비어트리스 가드너 박사 부부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가져옵니다. 원래는 캐시란 이름이었는데 가드너 부부는 연구에 쓸 동물에게 사람 이름을 붙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거리 이름인 '워쇼'를 붙여줍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워쇼는 그저 동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워쇼'에게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거쳐 오래도록 서양 문명에 굳건히 자리잡아온 '인간 중심주의'를 붕괴시킬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바로 로저 파우츠였습니다.

 워쇼가 수화를 통해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말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전공과 꿈마저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워쇼가 열어 준 길은 그에게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길은 학계의 주류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노엄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이 그랬습니다. 언어 통사 문법 자체가 인간의 뇌 어딘가에 코딩되어 있다는 그 이론은 언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그런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지 못한 동물은 언어를 가질 수 없다고 아예 배제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워쇼는 언어란 모방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으며 창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언어 또한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몸짓의 발전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는 자신이 워쇼에게 본 것을 믿고 저널에 발표했고 제인 구달의 도움까지 받아 노엄 촘스키 이론에 짙게 투영된 인간 중심주의를 허물어갔습니다. 당시 유명한 동물 행동학자이던 롬 하레도 원래는 촘스키 이론을 지지했는데 어느 날 워쇼가 잡지를 보며 수화로 혼잣말 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며 바로 그 입장을 철회해 버렸습니다. 워쇼가 로저 파우츠에게 심어준 신념은 침팬지와의 소통이 자폐아와의 소통에도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한층 더 확고해졌습니다.



 사진은 제인구달과 함께 있는 로저 파우츠의 모습. 안고 있는 침팬지는 '타투'로 가드너 부부가 지원금이 끊어지자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동물원에 넘기려고 하는 걸 로저 파우츠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맡아 키웠습니다. '타투'는 꽤 얌전한 성격으로 별로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기가 갖고 논 장난감은 항상 제자리에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가 계속해 온 워쇼와의 대화는 외부만 무너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 자신도 많이 변하게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워쇼를 비롯한 많은 침팬지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는 로저 파우츠로 하여금 인간과 동물을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인간>이란 <존재>의 한 형태일 뿐임을, 나에게 나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워쇼였다. 세상에 인간이라는 존재, 침팬지라는 존재, 고양이라는 존재가 있다. 나는 한 때 그러한 존재들 사이에 그었던 선 - 어떤 종은 가두고 어떤 종에게는 실험을 하도록 허락하는 선 - 을 더 이상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다.(p. 404 ~ 5)


 하여, 로저 파우츠는 제인 구달과 함께 적어도 침팬지만큼은 실험하지 않도록 하는 규약을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를 위해 동물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 주류 과학계는 오히려 로저와 제인을 비합리적이라 비난하고 결국 규약 정립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런 과학자들의 편협과 냉담을 경험했으니, 로저 파우츠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과학이 항상 객관적 지식을 고결하게 추구하면서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자기 시대의 편견을 체화한다. 그리고 과학자는 무지를 지식인 척 포장할 수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이 윤리적 경계를 세우고 뒷받침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편협한 일반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불행히도 역사가 증명하듯 무지와 오만이 결합하면 해당 문화의 윤리적 우주 바깥의 존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p. 452)

 

 그러므로 우리는 로저 파우츠가 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무래도 숙고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간의 고통이 침팬지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인간의 생명이 왜 침팬지의 생명보다 더 소중할까? 우리는 윤리적 원칙이 아니라 기껏해야 노골적인 자기 이익 때문에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가 이웃의 심장을 꺼내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과 나는 다르지만 무척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직계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는 공동의 선조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촌이다. 내가 우리 사이에 긋는 유전적 경계는 임의적이며, 나는 이웃을 죽여서 내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자연적인 생각을 꺽어야 한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침팬지의 심장을 꺼내는 것은 옆집으로 걸어 들어가서 이웃의 심장을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침팬지가 내 딸만큼 나와 가깝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고통의 조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침팬지는 내 이웃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촌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원칙을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에게만 적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개와도 공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개들에게까지 권리를 확장해야할까? 쥐는 어떨까? 어디서 멈춰야할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덜 바람직한> 동물들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윤리적 우주의 빗장을 걸어 잠글 수는 없다. 시간은 계속 전진하고 우리의 윤리적 영역은 계속 확장될 뿐 축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p. 457 ~ 9)

 

 하나의 빗금은 안과 밖을 나눕니다.

 그러나 빗금이 딱 하나만 그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번 빗금을 허용하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게 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인류와 동물 사이에 놓인 빗금이 흑인에게도 긋게 했으며 제국주의 때는 식민지 백성에게도 긋게 했고 사회주의가 유포될 때는 다른 이념을 가진 자에게 그었으며 우리나라에선 지역마다 빗금을 그었고 지금은 이주자에게 긋고 있듯이 말이죠. 이처럼 하나의 선은 복제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을 통해 빗금이 그어지는 결정적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저 파우츠의 말대로 자기 이익 때문에 그어진다는 것을 말이죠. 보다 많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경쟁자가 보다 많이 줄어들어야 할테니까요. 빗금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아예 경쟁자들을 배제해 버리는 것만큼 경쟁에 유리한 것도 또 없고 말이죠. 타자를 고려하고 배려하면 할수록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쾌락은 적어지는 법이니 빗금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빗금이 실은 이익보다 고통을 더 많이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어 놓은 차별과 배제의 빗금은 언젠가 내게도 그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빗장은 이익에 따라 임의로 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저 파우츠 말대로 윤리적 영역의 확장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에 대해선 신중한 고민과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죠. 그 고민과 논의의 시작을 이 책, '침팬지와의 대화'와 더불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그 필요성을 충분히 느끼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며 그 여운 속에서 동물의 권리와 나 아닌 다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정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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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7-10-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금에 관한글이 인상적입니다

2017-10-3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11-0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팬지뿐 아니라 많은 동물을 실험에 이용했죠 그런 걸 처음 할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걸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물도 권리가 있죠 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하면 안 될 듯합니다 말도 사람과 다른 말을 쓸 뿐 같은 동물은 서로 말하겠죠 사람보다 간단할지라도... 사람은 그런 것을 알게 되고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는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