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을 느꼈던 것은 작년에 나온 '영웅의 서'를 읽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 '영웅의 서'는 그녀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를 다시금 더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분명히 연속성이 느껴지지만('영웅의 서'라는 제목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브레이브'가 '영웅'으로 '스토리'가 '서(書)'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인물의 설정이나 왜 환상의 세계로 뛰어드느냐 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유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이고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영웅의 서'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는 그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단순히 묘사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영웅의 서'에선 왜 환상의 세계(보다 정확한 용어로 말하자면 '환상성')이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환상성'을 담는 중요한 틀이 되는 '이야기' 자체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미야베 미유키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매개로 '환상성'이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현실 세계마저도 '환상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현실이라는 것이 그대로 닫혀진 폐쇄적 절대 세계가 아니라 '환상성'에 의해 열려진 하나의 잠재적 과정의 세계라는 것을 밝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세계로만 인식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세계로 인한 상실과 아픔을 그렇게 그 세계 역시 단순히 하나의 가능적 세계임을 밝혀 그 담장 너머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새로운 판타지 '영웅의 서'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영웅의 서'가 '브레이브 스토리'와 갈라지게 된 것은 미유키가 그 소설에서 하나의 상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환상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개인의 아픔 때문이었지만 '영웅의 서'에선 실종되어 버린 자신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그렇게 타인을 위해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개인의 아픔'에서 '상실된 타인의 구원'으로의 테마 자체의 진화로 인해 '영웅의 서'는 결정적으로 '브레이브 스토리'와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야베 미유키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여기서였다. 그 때까지 작품에서 내가 느꼈던 미유키는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서'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그 다음 작품 '고구레 사진관'이 나왔다.

 

   고구레 사진관을 읽고나서 '영웅의 서'에서 받았던 느낌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에서는 일종의 대략적 스케치 정도로 남아있었던 타인의 아픔에 대한 치유라는 테마가 정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와 더불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는 미유키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고구레 사진관'은 그 걸음에 대한 미유키 자신의 하나의 선언으로 보였다.

 

   내게 그것은 특히나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 자체에서 느껴졌다.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다른 어떤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 작품은 바로 마츠모토 세이초의 초기작이자 1952년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 이었다. '고구레', '고쿠라' 어떻게 좀 비슷하지 않은가? 미유키가 일부러 '고쿠라'와 비슷한 제목을 쓴 건 아닐까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그녀 자신 직접 만들다시피한 '마츠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에서 그 첫 작품으로 그녀 스스로 선택했던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유키의 별명중 하나가 '세이초의 장녀'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미유키는 세이초를 존경한다. 그녀 스스로 그의 작품을 본받아 작품을 써왔다고 밝힌바도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구레 사진관'이 마츠모토 세이초의 거의 첫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과 제목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고구레 사진관은 아주 낡은 사진관이다. 현대적으로 변해버린 시가지에 그 사진관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처럼 과거의 낡은 유물과도 같이 존재한다. 사람들마저 그것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정도다. 바로 거기에 주인공 에이이치의 가족이 이사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진사인 것도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데도 그 낡디 낡은 건물의 매력에 빠져 '사진관'을 살림집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하나의 상징 같은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거기에 나온다는 유령 처럼 사라진 것의 재림이자 상실했던 것의 귀환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이초의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소설에서 '고구레 사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편(傳便 : 간단히 개인적인 편지 같은 걸 전하는 사람으로 우체부는 아니다.)'이다. 소설의 주인공 고사쿠가 결정적으로 작가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어릴때 자기집 셋방에 살았던 할아버지의 직업이 '전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쿠는 그 '전편'인 할아버지가 일하러 갈 때 마다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에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렇게 존재하지 않게 된 '전편'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우연히 오가이의 '전편'에 대한 추억담을 읽게 되고 그 역시 자신처럼 그 사라져 버린 '전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있음에 동병상련을 느껴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아나서는데 전 생애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레 사진관'과 '전편'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듯이 두 작품은 모두 상실된 것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고구레 사진관'은 역시 사진이 주 소재다. 그것도 평범한 사진이 아니라 심령 사진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주인공 에이이치는 우연히 이상하게 찍혀진(가족이 한데 모여 웃고 있는 뒤로 그와 똑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사진의 비밀을 풀었다가 소문이 나서 본격적으로 의뢰가 밀려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심령사진 명탐정이 된다. 그렇게 그는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에서 그 각각의 심령 사진에 얽힌 사연을 찾아 그 묶여진 '한의 매듭'을 푸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에이이치의 일은 세이초의 고사쿠가 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사연을 알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 담겨진 타인의 아픔을 알게되고 그것을 들어줌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고구레가 세이초의 작품과 다르다면 여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탐문하고 상실된 것을 회복하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세이초의 그것이 미유키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 처럼 오로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에 그쳤다면 미유키의 '고구레'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작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차별을 둠으로써 오히려 미유키는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더욱 공고히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탐정역을 맡은 에이이치를 '영웅의 서'의 주인공 '유리코'와 똑같이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순수한 '청소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코도 에이이치도 그들이 청소년이라서 타인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유리코가 그렇게 된 것은 오빠의 실종 때문이었다. 즉 본래적으로 상실을 간직한 그녀였기 때문에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을 제 아픔 처럼 품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에이이치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메울 수 없는 상실을 간직하고 있다. 네 살때 인플루엔쟈로 죽어버린 여동생 '후코'가 그것이다. '고구레 사진관'도 어떻게 보면 '영웅의 서'와 비슷하게 후코로 인해 새겨져버린 상실을 치유해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레'는 '영웅의 서' 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유리코의 오빠는 돌아올 수 있는 존재지만 후코는 절대 돌아오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상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 상실은 언젠가는 그 누구에게라도 도래할 상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간문제일 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간직한 상실에만 골몰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도래할 상실의 예감으로 그저 불안에만 떨고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미유키는 대담하게 한 발을 더 뻗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래했거나 도래할 상실 앞에서 어쩌면 무모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일지도 모르지만 타인에게로 손을 뻗어 그들의 상실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 새겨진 상실과 도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이이치의 동생 '피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사실 이 '후코'란 이름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이러한 에이이치의 모습은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미유키의 전작 가운데 이미 한 번 나온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최고 걸작 '화차'와 '이유' 사이에 나왔던 일본 SF대상까지 받았던 1997년작 '가모우 저택사건'에서 말이다.

