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소설은 평범한 중년 가장 K의 갑자기 바뀌어 버린 기묘한 일상의 '3일간'을 그린다

  소설이 시작되는 토요일 아침. K는 문득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지만 토요일에는 자신이 단 한번도 자명종을 미리 맞춰놓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문득 낯선 이질감을 느낀다. 그저 즉흥적인 기분 정도로 생각했던 그 이질감은 그러나 알몸으로는 절대 자지 않는 자신이 일어난 지금 완전히 알몸이라는 사실과 세면대에서 스킨이 자기가 쓰던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임을 발견하고는 더욱 더 커진다. 그렇게 이질감은 점점 더 커져간다.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게 까지 번져 아내와 딸도 어쩐지 예전에 자신이 알던 존재들이 아닌 것 같고 그 날 있었던 처제의 결혼식에선 도통 낯선 사람들 무리에 자신이 잘못 끼어있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그는 아무래도 그 원인이 자신의 기억속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금요일 밤의 몇 시간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도대체 그 시간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더욱 오리무중에 빠질 뿐이다. 결국 K가 토요일날 확인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있던 세상이  도대체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완전히 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망상인지 아니면 정말 현실인지 가늠할 수 없어현재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는 그에게 두가지 처방을 내려준다. 

  하나는 다시 아내와 한 번 잠자리를 가져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를 만나보라는 것. 토요일 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잠자리를 시도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된 것은 아내가 이전과는 완전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다. 급기야 여기엔 무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누군가의 어떤 의도가 있으며 아내는 그것을 위해 잠입한 '고정간첩'이라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주위 모든 사람들이 분명 낯이 익은 존재들이지만 사실은 '타인'들일 뿐임을 절감하며 그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일요일. 그는 마지막 남은 친구의 처방을 마저 따르려 현재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를 찾는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어 누나의 현주소를 알수없던 K는 결국 이혼한 전남편 P교수를 찾게되고 그가 은밀히 여장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된다. P의 도움으로 누나와 만나게 된 K는 누나가 다시 재혼한 남편이 바로 자신의 장모와 이혼했다던 그 장인임을 알고는 당황하지만 다행히 누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안도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용솟음치는 누나를 향한 근친상간적 욕망에 곤혹스러워진다. 자신이 보내지 않은 하지만 자신의 필적이 틀림없는 편지 때문에 누나가 자꾸만 사과를 하자 K는 그 편지를 받아오고 정말 그 편지를 자신이 보냈는지 아니면 자신은 아닌 다른 존재가 보냈는지 알아보려 한다. 편지에 나와있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건다. 들리는 건 놀랍게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과 목소리. 만나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상대방은 자기는 지금 아무 할 일이 없으니까 아무때나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하자고 말한다. 

  한 편 점점  커지는 성적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K는 그것을 해소하려 어젯밤 대리 기사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에 적혀있던 성인방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세일러문을 코스프레하고 있는 여성을 만나 그녀의 노래와 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한번도 간음의 욕망을 가진 적이 없었던 문자 그대로 바람직한 신자의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그러한 욕망과 그곳으로의 찾아감은 커다란 죄책감을 일으켰고 그는 결국 성당에서 고해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나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한다. 그 뒤 그는 그 사내를 찾아간다. 

  미스테리적 구성을 가지는 소설이기에 아무래도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해서 내용의 소개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저 만큼도 너무 많이 말한 것은 아닐까 살짝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아무튼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K는 토요일 문득 자신의 일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일요일 결국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한다. 그러니까 K에게 있어 토요일이 이질감을 확인해가는 여정이었다면 일요일은 그것을 다시 완전히 '낯익은' 것으로 바꿔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다른 말로 '치유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런 표현을 썼지만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속시원히 해결되는 건 없다. 

  여전히 금요일 밤 그 지워져버린 기억 속의 시간에 K가 무엇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정말 누군가의 의도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일요일의 결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어쩐지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질 정도다. 도대체 왜 그 얘기가 거기에 나와야 했었는지 얼른 납득하기가 어렵다. 주인공의 이름이 K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결말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버린 카프카의 '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그토록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려 헤메이고 다녔던 K는 그대로 성으로 들어가려 애쓰던 '성'에서와 K와 너무도 닮아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카프카의 '성'처럼 현대인이 어쩔 수 없이 그림자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론적 슬픔을 그린 것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카프카의 '성' 만큼은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최인호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는 조금쯤은 헤아려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렇게 주인공 K는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제3자인 나는 한 번 풀어볼 수 있을 듯 하다. 

