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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러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과거 1호 지구에서 읽었던 '파피용'이라는 공상 과학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아의 방주'라는 주제에 착안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태양계로 실어 나를 우주선을 제작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 때 이 '파피용 프로젝트'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인류가 동일한 과오를 영원히 반복하지 않게끔 최선의 후보자들을 선발하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6권 p. 373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와 그 후에 나왔던 '타나토노스', '천사들의 제국', 그리고 '신'은 하나로 모아지는 연속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미'는 주인공이 조나탕 웰즈와 니콜라 웰즈 그리고 쥘리 팽송 등으로 이후와 다르긴 하나 특히나 쥘리와 미카엘의 경우 베르베르가 주인공들에게 계속 같은 '팽송'이라는 성을 준 것은 아무래도 독자들이 이 이야기들을 일련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도록 배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볼 경우, 다소 주제가 뚜렷해 보이는 '개미'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작가 베르베르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썼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베르베르가 전혀 별개의 소재로 보여지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보여지기를 원했다는 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뜻한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다소 무리라는 걸 무릎쓰고 추정해 보자면 결국 '타나토노스'부터 '신'까지 이어지는 미카엘 팽송의 여정은 처음에 그가 개미들을 통해 구축했었던 세계를 다시금 인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거는 물론 '개미'에서 만들어진 세계의 디테일들이 '천사들의 제국'이나 '신'에서 설정된 세계의 디테일과 유사하다는 것에 찾아진다.

 

 일례로 '개미'에서 에드몽 웰즈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 개미들과 통신할 수 있는 로제타 석을 찾고 결국  지하실에 유폐된 이들과 합류하여 개미와 공존해 살아가는 니콜라 웰즈는 그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들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이는 '신'에서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자신이 다스리는 1호 지구의 신으로 군림하는 것과 방식이 유사하다. 이런 식으로 은연중 드러나는 유사성이 베르베르 작품 세계의 원점엔 역시나 '개미'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개미의 세계를 그저 소설 속 상상의 세계로 놓아두지 않고 인간의 체제로 현실화 시켰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난관과 그 난관의 해결에 필요한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미카엘 팽송의 여정에서 베르베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제3인류'도 그 연속성 위에 있는 작품이다.

 그건 분명하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이전의 여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었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여기서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아예 이번은 그 '개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천재 곤충학자이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쓴 장본인이기도 한 에드몽 웰즈의 손자 다비드 웰즈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다. 이건 어쩌면 하나의 단서일까? '제3인류'가 사실은 인간판 '개미'라는 것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앞서 '개미'에는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 니콜라 이야기를 했지만 '제3인류'에도 그런 존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이아다. 아, 이런 식으로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신이 나오긴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여기서의 신은 지구 그 자체다. 지구가 사람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그는 신만큼이나 전지전능하다. 필요하면 기상도 마음대로 조정하고 쓰나미도 일으켜 원하는 곳을 타격할 수 있다. 그는 병원균까지 창조하고 조종할 수 있다. 가히 신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이아란 이름을 붙여 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지의 여신 이름을.

 

 고대 그리스 신들은 신탁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르 전할 수 있었다. 이 신도 그렇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할 수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이아란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그 이름을 언급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구 자체를 인격신으로 여길 경우 얼른 떠오르는 것은 전작 '신'에서의 미카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똑같은 1호 지구를 담당하여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구 위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던 미카엘.

 

 

 순전히 자신의 생존만 신경쓰고 지구 위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은 신경쓰지 않는 '제3인류'의 지구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미카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지구라는 신의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냉혹성과 맹목성도 어느정도 이해는 되었다. 아마 당신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이 지구라는 신을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구는 자신의 기억을 유지하는, 인간으로 치면 뉴런과 같은 석유를 자꾸만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인간을 응징하는데, 그게 신종플루같은 독감균을 만들어 거의 수십억 단위로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인간들은 쓰나미다 뭐다 해서 마치 발로 일군의 개미들을 짓밟듯 지구에의해 가볍게 제노사이드를 당한다. 그동안 인간들에게 당한 지구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나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인간인 이상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걸 코를 풀듯 가볍게 해버리는 지구를 무턱대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구에겐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그에게도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아주 먼 옛날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운석을 기억하시는지? 지구의 잔혹함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지구는 정말로 갑자기 다가온 소행성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것이다.

 

 테이아.

