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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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협회가 비 영어권 미스터리 소설중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인터내셔널 대거'는 우리나라에도 스릴러 '비스트'로 소개된 바 있는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다섯번째 작품 '쓰리 세컨즈'에 돌아갔다. 이로써 그들은 이미 형사 발란더 시리즈의 헤닝 만켈과 '밀레니엄 시리즈로 지금은 스릴러의 대표적 이름이 되어버린 스티그 라르손을 배출하여 이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간된 스릴러를 뜻하는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일종의 총본산으로 자리잡은 스웨덴 출신으로 바로 그들의 직계 계승자임을 입증하는 방점을 확실히 찍게 되었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르뽀타쥬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들의 작품은 한 마디로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 그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단순히 읽는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직접 바로 작품 속으로 가져오며 독자들에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여파를 항상 직시하도록 한다. 그래서 대단히 묘사가 현실적이며 르뽀타쥬가 그렇듯이 때로는 논쟁이 유발되도록 그것이 지닌 다양한 측면을 가감없이 펼쳐보인다. 이게 그들의 스타일이 르뽀타쥬라고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문학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게다가 그것이 문학적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사유든 행동이든 직접적이며 현실적인 참여를 불러 일으키도록 만든다. 즉 그 문제를 바로 독자 자신의 문제로 인지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그들의 문학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그렇게 사실성의 충실한 복원을 위해 작가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묘사하는 사건을 되도록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만일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소설들이 뭔가 지금까지 읽었던 같은 장르의 소설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면 아마도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러한 특징이 당신의 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을 건드린 게 틀림없다.

 

 그들이 이런 특징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들 자신에게서 연유한다. 스웨덴의 노르딕 느와르를 이끌어갔던 대표주자들인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은 모두 저널리스트 출신이었는데 바로 쓰리 세컨즈의 작가 안데슈 루술룬드 역시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고발문학적 성격은 만켈과 라르손이 그랬듯이 바로 그러한 출신에서 기인되는 탓이 크다. 더구나 콤비인 버리에 헬스트럼은 실제 형무소에서 복역까지 한 범죄자 출신이다. '쓰리 세컨즈'가 보여주는 스웨덴 형무소의 압도적 리얼리티는 분명 이 헬스트럼의 공이다. 그런데 헬스트럼 자신이 소설에 뛰어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막자는 동기도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사실상 참회와도 같은데 이러한 그들의 출신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이 사람들에게 만연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고발문학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쓰리 세컨즈'는 '경찰 정보원'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경찰 정보원이란 범죄조직에 잠입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할 정보를 알려주는 존재를 뜻한다. 뭐, 이런 경찰 정보원에 대한 얘기는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비근한 예로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무간도'에서 이미 접해본 바 있다. 하지만 거기서 경찰 정보원 역할을 했던 양조위는 그래도 어엿한 경찰 출신이었다. '쓰리 세컨즈'의 정보원 호프만은 경찰 출신이 아니라 범죄자 출신이다. 그는 범죄자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처음엔 돈을 위해 다음엔 가족을 위해 경찰에 의해 고용되어 정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홍콩 느와르에서 경찰 정보원은 경찰과 범죄조직 사이의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였다. 경찰이지만 범죄자 역할을 해야만 하는 양조위는 그 때문에 자신이 경찰인지 범죄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겪게 된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 곧 중국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홍콩인 자체를 은유한 것이기도 했다. 양조위가 겪는 정체성의 혼돈과 불안은 그대로 역사적, 체제적 경험이 전혀 다른 중국에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맞춰야 하는 홍콩인들이 겪는 혼돈과 불안이었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가지는 상징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실 97년 중국에로의 강제반환을 앞에 두고 있었던 홍콩인들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경계 위의 존재들은 늘 홍콩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던 소재이기도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홍콩 느와르의 대부격이라 할만한 오우삼 감독의 홍콩 시절 마지막 작품 '랄수신탐(국내 개봉 제목은 '첩혈속집'이고 영어 제목은 'HARDBOILED' 이다.)이다. 여기서도 양조위는 무간도와 똑같이 경찰 출신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때문에 이 영화는 사실 무간도의 원본 같은 영화라 할만하다.) 그 경계 위에서 양조위가 느끼는 혼돈과 불안은 홍콩인 자체만이 아니라 곧 이제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감독 생활을 해야 하는 오우삼 본인의 혼돈과 불안마저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사실 영화 랄수신탐은 쓰리 세컨즈와 비슷한 부분이 좀 있는데 우선은 영화 초반에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그 사건 그대로 한 경찰 정보원이 현장에서 사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 정보원을 죽인 것은 바로 주인공 형사인 주윤발이었지만 이러한 상황, 그러니까 같은 동료 경찰인데도 서로의 정체를 몰라 어이없게 죽이게 되는 일들은 호프만을 정보원을 만든 유일한 경찰쪽 연락책 '빌손'의 말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또한 정보원이 죽으면 연락책이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던 그 신원 증명을 위한 비밀 서류를 가져와 없애는 장면도 유사했다.