 

  왜 이런 서양 농담도 있지 않은가?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던 여자의 얘기다. 그녀가 운전을 가르쳐주는 남자와 함께 차에 올라 운전을 하는데 도통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자꾸만 실수를 연발하는 그녀를 향해 옆에 있던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땐 네가 잘 하듯이 얼른 뒷좌석으로 건너가서 생각해 봐 ." 남자는 늘 자기가 운전할 때 뒷좌석에 앉아서 시시콜콜 운전에 참견하던 그녀를 빗대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정작 그 상황에 몰입해 있으면 잘 모르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부터 물러나 바라보면 더 잘 알게 되는 경우는 있는 법이다. 그렇게 '뒷좌석'의 잇점을 빌어 한 번 풀어보려 한다. 

 

  우리는 가장 먼저 최인호가 직접 쓴 서문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는 현대소설을 다시 쓰면서 '타인의 방'과 '술꾼'을 쓰던 때의 단거리 주법을 되찾고 싶다고 했었다. 힌트는 그 주법이 아니라 바로 인용한 작품에 있다. '타인의 방'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술꾼'은 그가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것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즉, '타인의 방'이 하나의 그릇이라면 '술꾼'은 거기에 담긴 작품의 영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의 방'과 '술꾼'이 저마다 다른 하나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이 소설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타인의 방'이 토요일을 '술꾼'이 일요일을 차지하고 있다고. 토요일이 '타인의 방'에서 그랬듯이 개체의 실존이 사회의 규정성 속에 함돌되어 가는 이야기라면, 일요일은 '술꾼'에서 그랬듯이 그렇게 사회에 함몰되어 가는 척 하면서 사실은 그것에 저항하여 새로이 본연의 자신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토요일이 현상이라면 일요일은 대안이고 토요일이 사회가 구축하는 자아를 가두는 미로라면 일요일은 그 안에서의 길찾기라고... bla bla bla... 이렇게 이 작품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서로 '명제'와 '반대명제'로 기능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 이른바 '종합명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로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마음 속'이다. 이를테면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도대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란 무슨 이야기인가? 

  이것은 사회의 억압과 개인의 욕망 실현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그런 이야기이다. K에게 초점을 두어 말한다면 사회로 부터 규정된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여 본연의 자신이 가진 욕망에 충실해져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하게 욕망의 이야기이다. 라고 쓰니 정말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 그런 이야기니까. 

  수수께끼들이 풀리는 건 '일요일'이니 그렇게 거기에 집중해서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먼저 그 일요일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얘기했던 '술꾼' 부터 소개해야 되리라. 

 

  '술꾼'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술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아버지 찾기는 아이가 술을 마시기 위한 단순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즉 술꾼은 아이였고 그는 술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어른들이 재미삼아 주곤하는 술을 마시기 위해 그런 핑계를 대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욕망의 억압과 그 개인이 그러한 사회에 저항하는 그 '원형'과도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참으로 절묘하게도 아이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를 댄다. 밤마다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술집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른들에게 효자처럼 보여졌을 것이며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아버지를 찾아 헤메이는 바람에 분명 그가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여 그를 위해 이런저런 술잔을 건네는 것이다. 즉 아이는 사회가 바라는 '효자'를 연기하여 자신의 욕망을 은밀히 충족시키는 것이다. 라캉식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찾는 척 하는 아이의 모습은 그대로 자신이 가진 은밀한 욕망을 숨기며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아이는 아이는 술을 대놓고 마시면 안된다는 사회가 가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억압을 그렇게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함을 통해서 거꾸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가 사회에 대하여 맞서는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꾼'은 욕망을 두고 벌이는 사회와 개인간의 치열한 싸움에 대한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것이 그대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나는 본다. 왜냐고 혹시나 물으실 분들을 위해 근거를 밝혀두자면 일단은 그 무엇보다 소설 전체에 걸쳐 노골적이든 은밀하든 성적 묘사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뭐든지 넘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다면 주목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며 아직 식견이 좁은 탓이겠지만 성적 묘사를 욕망의 충족 문제와 과연 관계없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 의문이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만 얘기하고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련다. 어차피 얘기하다보면 결국엔 다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맞추어서 생각하면 K가 겪었던 3일간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결말의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재주껏 얘기해야 할텐데 그러기가 참 쉽지가 않다. 아무튼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떻게든 밀고나가보자. 일단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소설에서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넘쳐 흐르는 성적 묘사이다. K는 토요일에서 부터 일요일까지 가는 곳곳마다 성적인 것을 본다. 거기다 토요일 K가 갑자기 일상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계기 또한 결국은 성적인 것이다.  그는 이질감의 근원을 쫓아가다 그것이 금요일 밤, 그러니까 그들이 '전야제'로 부르던 그 밤에 안았던 아내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없었다는 걸 기억한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임수의 시작은 오늘 아침 부터가 아니라 어젯밤 부터 비롯되었다. 어째서 아내의 몸이 냉동된 시체처럼 느껴져 정욕이 아닌 섬뜩한 살기를 느끼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아내가 마치 스킨처럼 다른 상표의 여인으로 바뀐 것일까?(P.29) 