 충돌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 때문에 내 중심축은 0도에서 15도로 기울어졌다. 그에 따라 사계절이 생겨났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p. 105) 

 

 다행히 화성의 위성 하나가 대신 희생해 지금은 지구의 달이 되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 공포가 너무 컸기에 지구는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지 몰라 매일을 두려움 속에 보내게 되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신'의 미카엘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미카엘이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것과 똑같이 생존을 위해 인류에게 개입한다. 그러니까 우리 인류의 진화는 다름아닌 지구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인류는 바로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선별되었던 것이다.

 

 '개입'과 '선별'은 베르베르의 전 작품을 통해 이어지는 핵심 주제다.

  이같은 지구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피조물을 이용하는 것은 첫 작품 '개미'에서도 두드러졌던 일이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개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이 새로 추대된 클리푸니 개미 여왕의 음식 공급 중단으로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이자 개미들에게 지하실에 갇힌 자신들을 구조해달라는 메세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하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이건 '제3인류'의 지구가 자신에게 생존의 위협이 되는 행성을 인간들을 시켜 폭파하도록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제3인류'가 인간판 '개미'라는 것도 이같은 유서성 때문인데 아무튼 지구는 그 때문에 원래 거인족이었던 인류를 멸망당하게 만들어 지금과 같은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도록 초래하고 말았다. 플라톤이 대서양에 있었다고 말했던 '아틀란티스'도 그 희생양이었다. 지구는 아틀란티스의 거인 인류를 자신의 목숨줄을 보호할 수단으로 선별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들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복종했다. 영화 '아마겟돈'처럼 로켓에 핵폭탄을 실어 행성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커다란 그들이 탑승할 수 없어 정밀 타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에서 직접 조종할 수 있도록 소형화된 인간을 만든다. 평균 키가 170cm 정도의. 바로 우리 같은 현생 인류를 말이다.

 

 지금의 인류는 그들에 의해, 그와 같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베르베르는 그런 우리를 '제2인류'라 부른다. 물론 '제1인류'는 거인들이다. 그렇다면 '제3인류'는? 그렇게 이 소설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류의 진화지만 지구 입장에서는 보다 자신을 더 잘 생존시켜줄 수단적 존재들의 선별이다. 프롤로그가 지난 뒤 책은 처음부터 이 선별을 들고 나온다. <인류 진화의 미래>라는 연구 주제를 두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연구인가를 선별하는 콘테스트가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 다비드 웰즈는 '인류의 소형화'를 들고 나온다. 인류 중 가장 작다는 피그미족이 각종의 병원균으로 부터 면역되어 있음에 착안하여 소형화만이  미래에 보다 더 생존에 적합할 것이라 내다 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샤를 웰즈는 다비드 웰즈의 의견과는 반대로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보았다. 그는 애초 인류는 거인이었고 결국 진화는 오똑이처럼 다시 균형을 찾아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본 것이다. 지금 인류의 신장도 나날이 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비드 웰즈의 소형화는 에드몽 웰즈의 '개미'에 관한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건 사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샤를 웰즈 역시 거인화를 주장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인 에드몽 웰즈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기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연쇄되어 있는데 이는 여주인공인 오르르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도 아버지란 존재는 공백이다. 아버지가 있긴 있지만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오르르의 엄마는 오르르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키웠다. 그녀 역시 다비드가 참가했던 인류 진화의 미래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인류의 진화는 여성화였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방사능에 잘 견딘다는 등의 근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아마조네스를 연구하려 한다. 그 연구를 하러 떠나기 전 그녀는 스스로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찾아온다. 여기서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대하기 보단 거의 친구처럼 대하는데(어른으로 성장한 후 처음 아버지를 만난다는 감상주의가 여기엔 모조리 탈색되어 있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베르베르의 의도가 짐작된다.

 

 베르베르, 그는 왜 이렇게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가 작품에다 내내 새기고 있는 개입과 선별이라는 주제와 관계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건 일종의 거부이다. 그러니까 존재에 대한 거부이다. 왜 그 존재를 거부하는가? 그건 바로 그가 개입과 선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개입과 선별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니었던가?

