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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지금을 3불(不)의 시대라고 한다. 불확실, 불안정, 불안전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 실례 하나를 본 적도 있다. 바로 친구의 아버지에게서다. 정년 퇴직을 한 그는, 고정된 수입이 있으면 노후 생활이 한결 안정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알토란 같은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박했던 꿈은 오래 가지 않아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갑자기 들어서 버린 것이다. 이것은 친구의 아버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가게 매출을 마구 갉아먹더니 결국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여보려고 편의점 가맹점 계약까지 해지하려 했으나 그조차 힘들었다. 물어야 할 위약금이 엄청났던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한숨과 근심만 늘어났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신 아버지가 이제는 좀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친구의 얼굴도 같이 웃음을 잃었고 어느새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정한 현재를 낳았고 삶마저 불안전한 상태로 내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만나 듣게 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런 모습이었다. 지위 불문, 학력 불문, 성별을 불문하고 불행한 사연들이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딘가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다시 열린 것만 같았다. 나보다 손에 가진 것도 많고, 등으로 기댈 곳 또한 훨씬 넓은 이들조차 넋두리와 함께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노라면, 절로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멀다 않고 들려오는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 소식에다 날마다 치솟는 전세, 달마다 압박이 들어오는 대출 이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해마다 줄어드는 정년의 기한도 모자라서 다가가면 갈수록 캄캄하기만 하는 노후까지도 내 불안과 걱정을 키우려 팔을 걷어 붙이며 거들고 나서는 판이다.
이런 이유로 내게 말런 제임스의 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그냥 소설 속 이야기로 생각되지 않았다. 마냥 강 건너 불구경 할 수 있는 남의 이야기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비록 소설의 무대가 76년부터 91년까지의 자메이카이고 그 중심엔 76년 12월 3일에 일어났던 밥 말리의 암살 미수 사건이 있다고는 해도 그 근본에 짙게 서려 있는 공포와 절망은 지금 여기서 내가 보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본질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며 자신의 육성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된 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단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돌다가, 혹은 대낮의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다가도 문득 날아온 총알에 나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이 어이없이 죽어버릴 수 있는 무법 천지의 '킹스턴'이란 게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게토에서 목숨이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1권, p. 33)
매일 자신을 거세게 억죄어 오는 파멸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앞으로 이런 상황이 변하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해 버린 자들의 고백록이었다.
에이트레인즈와 코펜하겐시티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켜보는 것밖에 없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달콤한 목소리는 범죄와 폭력이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다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지는 일단 기다리고 봐야 한다고 속삭이지만, 여기 에이트레인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단 보고 기다리는 것뿐이야.(1권, p. 27)
선택 그리고 그 여파. 바로 이것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밥 말리는 중심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런 목소리들이 비로소 선명하게 표출되는 계기이자 드러난 목소리들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형태로 정돈 되도록 만드는 매듭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소설 속에서 개최한 콘서트가 자메이카를 양분하여 대립하고 있었던 두 세력인 인민국가당과 노동당을 서로 손잡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는 두 번에 걸쳐 그것을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엔 미국의 CIA와 조시 웨일스가 공조한 암살 시도로 무산되었고 다음엔 겨우 이뤄지긴 했으나 끝내 무참한 살육전 속에 소거되고 말았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밖에서는 세계의 중심이었을지 몰라도, 자메이카 안에서는 그저 가난한 아이에게 온 부유하고 행복한 정경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에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는 피상적인 위안과 힘이었으며, 빠져들면 들수록 더욱 가혹한 배신이 뒤따르는 위험한 동경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밥 말리가 자메이카에서 한 것은 비록 그 동기에 일말의 진실은 있었다 해도 서투른 봉합에 불과했다. 자메이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거나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모든 일들이 단 일년 만에 희망찬 것에서 희망 없는 것으로 바뀌어버리는지는 누가 알겠나?(2권 P. 191)