  K에게 금요일의 정사 '전야제'는 정해진 불문율이었다. 단 한번도 그른 적이 없었던 절대적 일상의 규칙. 그는 늘 충실하게 스스로가 속한 일상의 규칙들을 지켜가는 자였다. 그런데 그 일상의 견고했던 틀이 그만 금요일 밤엔 깨어졌다. 늘 채워왔던 성적 욕구를 그 날만은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 독백은 지금 K가 느끼고 있는 이질감의 원인이 그 밤의 성적 불만족에 있는 것이라 슬며시 유도한다. 견고했던 일상이 결정적으로 탈구되었던 원인이 성적불만족이라는 사실은 이 3일간의 K의 헤매임을 이렇게도 해석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금요일날 충족시키지 못했던 성적 욕망을 결국 완전하게 충족하기 까지의 여정이라고. 

  이렇게 보자면 소설에서 왜 그리도 성적 묘사들이 많이 나오는지도 이해가 간다. 뭔가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 눈엔 언제나 그것에 관계된 것만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법니다. 결국 그가 일상에 성적 장면이나 충동들을 가장 많이 보고 느낀다는 것은 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그 모자른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성적 불만족이 결정적으로 그의 견고했던 일상을 탈구시킨 원인이라는 것을 볼 때 이렇게 그의 채우지 못한 성적 욕구를 채운다는 건 다시 그 견고했던 일상을 다시 찾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그가 3일간 자신의 일상을 제대로 되찾기 위해 벌이는 그 추적은 사실 자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과 상황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그 균열을 가져온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발악에 다름아니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K의 상황을 더욱 더 강조하고자 가장 친한 친구 H 마저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묘사한다. H는 지금 불륜을 벌이고 있는 아내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분노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주도권을 빼앗겼다는데 있다. 그는 그 주도권을 다시금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간호사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 상황은 K와 똑같다. H가 마구 아내에게 내뱉는 욕설은 사실 욕구불만인 K의 아내에 대한 지금 심정과도 같으며, H가 간호사와 불륜을 맺음으로써 상상적으로 충족시키려 들듯이 K 역시도 지금 그것을 충족시켜줄 다른 무언가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H와 K는 동일한 인물, 도플갱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엔 참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K만의 1인극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그렇게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K가 각각 다른 가면, 페르소나를 쓴 것과도 같이 해석된다. 사실 이 1인극에 대한 얘기는 작가가 왜 이런 원색적인 욕망을 소설에다 과도하게 주입하고 있는 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보게되는 것은 '술꾼'에서 했었던 것과 같은 교묘한 저항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K의 보다 완전한 성적 충만을 위한 여정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가 K에게 부여한 규정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드에 따르면 사회로 부터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은 언제나 사회의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변장을 한다고 한다. 직설적인 욕망 충족 행위는 곧바로 사회의 처벌을 받기 때문에 사회가 허용하는 방식인 것 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즉, K가 아내가 딸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사실은 그러한 사회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연기인 것이다. 그렇게 거기에 나오는 K가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인물들 장인, 자꾸만 만나게 되는 악취 나는 여인, '을' 같은 인물들은 사실 그의 적이 아니라(그가 그들을 '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사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전략이다.) 사실은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 보다 더 진실된 자아가 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들인 것이다. 그렇게 '술꾼'에서 술을 얻어먹기 위해 교묘하게 거짓말을 했듯이 K가 보다 은밀한 차원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는 가면인 것이다. 