 

 소설에서 개입과 선별은 누가 하고 있는가? 바로 지구다. 자신이 살기 위해 그는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선별한다. 인류의 진화는 그 결과였다. 다비드와 오르르의 이론들조차 지구에겐 더 좋은 선택지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그런 그에게 가이아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음을. 가이아는 모성의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의 모습은 부성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베르베르가 직접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낱 소행성이 아니다. 나는 한낱 암석 덩어리가 아니다. 나는 한낱 수동적인 광물성의 구체가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독특한 존재이다.(p. 106)

 

 이같은 지구의 자기 과시 발언이 있은 뒤 베르베르는 뒤이어 국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통령을 등장시킨다. 장면배치를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면이 바뀌고 프랑스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내뱉는 대사는 이것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나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오!"(p. 106)

 

  하하하! 갑자기 김문수 도지사가 떠오른다. 통치자란 하나같이 다 그런 것일까? 여지없이 자기현시의 욕구로 똘똘 뭉쳐져 있다. 지구나 프랑스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장면의 연쇄나 대사의 받아치는 타이밍을 통하여 베르베르는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지구 역시도 프랑스 대통령만큼이나 권위주의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런 아버지들이 하는 일도 똑같다. 개입과 선별이다.

 지구는 자기가 살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하고 프랑스 대통령은 역사에 오래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한다. 인류 진화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그 주제를 선별하는 것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베르베르가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개입과 선별을 거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자, 인류의 진화도 나왔고 아버지의 거부도 나왔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베르베르의 소설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아버지들의 아버지'다. '제3인류'가 인류 진화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제3인류'는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얼른 보면 구성이 비슷하다. '제3인류'가 샤를 웰즈의 죽음에서 시작하듯이 그 소설도 한 고생물학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거기다 '제3인류'에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맞부딪혔듯,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도 인류 기원의 모습을 두고 이론들이 서로 다툰다 아무튼 그 고생물학자는 인류가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그 연속성에 있어서 존재했던 미싱 링크, 즉 빠져 있는 고리를 드디어 찾아내었는데 그건 바로 지금의 인류는 인간이 돼지와의 교미를 통해서 나왔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야기는 현재 일어난 고생물학자 죽음의 미스터리 추적과 과거 최초 인류의 이야기, 이렇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결국 주인공은 고생물학자는 자살했으면 돼지와의 교미 끝에 현생 인류가 나왔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표면적으로는 근원의 아버지를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지금까지 진실로 알았던 아버지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내내 아버지의 말 안에서 그것에 매달려왔던 이가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건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와 마찬가지다. 베르베르에겐 이같은 통렬한 거부가 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아버지가 개입과 선별의 존재라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똑같이 지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에마슈'라는 소형화된 인류를 만들었던 다비드와 오르르 일행에게도 베르베르는 해피엔딩을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역 안에서 자유로이 삶을 살았던 그들이 에마슈에 관해서라면 여지없이 자신의 아버지들을 닮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장차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제3인류' 곳곳에 많은 죽음과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세계가 오로지 아버지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입과 선별의 제국이었던 신자유주의가 그랬듯이 그런 가득한 아버지들이 가져오는 것도 해고와 같은 죽음과 차별에 따른 아픔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베르베르는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존재라 할 수 있는 여성화와 소형화가 합쳐진 '에마슈'를 '제3인류'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베르베르는 거대한 3부의 첫 이야기인 이 '제3인류'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에마슈가 바로 남성이 아닌 '나탈리아 여신'이라는 여성의 말을 들으며 혁명의 선봉에 서는 에마슈 역시 여성이라는 점을 통해서.

 

  결국 베르베르는 이 모든 개입과 선별이 비극의 원흉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모두가 인간을 인간 자체로 바라보며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잣대만 강요하여 고유한 존재의 빛을 획일화된 감옥에다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또다른 작품 '인간'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지금 장난칠 기분이 나요? 잠시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어요.(p. 175)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우리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입과 고유한 존재 가치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 선별의 시선으로 인한 감옥에. 그 감옥 안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똑같은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로 지구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며 화가 나서 텔레비젼을 부셔버린 이지도르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한다. "온통 나를 때리고 찌르고 괴롭히는 것뿐이군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들의 이야기가 결코 저들의 이야기일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래서 베르베르는 아버지를 거부한다. 개입과 선별 따위 돼지에게나 갖다주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공백이다. 그대로 자유의 영토이며 그 자체가 긍정의 근거가 되는...