그의 삶이 진짜 자메이카 삶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롤링 스톤>지의 기자로 밥 말리의 콘서트 취재를 위해 들어왔다가 뜻하지 않게 암살 미수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버린 미국인 알렉스 피어스의 말마따나 자메이카 사람들에게 밥 말리의 삶은 그저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게토가 주는 교훈은 오히려 폴 매카트니가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에 대해 했던 이야기와 가깝다. 어둠밖에는 없단 말이다. 서퍼라라는 서파라는 모조리 집 없는 카우보이고, 거리라는 거리는 모두 어딘가의 노래 속에 피로 쓰여 있을 총격전을 품고 있다. 킹스턴 서부에서 하루를 보내면 이 지역 최고의 권력자가 자기 자신을 조시 웨일스라고 부른다는 것이 완벽하게 이해된다.(...) 무법상태라는 사실만 가지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마치 레게 가수가 오래된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듯, 이들은 신화를 잡아채서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1권. p. 167)
신화는 안전하다. 그것은 현실이 메울 수 없는 간격 저 너머에 절대적으로 격리되어 그 어떤 현실의 오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저 예쁘기만한 크리스마스 카드인 것이다. 그는 같은 시기 게토에서 늘 불안과 공포에 푹 절여져 절망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자메이카 사람들과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변화가 저마다 같은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똑같은 처지의 이웃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 비로소 일어나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을 일으키고 더 크게 확장시키는 중심은 신화가 아닌 현실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지여야 하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소설은 밥 말리를 가장 중요한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리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허락 하면서도 정작 밥 말리의 육성만은 일부러 배제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밥 말리는 오로지 이야기 속 인물로만 존재한다. 신화와 똑같이. 또한 그래서 작가는 자메이카의 가장 불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을 오로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로만 채워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 자메이카는 오로지 밥 말리의 노래로만 세계에 알려졌고, 정말로 거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노래에 가려져 세계로 전혀 전해지지 못했던 것이다.(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UB40가 커버하기도 했던 'Kingston Town' 이 아닐까 한다. 이 노래는 킹스턴에 대한 낭만적 향수로 한껏 덧칠 되어 있는데, 노래만 들으면 누구라도 킹스턴을 막연히 그런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소설이 펼쳐 보이는 킹스턴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이 노래가 비록 밥 말리의 노래는 아니나 자메이카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라는 점에서 노래가 외부에 내부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의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듯이, 신화 속 목소리들은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밥 말리의 노래는 신화 속 목소리였다. 비록 그 노래가 자메이카의 어두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해도 정치가 아니라 미학의 범주 내에 있었고 그랬기에 듣는 이들은 피상적인 공감만으로도 자메이카에 대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정당화하는 게 가능했다.
허나 가수가 하지 않은 말은, 나 역시 겁나서 못 하는 얘기라오. 이 모든 게 나한테 다시 돌아오리라는 얘기 말이오. 내게. 이 코펜하겐시티 최고의 배드맨에게. 허나 배드맨은 그저 배드맨일 뿐이니까. 악만 가지고 음모를 당해낼 수 없는 거지. 악만 가지고 사악함을 당해낼 수도 없고. 정치는 이제 새로운 게임이 되었고, 그 게임을 하려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할 테지.(1권, p. 246)
노래는 노래였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것이 밥 말리의 노래가, 스티비 원더가 그의 죽음을 추모한 노래를 만들 정도로, 전 세계에 널리 퍼졌지만 정작 자메이카 내의 죽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던 이유였다. 소설은 76년부터 91년까지 시기 별로 나누어 그 때의 목소리들을 담고 있고, 그 시기의 제목을 밥 말리의 노래 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형식으로 노래와 목소리들이 처한 자메이카 현실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진정한 목적은, 밥 말리의 커다란 목소리에 가려져 버린 밤-밤이나 니나 버지스 등 진짜 현실 속의 작은 목소리들을, 알렉스 피어스가 했던 것처럼(소설의 제목은 그가 신문에 연재하는 논픽션의 제목이기도 하다.) 온전히 복원(다중 화자를 가져오고, 그 화자가 가진 의식의 흐름을 가감없이 재현한다는 점에서)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메이카 바깥 사람들은 전혀 알 수도, 느껴 볼 수도 없었던 당시 자메이카의 진짜 현실을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히 체험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정말로 충격 속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 밥 말리의 노래를 익히 들어보긴 했으나 설마 그 때의 자메이카가 이 정도로 살육과 공포로 넘쳐나는 곳이었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충격은 밤-밤의 부모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2권 후반에 이르러 조시 웨일스가 뉴욕 브롱크스의 한 크랙 하우스에서 임산부(그녀의 이름은 모니파다. 