 

 

  '가모우 저택사건'은 '타임슬립' 장르물이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에 이끌려 과거 일본의 가모우 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마침 그 시기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1936년 2. 26 쿠데타 즈음이며 그 가모우 저택이란 그 쿠데타로 부터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일본이 끝내는 패망의 길을 걷고야 말 그 궁극의 분기점으로 인도된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고구레 사진관'에서 에피소드를 끌고 가는 심령사진에 담겨졌던 압축된 과거와도 같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그 사연이 일어난 시간을 가둬두고 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그 봉인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모우 저택사건' 역시 그러한 과거 여행인것이다. 그리고 에이이치가 그 사진 속에 담겨진 아픔의 매듭을 풀어 헤쳤듯이 '가모우 저택사건'의 주인공 다카시 역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카시 또한 에이이치 처럼 결국 하나의 존재를 상실로 안게 된다. 바로 그 존재의 이름이 후키였다. 가모우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먼 과거의 여자 후키. 다카시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로 돌아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하는 후키와는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에이이치에게 있어 후코 처럼 영원한 상실을 안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똑같은 의미로 자리잡은 '후코'와 '후키'... 이렇게 비슷한 그녀들의 이름 처럼  고구레 사진관의 주제 의식도 어쩌면 '가모우 저택사건' 때 부터 내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안게 된 다카시였지만 미유키는 그것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카시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차가운 손의 감촉,눈에 뒤덮인 가모우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쉬는 장소.(P.307)

 

  그러니까 고구레 사진관은 다카시의 가모우 저택과 같은 곳이다. 상실이 그저 상실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들이 기억 속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내내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머나먼 시간을 지나 이제 '고구레 사진관'에 와서 '가모우 저택사건'에서는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마저하는 것이다. 그녀가 '고구레 사진관'을 통해 다시 들려주는 남은 말들은 이렇다.

 

   우리가 상실을 가지는 것은 시간 관념을 너무 직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의 렌즈로 새겨놓은 변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함께했던 타인의 기억, 그를 사랑했던 기억,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들이.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참여자로서 함께했던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나의 기억이 있는 한 그 시간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가 뛰어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다. 그렇게 그것은 낡은 앨범속의 사진들과도 같다. 아주 오래전 일을 찍은 사진이더라도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마치 그 시간으로 그대로 걸어들어간 느낌을 가지게 되지 않은가? 사진이 그렇게 무한의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 처럼 변질되지 않는 현재를 건네주듯이 우리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물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너무 물질 위주로만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정신이, 거기에 간직된 기억이 현실 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존재보다 더 진짜의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보라 '고구레 사진관'의 사진들은 한 인간의 정념이 물리법칙을 뛰어넘어 원하는 현실을 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에 현실에 깊숙히 매몰된 의식으론 오로지 상실 밖에는 안을 수 없지만 기꺼이 기억의 힘을 믿고 모든 세상의 상식과 물질로 부터 자유로운 자는 그 상실의 껍질 안에 움트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그 빛이 열어보이는 현전되는 시간 속에서 그 타인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맞잡고 곁에 있음을...