 

 시대와 국적의 차이는 있으나 그렇게 이 소설 '쓰리 세컨즈'는 홍콩 느와르와 마치 어깨를 나란히 하기라도 하듯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콤비 중 하나인 헬스트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그는 범죄자였다가 갱생하고 다시 작가로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자이다. 앞서 랄수신탐의 양조위의 심리 상태는 곧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이 작가 생활을 해야 하는 감독 오우삼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말했었는데 바로 그와 똑같이 그러한 헬스트롬의 심리가 그대로 '쓰리 세컨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작품이 지닌 색다른 재미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작품 속 정보원 호프만과 연락책 빌손의 관계가 어쩐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프만을 정보원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빌손은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갱생 프로그램을 취재하다 만난 헬스트럼에게 다시금 작가로 새로이 살게 해 준 안데슈 루술룬드와 비슷하고 호프만은 영락없이 헬스트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빌손과 호프만의 얘기를 그리면서 서로의 상황을 유추하면서 집필 중 낄낄거리고 있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른 쪽으로 잠깐 얘기가 샜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던 대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란 무엇보다 강요되는 변화에 직면한 존재다. 게다가 그건 스스로 초래한 모순적 상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 위에 서 있을 것을 선택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확고했던 정체성마저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들의 얘기는 일단 의도된 연기와 진짜 정체성의 경계가 사실은 상당히 가변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한 연구팀이 모의 감옥 실험을 했을 때 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 실험에서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그 각각의 역할을 연기하도록 시켰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정말 스스로가 간수와 죄수인 것 처럼 행동하고 서로 반목에 반목을 거듭하더니 결국엔 폭력사태까지 일으키고 말았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연기가 그들의 진짜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의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도 일부러 정신병 환자인 것 처럼 연기하는 주인공은 나중에 가서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미친 연기를 하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건 이 소설 '쓰리 세컨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호프만은 정보원으로 일하는 동안 살아남기 위하여 내내 스스로 '범죄자 보다 더 완벽하게 범죄자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누누히 되뇌이는데 그와 같은 완벽한 연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종종 잊어버린다.

 

 '쓰리 세컨즈'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를 가져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도된 연기가 진짜 정체성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

 그런데 왜 그들은 이것을 가져온 것일까? 바로 거기에 그들이 '쓰리 세컨즈'를 쓴 진짜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결론 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호프만을 두고 전개되는 비밀스런 공모와 음흉한 획책의 주체가 되는 '국가' 자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란 게 말이다.

 

  이 소설이 헤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의 것을 바로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쓰리 세컨즈' 역시도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호프만이 스웨덴 국가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스웨덴 사회에 마약을 만연시키려는 폴란드 마약 조직을 소탕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 마약 조직은 소설 초반에서는 사람들을 관광객으로 위장시켜 스웨덴 내부에 마약을 들여오고 급기야는 스웨덴 형무소를 모두 그들의 마약 시장으로 만들려 획책한다. 그 교도소에서는 사회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마약을 구입하는데 상류층은 높은 값을 지불해오는 수입원으로 하류층은 그들의 부하로 삼는다. 그렇게 폴란드 마약 조직은 교도소로 상징되는 사회 전체를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보면 정확히 몰려들어오는 외국인들이 자신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나라를 깡그리 망칠지 모른다는 스웨덴 자국민의 공포가 반영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폴란드 마약 조직이란 이 소설에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러니까 스웨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을 드러내기 위한 은유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 다. 이처럼 스웨덴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과 호프만으로 집약되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정체성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외국인 혐오증은 확고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혐오증이다. 그렇게 스웨덴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고정적이고 불변적이라 생각해서 외국인들을 규정하고 혐오하는데 과연 정체성이란 그런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무엇보다 호프만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경계 위에 서 있는 자로서 자신의 연기와 진짜 정체성을 구별하기가 혼란스러웠듯이 그렇게 정체성이란 것도 알고보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의도와 의지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임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두 콤비가 경계에 서 있는 자를 소설의 핵심으로 가져온 이유였다.

