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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상실의 시대다. 작년엔 세월호, 올해는 메르스. 반복된 상실. 늘어나는 상처. 도래하지 않는 치유. 웃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애도와 우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떠나간 자들을 애도하면 할수록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우울하기만 하다. 희망은 누구의 주머니에 들어있기에 이리도 보이지 않는 걸까? 모든 것이 겨울의 해변처럼 공허하다. TV를 보고 싶지도 않고 음악을 듣고 싶지도 않다. 한겨울의 숲처럼 침묵만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난 책만 벗하였다. 그리고 하루키.
그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었다. 단편집이다. 비틀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드라이브 마이카'와 '예스터데이'를 비롯하여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까지, 무지개도 아닌 것이 7개의 단편을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다. 제목 그대로 이 모든 단편 속의 남자들에겐 여자가 없다. 과거에 없었거나 현재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한 마디로 상실의 거주자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라는 대상이 아니다. '없다'는 상황이다. 수면 위로 던져진 돌처럼 문득 도래한 상실. 그것이 그리는 내면의 파문. '불모의 행성'과도 같은 상실한 자들의 그 모든 '황폐한 광경'을 궤도 위성이 사진을 찍듯 멀리서 조용히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여기 집합한 단편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러니 이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상실로 가득한 거대한 수영장 밑바닥에서 그 무게에 짓눌려 있는 나와 같은 자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그러자 갑자기 소설은 눈감고 귀막고 그저 내부의 호흡만 느끼고 있을뿐인 내게로 하루키가 내려와 대화나 하자면서 어깨를 툭치는 것으로 변했고 그가 가후쿠와 기타루, 도카이와 하바라, 기노와 잠자 그리고 엠에 대해 마치 능숙한 바텐더가 컵을 닦듯이 조금은 무심한 어조로 들려주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들의 동료라는 것을.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거주지에 세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상실로 인한 무력감과 죄책감을 임대료로 치뤄 가면서.
그들의 실수는 나의 실수였다. 그들의 오해는 나의 오해였다. 그들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었다. 가후쿠와 기타루처럼 나는 나를 너무 특별하다 생각했다. 그들이 정말 잃었던 것은 아내와 아키라는 대상이 아니었다. 실은 아내와 아키의 배신으로 이제 더 이상 특별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된 자기 자신이었다. 더 이상 그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정말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제 조금 깨닫는다. 왜 하루키가 이런 언질을 하필이면 연애를 통해 보여주는 지를 말이다. 사랑이야말로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 아니던가. 사랑으로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보편'에서 유일한 나라는 '특수'로 전이한다. 나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 된다. 어제까지는 세상에 끌려다니기만 했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사랑으로 인해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게 된다. 누구나 빛이 되려하지 그늘이 되려 하지는 않는 법. 언제까지나 중심에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지속의 열망은 중독을 낳는다. 그것을 우리는 집착이라 부른다. 도카이와 하바라가 그랬듯이. 그러므로 상실의 고통은 상대가 아니라 실은 나와의 결별에서 온다. 더이상 그런 나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사랑한만큼 고통받는 것이다. 결별의 아픔이란 갑작스런 금단에 따르는 후유증에 다를 바 없다. 하바라는 고백한다.
"그건 병 비슷한 게 아니라 분명 진짜 병이었어. 병 때문에 한참동안 열에 들떠 착란상태였던 거지."(p. 211)
그러니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진다. 기노처럼 나를 떠나는 것이다. 더이상 웅크리지 말고 일어나 나를 내던지듯 위로 활짝 팔을 펴 드는 것이다. 그가 이불 속에서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가장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정작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 웅크림은 나의 집착이 구현된 체위였다. 하지만 집착이 가져온 것은 더 큰 공포 뿐이었다. 그 때서야 기노는 비로소 타자를 생각했다.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나를 내어주고 세상의 새를, 회색 암고양이를, 가게 앞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늙은 버드나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짜 사랑이란 내가 아니라 타인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인 것을. 더불어 나도 각성한다. 내가 가진 상실의 아픔은 떠나버린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는 것과 정말 그들의 상실을 아파한다면 나를 내려놓고서 이전보다 더 강하게 세상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더이상의 말이 필요할까?
하루키는 말한다. 이제 네 안의 무게를 비워봐. 잠자와 엠이 그랬듯이. 너를 비우면 비울수록 상실은 또 하나의 문이 되어줄 거야. 그리고 넌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겠지. 이제 곧 저 높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될 너처럼. 그런걸까? 그럴 지도 모른다. 엠이 말한 스페이스가 기억난다. 그녀는 음악의 취향은 스페이스의 문제라고 했다.
"이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거든. 그곳은 정말로 넓고, 칸막이 같은 것도 없어. 벽도 없고 천장도 없어. (...) 단지 그 곳에 있기만 하면 돼. 그냥 눈을 감고 스트링스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기면 돼.(p. 334)
나는 끄덕인다.
지금 내가 가진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 얼룩' 같은 상실의 아픔을 희석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더 큰 세상에 나를 내맡기는 것 밖에는 없다고. 뒤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눈과 귀를 막는 대신 더 많이 보고 들어야 한다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펴듯 마음에 새겨 나간다. 그리고 떠오를 생각을 한다. 나는 하루키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내겐 당신이 '드라이브 마이카'의 미사키인 셈이로군요."
물론 과묵한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가후쿠처럼 나도 그 침묵에 감사했다.
바닥이 조용히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