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소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3
미하일 조셴코 지음, 백용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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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소설'을 읽고나자 갑자기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였다. 언젠가의 밤, 그 친구는 입원한 병실에서 간호에 지친 그의 가족들을 잠시 쉬게 하느라고 홀로 그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내 손을 부여잡았었다. 그리고 숨 가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파... 도와줘..."

 
  당장 뛰어나가 간호사를 불렀다. 당직 의사가 달려왔고 휴식을 취하던 그의 가족들도 들어왔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고 죽은 듯이 자는 친구를 난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새벽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까지 내내 나를 잡았던 친구 손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라는 거대한 밀물은 나를 그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일상으로 떠밀려갔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그 손의 감촉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삶이란 건 무정하다. 또한 잔인하다. 언제나 예고 없이 이별을 가져다주어 참회할 순간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내게 있었던 그 많고 많은 평범한 날들 중 하나였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고 학생식당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오후 강의에서 살짝 졸았던 것까지도 똑같았던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 뒤, 도서관으로 가서 기말 리포트 준비를 위해 자료 복사를 했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도서관의 거대한 유리창으로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햇살이 책상 위로 자신의 붉은 나신을 드리우는 것을 보면서 난 그 소식을 들었다. 친구가 떠났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누군가 세상 전체를 진공관을 씌워버린 듯 정적에 휩싸여 버렸다. 아니,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려왔다. 흐느낌. 그리고 울먹이느라 띄엄띄엄 어렵게 이어지던 목소리.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마치 칼바람 앞의 문풍지 같았다. 그 손은 그날 밤 친구가 도와달라며 잡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 떨림은 질책으로 들렸다. 너는 어찌하여 그 날 밤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만의 일상에 골몰하느라 그를 무심히 잊어버리고 있었느냐 하면서 잔뜩 꾸짖는 것 같았다. 좀 더 신경 써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고 그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해 용서받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죄책감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때로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이 가진 비정한 손톱이 할퀴어버린 깊은 상흔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친구가 떠난 순간을 회상하면 더욱 괴로웠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그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난 밥을 먹으면서 오늘은 반찬이 별로네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게 사람을 정말 치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영원한 상실의 순간에서조차 동물적 일상 행위를 반복하게 만듦으로써 나를 더욱 더 구차하게 만들고 그런 내 뒤에서 삶이란 것은 크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가버린 친구가 생각났고 그 때 못했던 참회를 위해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건 이 소설에서도 그 때 내가 들었던 삶이 내는 비웃음 소리를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상소설'은 여덟 개의 단편들이 모여 있다. 그렇게 그 각각의 단편들의 주인공이 되는 존재의 삶을 하나씩 담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삶을 만만하게 본다. 그들이 가진 능력에 비해 현실은 무기력하다고 생각한다. 피아니스트 아폴론 세묘노비치도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반 이바노비치도 오케스트라에서 트라이앵글을 연주하여 세상에서 지극히 사소한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세상 변화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보리스 이바노비치 코토페예프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한결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패배한다. 자기가 하기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조율 가능해 보였던 삶은 그들이 매달리려 하자마자 그들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어 그들을 압도해 버린다. 결국 그들이 듣게 되는 건, 주저앉은 자신의 등을 짓밟고 서서 차갑게 웃고 있는 삶의 비웃음 소리뿐이다. 이 소설엔 그런 비웃음이 가득하다. 강인하고도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 무기력한 인간들을 가지고 놀면서 내는 야멸찬 비웃음 소리가 말이다. 듣기에 이 소설은 러시아 풍자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평가받게 된 것 역시 이 책에 가득한 비웃음 때문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그 비웃음 속에서 삶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서글픈 초상을 확인한다. 절망한 세묘노비치는 무덤지기로 살다 생을 마감하고 이바노비치는 그 모든 재산과 아내까지 빼앗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삶의 잔인함은 아무리 사소한 직분을 맡았다고 해도 내버려두지 않으며 '라일락 꽃이 핀다'의 볼로딘은 그래도 이 세상 사랑만큼은 고귀한 가치라 믿었으나 결국 확인하게 된 것은 사랑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이 고작 타산의 결과일 뿐이며 결국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낙담한다. 그렇게 그들은 패배하고 굴종하며 타협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이라는 장벽을 뚫고 나가겠다고 작심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는 건 그들 모두가 자동차 충돌 실험에 쓰이는 오로지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진 '크래쉬 테스트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했다. 이 소설은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연약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시관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연약한 크래쉬 테스트 더미들... 

                        그 연약함 때문에 서로를 껴안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 관람을 마쳤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비관이 아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은 확인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친구에게 새삼 참회의 편지를 써야겠다고 느꼈던 것도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셴코는 우리의 연약함이 종착지가 아니라 사실은 출발지라고 말한다. 즉 이토록 우리가 연약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홀로라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셴코는 말한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때문에 '무서운 밤'이란 단편에서 보리스가 하는 이 같은 호소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거기서 삶이 숨긴 잔인한 진실을 우연히 알게 된 보리스가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걸 듣게 된다.
 
"저... 제발 부탁인데요.... 이 순간 한 인간이 파멸하고 있습니다..."(p. 121)
 
  호소는 연약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어려움을 홀로 해결할 수 없기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 밤 내 손을 부여잡으며 도움을 호소했던 친구처럼 말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조셴코는 바로 여기서 우리가 연약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더욱 더 적극적이 될 것이다. 조셴코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토록 연약함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난 그 친구에게 참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잊고 무심히 내버려두었던 나를 말이다. 너무나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에 과연 친구가 나를 용서해 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미안함 때문에라도 앞으로는 더욱 다른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오늘 밤은 아주 긴 편지를 쓰게 될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 연약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또 없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 후회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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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1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안그래도 오늘 헤르메스님 생각했단 말이야!
이렇게 제 생각과 알맞은 시기에 찾아와주시니 반갑습니다... 헤헤
일단 댓글 먼저 달고 글을 읽어야지. 저도 마침 오늘 리뷰 하나 쓰려구요.

ICE-9 2012-12-17 03:26   좋아요 0 | URL
와! 그래도 절 잊지않고 생각해주는 건 소이진님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소이진님 리뷰를 읽지는 못하겠고 내일(라고 했지만 벌서 오늘이네요.) 얼른 달려가 확인할게요.^ ^

2012-12-1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2-2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마음 아팠습니다.
오래도록 남아있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니까요. 다들 그렇게 도움을 주고 받을 때도 있고,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고, 그게 인간인 듯 합니다. 편지를 쓰셨나요? 긴 편지가 되었을거 같아요.

헤르메스님, 그림은 헤르메스님께서 그리시는건가요?
살짝 뒤틀린 등짝이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

ICE-9 2012-12-29 02:27   좋아요 0 | URL
와! 달여우님 정말 반가워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을만 되면 이유없이 마음이 아려와요. 그동안 저도 모르게 널어놓은 아픔은 또 얼마나 될지 생각도 하게 되고... 그 탓인지 편지 정말 쓰기가 힘들더군요. 아직도 제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 미안함의 크기에 새삼 놀랐습니다. 쓰고 지우고, 때로는 구기고, 멍하니 있다가 좀 울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

네. 그림은 제가 그렸는데, 어떻게 하면 껴안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이게 될까 고민하다가 저렇게 그렸는데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시나요?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