 

   한 마디로 정체성이란 우연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웨덴은 그것을 마치 운명적인 것 처럼 받들고 그로 인해 외국인에게 불합리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 편, 이렇게 정체성을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 헬스트럼 작가 자신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도 범죄자란 정체성에서 새로이 작가의 정체성으로 탈바꿈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지금처럼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모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주었던 것도 분명 한 몫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연된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거기에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면 아무래도 작가로 성장하기엔 꽤 부담으로 작용했을테니까 말이다. 즉 우리는 여기서 헬스트럼 자체가 증명하는 바, 그러한 정체성이란 게 확고하다는 관념이 또한 존재가 지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마저 사전에 압살할 우려가 있음을 본다. 바로 여기서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왜 이토록 외국인 혐오증을 문제시 하는가 역시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새로이 돋아날 무수한 가능성들이 오로지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임을 말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책의 후반, 국가가 호프만이 위협적인 존재가 되자 행하는 책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가급적 내용 노출을 막기 위해 이쯤에서 결론으로 서둘러 가자면, '쓰리 세컨즈'는 말하자면 이런 소설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뒤를 따라서 여전히 점증되고 있는 스웨덴 사회에 만연된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그 혐오증의 기반이 되는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줌으로써 오히려 외국인의 유입으로 더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가능성들을 지켜주려고 하는...  그 타자와 타자가 일으킬 변화에 대한 포용이 바로 '쓰리 세컨즈'가 가진 핵심이다.

 

  그렇게, '쓰리 세컨즈'는 이를테면 'ONE COIN CLEAR' 하듯이 잡은 순간 내처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재미있는 스릴러이지만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남게 되는 건 재미 보다 더 한 '나'를 돌아봄이다. 어쩌면 정말 호프만이 그랬듯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의 연기에 불과할 지 모른다. 사실 우리에겐 '~답다'라는 말에서 바로 드러나듯, 역할에 따라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이 참으로 즐비하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그저 우리의 본성과는 상관없이 그 정형화된 행위 형식들을 답습할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 나'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바로 거기로 나를 데려간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은 전제하고 있는 것... 내가 여기고 있는 '진짜 나'가 '정말 나'인지 알아보게 만드는 경계의 장소로 말이다.

  그 균열의 지점에서 문득 그 틈새로 지나가는 바람이 되는 것... 안데슈 루술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가 나에게 남긴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가변과 유동으로 넘쳐나는 존재인 바람...

 

  아마도 그래서 마지막이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는 말로...

  그렇게 늘 다른 날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바람 밖에는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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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0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콩 느와르가 한때 엄청났지요.. 그 허무함이라니.
그런데 그걸 홍콩의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못 했습니다. 제가 그런 방면은 워낙 잘 모르거든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즘 자주 보이는 북유럽, 스웨덴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네요. 워낙 그쪽 나라들의 역사는 몰라서, <밀레니엄>을 읽을 때도 재미있지만 묘한 괴리감을 느꼈었거든요. 그 이유가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명확해지네요.

진짜 나, 정체성, 괴리감... 아마 내 안의 나는 알고 있을겁니다.
그런데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보자고 해야겠네요. 좀 쓸쓸하네요.. ^^

ICE-9 2012-04-05 02:55   좋아요 0 | URL
묘하게도 이 벗어남의 얘기를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통해서 또 이어가게 되었어요. 200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삼월은 붉은 구렁'과 이어지면서 또 책을 통해 기존의 나를 벗어나 타자를 품은 보다 확장된 자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해서 반가웠고 흥미로웠습니다. 뤼시앙 골드만이라는 프랑스 학자가 창안했다고 해야할까요 '문학 사회학'이라고 있는데 그 견해가 주로 사회 정치적 관점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대표적인 입장인데 저 역시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그렇게 자주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영화도 그렇구요.^ ^

홍콩 느와르는 우리나라엔 잘 소개가 안되어서 그렇지 아직은 꽤 번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두기붕 감독이 있지요. 미션, 흑사회 2부작등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걸작이고 그 외에도 다른 좋은 감독들이 아직 좋은 느와르를 종종 만들어내고 있더군요^ ^

재는재로 2012-04-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느와르 하면 주윤발의 영웅 본색이 대표적이 었죠 지금은 그때의 영광은 사라지고
어린시절 주윤발의 이수시개 묻모습이 멋있었는데 지금은 다 추억이죠 킬러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네요

ICE-9 2012-04-05 02:56   좋아요 0 | URL
아마도 남자라면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질이 아닌, 타산이 아닌 오로지 의리라는 인간적인 가치에 전적으로 모든 걸 거는 거... 그 협객스러움. 저는 그게 정말 확 다가오더군요.^ ^
재는재로님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답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