임산부의 이름과 그녀의 과거 삶은 알렉스 피어스의 논픽션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게 되는데, 그 때 우리는 임산부라는 보통 명사와 모니파라는 고유 명사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임산부로 표기되었을 때의 그녀의 죽음은 당시 크랙 하우스에서 죽은 많은 불행한 죽음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지만, 이름과 과거를 얻고 난 뒤에 다가오는 죽음은 나처럼 세상에 존재했던 한 고유하고 독립적인 개인의 삶의 철저한 파괴로 보다 묵직한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호에서 희생 당한 이들을 신문 지상으로 볼 때와 분향소에서 영정 사진으로 접할 때, 그 죽음의 무게를 전혀 다르게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육중함, 밥 말리의 노래가 휘발시켜 버렸던 자메이카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고 있던 한 개인이 가진 삶의 무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바라는 걸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육할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읽는 동안 충격과 전율이 소설이 주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투명하게 드러난 화자들의 내면을 보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조시 웨일스처럼 아무리 괴물이라 하더라도 원래 괴물로 태어나는 이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나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삶이 가져다준 타격에 이리 휘말리고 저리 내몰리다 보니 가지게 된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1966년. 어떤 인간도 1966년에 들어갈 때 모습 그대로 나올 수는 없는 거요. 발라클라바의 몰락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심지어는 그 일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가져갔소. 나는 그 일을 지지했소이다. 조용히도 아니고 소리를 높여서 말이오.(…) 1966년. 모든 일은 안식일에 일어났소. 조시 웨일스는 그 때 기술을 배우던 밀러 씨네 자물쇠 공장에서 자기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소. 예전에는 한 번도 무슨 정당을 지지한 적이 없던 사람들의 골목을 지나 집으로 오고 있었지. 지난 금요일에 정치인이 거기 사람들한테 찾아와 입 닥치고 총을 쏘라고 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요. 사람들이 조시 웨일스에게 총을 다섯 발 쐈소. 다섯번째 총알을 맞았을 때 조시 웨일스는 더러운 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소.(…) 3주 후, 그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이 걸어 나왔소.(1권, p. 176)
그것은 파파-로도, 밤-밤도, 데무스도 그리고 위퍼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현재는 저마다 겪게 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안아버린 절망 가운데 그들이 스스로 한 선택이 낳은 산물이었다.
선택, 읽으면서 나는 이 단어가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비록 가혹한 현실이 그들을 선택의 순간까지 내몰기는 했어도 선택만은 그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화자들을 일종의 범주로 묶어 구분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 범주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도피, 복수 그리고 욕망이다. 다시 말해, 어둡고 힘든 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달아나기에 바빴고(도피),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입은 불행의 대가로 남들도 똑같이 불행할 것을 요구했으며(복수) 또 다른 이들은 그 현실을 오히려 자기 이익 추구의 발판으로만 삼았다(욕망). 여기에 따라 화자들을 나눠보자면, 니나 버지스와 알렉스 피어스가 '도피'에 속하고 밤-밤, 데무스, 파파-로와 조시 웨일스가 '복수'에 속하며 마지막으로 배리 디플로리오, 루이 존슨, 닥터 러버와 위버가 '욕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렇게 나누기는 했으나 사실 이들의 선택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이란 알고 보면 그저 불안하기만 하고 압도적인 무게로 자신을 내리누르고만 있는 현실 안에서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점점 작아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들 모두 자신의 삶에서 불현듯 괴물을 맞이했고 바로 그 괴물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소설 속 이야기들이 내게는 문학적 허구나 남의 이야기로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괴물이라면, 자메이카만큼은 아닐지라도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불안한 우리 현실 속에서도 늘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화자들의 고백은 내게 타산지석의 목록으로 다가왔다. 타산지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했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는 밥 말리의 콘서트가 그랬듯이 한 마디로 실패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니나 버지스가 그러하다. 그저 달아나기로 결정한 니나 버지스는 킴 클라크에서 도카스 파머로 거듭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마저 자메이카에서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미국의 마이애미와 뉴욕으로 계속 달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감은 갈수록 엷어질 뿐이다. 이것은 그녀가 홀로 자립하지 못하고 늘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로 한층 더 부각된다. 나는 특히 이 니나 버지스에 주목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선택이 바로 내 선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랬다. 정면으로 관통하기 보다는 그저 이 소나기가 빨리 그쳐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불안과 공포에 대처하는 오래된 내 방법이었다. 니나 버지스가 간절히 피난처를 찾았듯, 나도 우회로가 발견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니나 버지스가 잘 보여준 것처럼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더 왜소해지고 불안해지며 자꾸만 존재의 변방으로 한없이 밀려날 뿐이었다. 같은 범주에 있었던 알렉스 피어스 또한 결국엔 유비에게 붙잡혀 다리에 총을 맞았듯이.