 

  그렇게 여기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K가 쓰는 가면에 따라서 나눌 수 있다. 

  즉 사회가 허용한 자아로서 쓰는 인물군, 자신의 욕망이 정말 원하는 인물군 그리고 조력자 이렇게 말이다. 가장 전자에는 자신이 가짜로 여기는 모든 인물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인물군엔 일요일날 만나는 모든 이들이 포함될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 만나는 인물군들이 토요일 인물군과는 다르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 날 만하는 인물들은 P교수를 비롯하여 자신의 욕망에 전적으로 충실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하는 '규정적 외피'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존재들이다. 오로지 과감히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려는 인물들이다. 결국 K가 누나를 만나 근친상간적 성애를 느낀다는 것은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근친상간을 금히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가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가장 근본적으로 설정하는 금기이니까 말이다. 즉 근친상간적 성애를 K가 갖는다는 것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무너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개인적 욕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려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표층적 차원에서 K의 보다 진실한 일상 찾기 혹은 보다 진정한 자아 찾기라고 읽히는 이 소설은 사실 다 읽고나면 지금까지 완전히 거꾸로 독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런 면에서 참으로 기묘한 소설이라 할 만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았던 그의 혼란은 사실 세계가 달려져서 느끼게 된 혼란이 아니라 문득 사회가 부여한 옷이 아닌 자기 스스로 진정한 자아의 옷을 입어야겠다는 내부의 욕망으로 비롯된 혼란이었으며 그 가짜인 세계를 벗어나 진짜인 세계를 되찾고자 벌였던 방황은 사실 진짜 세계가 아니라 진짜 자아로 돌아가기 위한 일종의 구도의 과정 같은 것이었음을 소설을 덮고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후반에 K가 궁극적으로 하게 되는 깨달음은 정말 이 소설이 던지고 싶은 화두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기묘한 독서 경험은 소설에도 나오고 있는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것이다. 에셔의 그림 처럼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뫼비우스 띠의 안쪽을 걷고 있는 개미들이라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고나니 사실 우리가 걸었던 쪽은 그 바깥쪽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K 처럼 낯익지만 사실은 타인들로 가득한 도시를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은  그 타인들에게서 진정한 자신의 '낯익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가득한 도시를 여행하는 것인 것이다. 소설의 가장 마지막 월요일 K가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보는 마치 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처럼 묘사된 그 장면은 정확히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최인호가 제목에서 정말 드러내고 싶었던 도시는 바로 그러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질감은 낯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다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기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만큼 사회가 입혀놓은 외피에 함몰되어진 우리의 자아를 그것을 찢고 다시 드러내어 되찾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질감은 기피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환호와 힘껏 껴안아야 되는 대상인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문득 완전히 거꾸로 읽어왔었구나 깨닫게 되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이질감을 소설 자체에서 부터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도 생각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온전히 이질감으로 충만한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로 그 이질감 자체가 최인호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주려는 진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노래 가사의 삽입이라든지 테이프 레코드 버튼을 임의적으로 삽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설은 자주 고다르가 '점프 컷'을 통해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주려했던 것 처럼 똑같이 종종 우리로 하여금 소설에 거리감을 가지게 한다. '거리감'이란 '이질감'의 또다른 표현이다. 더구나 뭔가 약간씩 어귀가 맞지 않는듯한 문장들의 배열은 더더구나 이러한 느낌을 가속화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소설에서 드러나는 문체적 특징도 꼭 언급하고 싶은데 그것을 쓰자면 너무나 길어지므로 할 수 없이 생략하기로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퍼남매맘 2011-07-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전체에서 물어보는 문장 뒤에 물음표가 빠져 있는 게 첨엔 오타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읽다보니 작가의 의도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