 '신'의 결말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최종 관문을 통과한 미카엘이 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건 빈 종이었다. 완벽한 공백. 거기서 베르베르는 에드몽 웰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읽기! 그리고 이 신성한 행위를 통하여 한 세계를 창조하기! 자네는 언제든지 상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한 권 집어 들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어."(p. 659) 

 

 이렇게 개입과 선별의 바리케이트를 넘어 담벼락 없는 상상의 활주를 확보하는 것. 베르베르가 소설들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과거에 우리가 어땠나나 미래에 우리가 어떠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이며, 그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긍정할만한 무엇이며 온전히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이지도르의 마지막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지 아니한가?

 

 "당신은 내게 무엇이 빠진 고리냐고 묻곤 했어요. 이제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과도기저 존재에 불과해요. 진정한 인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바로 빠진 고리에요." (p. 531 ~ 532)

 

 이는 다른 작품, '인간'에서 절망하는 라울에게 여인 사만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남녀 한 쌍이 우주에 살아 있는 한, 인류의 불씨는 살아있는 거에요. 어떤 감옥 벽도 그 불씨가 불꽃으로 활활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거에요."

 "글쎄요..."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믿어야 해요. 그들은 우리보다 이 곤경을 더 잘 헤쳐 나갈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사만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의심을 의심하라. 그러면 믿게 되리라..." (p. 175 ~ 176)

 

 사만타의 마지막 말은 베르베르 작품에 있어서 핵심과 같다. 사실 그가 그토록 천착하는 상상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의심을 의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제3인류'의 지구를 비롯하여 종국엔 비극만을 불러왔던 모든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은 '의심을 의심하지 않은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그랬듯이 의심은 두려움이 낳은 것이었으니 의심을 재차 의심하지 않은 건 그대로 두려움에 굴복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베르베르에게 상상력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만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베르베르도 두려움이란 오로지 부정적 가능성만 생각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의 감옥임을 믿는다. 그것도 진실된 정보가 바탕되지 않은 오로지 부정으로만 보려는 눈이 개입과 선별로 획득한 오해와 편견의 과실로만 이루어진 감옥.

 

  그 감옥의 창살들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르베르는 미래의 결과는 두려워하지 말고 과정 중에 되어가는 자신을 믿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 어떤 개입에도 굴하지 말고 선별의 시선에 주눅들지도 말라고.

 그리고 당부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통해 마음껏 자유를 활공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것이 베르베르가 보여주려는 인류 진화의 미래인 '제3인류'의 진정한 정체이리라!

 에마슈가 아니라...

 

 과연 맞을지, 안맞을지? 나는 이제 내기를 해보려 하는데 그 때문이라도 다음 이야기들이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개미를 제외한 지금까지 인용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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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소 복잡합니다.
어릴 때 베르베르를 접했던 그 충격과 놀라움, 경이 때문에 그에게 큰 것을 기대하는게 아닐까 싶어져요. 개미와 타나토스는 저를 정말 설레게 했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가 답을 줄거라고 기대했나 봅니다. '신'이라는 거창하고, 절대적인 제목의 소설에서 그런 기대가 컸었죠. 그리고 마지막 백지에서 그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져내리고, 저는 열린 결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동시에 분개하기도 했죠.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한줄 한줄 읽으면서, 그랬지, 아버지에 대해서 그랬어, 라고 동감하면서도 도저히 손을 내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베르베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ICE-9 2013-12-31 22:5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신'의 결말을 보았을 때는 좀 당황스럽더군요. 작가로서 뭔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고^ ^;...
이번 '제3인류'도 개미나 뇌의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좀 있어보이더군요. 요즘 제가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서 설정이나 전개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설정이나 구성상에 구멍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나 전염병으로 수십억이 죽었는데 윌드컵이 계속된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 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더군요. 어쩌면 이 리뷰는 오래도록 그의 작품을 보아온 사람으로써 어떤 정 때문에 좋은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아버지에 대한 관점, 그리고 개입과 선별이라는 아버지 질서에 대한 거부가 내내 눈에 띄길래 그런 쪽으로 한번 정리해봐야겠다 싶어서 쓴 리뷰입니다. 마녀고양이님이 베르베르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언젠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2013년 마지막 날이네요. 어둡고 긴 겨울의 한 굽이가 이렇게 지나가네요. 철도 파업도 그렇게 끝나고 더 춥고 긴 겨울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마녀고양이님만은 원하시는 일 잘 하시면서 건강히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