 

 그렇게 미유키는 사진을 그것도 심령사진을 가져왔고 영원히 곁에서 머무르는 유령(그는 우리 기억의 부름에 대한 화답이다.)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 한, 그렇게 내어주는 손이 있고 맞잡는 손이 있으며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는 한, 영원의 상실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레 사진관'은 정말 달라져버린 미유키를 느끼게 한다. 생각해보면 '크로스 파이어'의 아오키 준코와 '고구레 사진관'의 에이이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무고한 개인마저도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렸던 아오키 준코의 그림자는 역시 같은, 지울 수 없는 상실을 가졌으나 늘 동생에게 자상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에이이치의 환한 미소에게선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아오키 준코는 현실과 물질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지나간 시간을 오로지 절대적 상실로만 바라보았던 인물의 대표적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미유키의 '고구레 사진관'까지의 여정은 그 아오키 준코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녀가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에도 연작'들이 그 계기가 되었을 듯 하지만 그 얘기는 너무 길어지니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고 이쯤에서 지금 나온 '고구레 사진관'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전혀 새로운 미유키의 걸음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 그녀가 선집했던 세이초의 작품과 그녀의 전작들을 통해 밝히는 글을 접을까 한다.

 

  오늘 슬픈 소식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때 같은 지역구에 살았고 더러 만나서 말씀도 많이 들었던 분인지라 다가오는 아픔이 더 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 개인을 위한 글이다. 우리에게 그 분의 기억이 있는 한 절대로 상실될 일이 없다는 것은, '고구레 사진관'으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믿음'이기도 하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미유키를 믿어보련다.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고 생생히 살아있는 한 그 분 역시 늘 내 곁에서 머무르고 계시다고. 그 분과 악수를 나누던 감각 그리고 그 분과 헤어질 때 바라보았던 그 가을 하늘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바래지 않는 사진으로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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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3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미미 여사의 책을 말씀하시는 지독한 상실과 사회적 불평등의 직시로 인해
접하기 매번 주저주저하면서 집에 쌓여간 가는 중인데, 역시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
브레이브 스트리는 얼마전 네권을 모두 구입하고도 아직 못 읽었네요. 그런데
이후 신간들에게 더 눈이 가는군요. 영웅의 서와 고구레 사진관. 이거 정말 읽고 싶은데요.

헤르메스님의 슬픈 소식이 제 슬픈 소식과 통하는거 같습니다.
좋은 관계란 믿음이고,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화하는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하두 울었더니.. ^^

헤르메스님, 올 한해 보여주신 좋은 리뷰들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내년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ICE-9 2012-01-02 22:12   좋아요 0 | URL
올해는 무엇보다 마녀고양이님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새해엔 하시는 일, 원하시는 일 모두 뜻대로 다 잘 되시고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바랄게요^ ^

이진 2011-12-3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너무 좋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추천을 몇백개를 찍고싶은데 ㅠㅠㅠ 어쩌지 이걸... ㅠㅠ

헤르메스님 그간 님의 리뷰를 읽어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ㅠㅠ
저도 닮고싶답니다 ^^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
내년에도 멋진 글 써주세요~

ICE-9 2012-01-02 22:11   좋아요 0 | URL
하하.. 소이진님 반갑고 너무 감사드려요^ ^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이진님도 올해 많은 복을 받으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랄게요.
그리고 더 좋은 리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이진 2012-01-12 22:06   좋아요 0 | URL
크크, 대단하신걸요.
두 작품 이달의 당선작 선정이라니요 ㅠㅠ
저도 이번에는 한번 기대해봤습니다만 역시 알라딘은 어린제게는 행복을 주지 않는군요. 지금 책도 안보내주고있어요. 흑흑 나쁜 알라딘ㅠㅠ

ICE-9 2012-01-13 02:10   좋아요 0 | URL
제가 소이진님의 페이퍼를 이미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제 생각에 다음 달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지 않을까 싶던데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