그렇다고 파파-로나 조시 웨일스의 선택 또한 나의 대안은 될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은 자신에게 닥쳐온 불안과 공포에 정면으로 맞섰으나 택한 방법이 잘못 되었다. 그들은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원래는 인간이 되고자 잠시 괴물이 될 생각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킨 그들은 모조리 그 자신도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시켜야만 하는 타자가 되는 운명에 처해 버렸다. 복수를 위한 모든 행동은 끝내는 자신의 파멸로 되돌아올 부메랑일 뿐이었다.
일 년은 한 세기와도 같을 수 있는 시간 아니겠소. 괴물과 싸우는 남자는 누구나 괴물이 되니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모든 걸 죽여버린 살인마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킹스턴에만 최소 한 사람 있으니 말이오. 사람들은 내가 미쳐버린 게, 학교 다니는 아이를 실수로 죽여버린 일에 자기만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고 하오. 허나 내가 정말로 미쳐가는 까닭은, 그 일이 신경쓰여야 마땅한데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더이다.(1권, p. 283)
욕망 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과는 피차일반이었다. 그들 역시 니나 버지스만큼이나 변방으로 내몰렸고, 조시 웨일스처럼 파멸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내가 왜 이 소설을 타산지석의 목록으로 불렀는지 알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수 많은 고백록들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들려주고 있었다. 단 하나.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의 것만 빼고.
이 소설엔 소설 전체를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처럼 희망과 절망으로 양분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소설에서 오직 유령으로 존재하는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역시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피터 나세르가 그것이다. 아서 조지 제닝스가 희망의 존재라면, 피터 나세르는 절망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은 이미 시작에서부터 피터 나세르에게 죽임을 당한 상태다(이것은 소설에서 직접 언급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나중에 그를 죽인 사람이 미스터 P로 불려지는 것을 봐서 어느 정도 추정되는 사실이다.). 그는 실존 인물로 실제 역사에서 자메이카를 전혀 다르게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피터 나세르에게 살해당해 버렸고 그 결과 소설처럼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자메이카가 도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작가는 반전을 마련한다. 아서 조지 제닝스가 그대로 사멸하지 않고 유령이 되어 시대를 거듭하여 부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비참한 자메이카의 현실에 대한 침묵의 관찰자가 된다. 비록 그의 목소리가 현실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지라도 정작 소설 속 역사는 그에게서 첫 시작이 열리고 각 시대 또한 그에 의하여 매듭을 짓게 된다. 그는 유령이지만, 소설 속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으며 모든 사태의 진실 또한 파악하고 있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가져온 것일까? 나는 정말 궁금했다. 소설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충고나 권유를 발견하지 못한 나는 만일 이 소설에 그래도 대안 같은 것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두 가지 점이 눈에 띄었다. 소설에서 아서 조지 제닝스처럼 유령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대부분 무고한 희생자들이며 그들은 오로지 타자를 위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 특히 오렌지 스트리트 방화 때 불을 끄다가 조지 웨일스에게 살해 당한 뒤 유령으로 다시 부활한 소방관의 존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이나 소방관 모두 타자를 향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것도 순전히 무고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타자를 향한 삶이라는 측면이 강조 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부활하여 비록 유령의 몸이었지만 영속했다. 자메이카의 역사가 어떻게 흐르는지 모조리 들여다 보는 관찰자가 되었고, 소방관은 죄인의 바로 곁에서 그들의 죄를 소리쳐 고발하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개인의 고백이라는 파편만이 존재하는 소설에 역사라는 일정한 틀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오직 유령뿐이었다. 그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진실을 기록하여 역사를 만들었다.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했던 개인들은 시간을 늘 현재 속에 고이게 만들었지만 유령은 말없이 역사를 빚어 다음의 문을 열고 밀어내 미래로 흐르도록 하였다. 문득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말이 생각났다. '타자가 바로 미래'라고, 그는 말했다. 유령이 현실 속 인간들에게 절대적 타자라는 것과 바로 그 유령들이 유일하게 역사를 만들어 미래로 내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레비나스의 말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바로 이 타자를 지향하는 삶이 대안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데,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그 자가 바로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정반대의 존재인 피터 나세르였다. 1985년 8월 14일.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의 눈에 들어온 피터 나세르의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니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는 내내 나를 죽인 남자는 여전히 죽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썩는다. 나는 그자의 비서가 작은 파란 뱀 같은 정맥들이 우글거리는 그자의 허연 두피를 매만지며, 그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검은 염색약으로 씻어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자의 새 아내는 그걸 만지려 들지 않는다.(...) 인민국가당은 그자의 정당을 권력의 게임장 밖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매일 아침 꼭 출근이라도 하듯 옷을 입는다. 그토록 이상한 10년이다. 70년대와는 전혀 달라 보이고 그자는 더이상 자신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로 길을 잃었다.(2권, p. 543)
피터 나세르는 소설에서 가장 괴물 같은 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조지 웨일스나 닥터 러브와 같은 괴물들을 양산할 수 있는 자다. 그야말로 극한의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겐 부활이 없다. 그의 육체는 오직 썩어들어갈 뿐이다. 미래도 없다. 그는 미래가 와 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물 웅덩이처럼 고인 시간과 고립된 육체 속에 유폐되어 아내조차 혐오하는 존재가 되어갈 뿐이다. 이는 모든 시간에 존재하고, 모든 존재를 넘나드는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얼마나 다른가. 이 영속과 부패 그리고 확산과 유폐라는 뚜렷한 대조군 앞에서 내가 선택할 샬레(Schale)는 명확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목소리들이 재현한 소설 속 현실을 관통하면서 찾아낸 내 나름의 대안을 이렇게 밝혀보았다. 이 순간, 기억의 노트에 또렷한 필체로 적어두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하려 들지 말고 정면으로 맞설 것. 또 다른 하나는, 대응에 있어 자기만의 입장과 판단을 넘어 타자의 상황과 생각을 지향할 것. 이것을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에 대한 내 글의 간략한 브리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상상해 본다. 내가 지금 소설을 통해 70년대의 자메이카를 들여다 본 것처럼, 먼 미래의 누군가가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분명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그역시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세계란 IS의 민간인 무차별 테러가 대표하듯이 그 때의 자메이카만큼이나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고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팽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성 보다는 감정이, 타자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판단 보다는 무분별한 규정과 적대가 판을 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배려가 없다는 점에서 킹스턴에서 에이트레인즈와 코펜하겐시티를 오갔던 총탄과 다를 바 없다. 아마도 이 역시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일 것이나 소설이 잘 보여주었듯이 결국엔 자신의 불안만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이 시대를 거듭해 반복되는 것은 이제라도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달리해야 할 절실한 요청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정녕 60년대 히피들이 자신을 향한 총구에 꽃을 꽂았던 것처럼 저격이 아니라 포용의 손을 내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를 격리로만 몰고가는 불안과 공포라는 괴물을 오히려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겨내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 고민이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면 그 숙고의 시작을 이 소설로 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