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는 죽었다'
저 플래카드에 그저 아연했다.
이탈리아나 잉글랜드처럼 8강은 당연했던 나라들이 예선에서 탈락한다면 저딴 플래카드가 걸려야 마땅하지만,
홈 4강을 제외하면 16강에 딱 한번 가본, FIFA 랭킹 50위권 밖의 나라가 16강에 못들었다는 게
'한국 축구가 죽었다'는 이유라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일본과 이란, 그리고 억지로 아시아랑 같이 묶여 있는 호주가 1승도 못올린 채 탈락했으니
그 논리대로라면 아시아.오세아니아 축구도 같이 죽었다.
물론 네티즌들은 꼭 결과만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논리는 한국 선수들이 '열심히 안했다'는 것.
과연 그런가?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우리 선수들이 언제 열심히 안뛰었는지 난 모르겠다.
그들이 예로 드는 건 브라질에 맞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한 칠레,
브라질을 여러 번 꺾은 바 있는 칠레를 한국과 비교하는 그 논리에 또 한번 아연실색한다.
희생양을 찾아내 욕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답게 이번 대회에선 박주영과 정성룡을 가루가 되도록 깐다.
정성룡은 그렇다쳐도 우리나라에 박주영 정도 되는 스트라이커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박주영 대신 김신욱이 나온 벨기에와의 3차전에서 우리나라는 상대방이 2진을 내보냈음에도,
그리고 전반에 11대 10의 수적 우위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을 제외하곤 이렇다할 슈팅 한번 못해본 채 1대 0으로 진다.
이쯤되면 "박주영을 괜히 욕했나?"는 식으로 귀결돼야 맞지만,
박주영은 여전히 까인다 (한번 까인 자는 경기에 안나와도 까인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더 신기한 것은 감독이었던 홍명보까지 열심히 까인다는 것.
2002년 신화의 주역이자 감독으로서 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명장이
2년만에 역적이 되는 현상은 기이하기만 하다.
이번 대회에서 해설자로 명성을 날린 이영표는 "올림픽은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보여주는 곳"이라는 명언을 남겼고,
'축구는 결국 멘탈 게임'인데 홍명보호가 멘탈에서 졌다는 장문의 글로 네티즌들을 감동시켰다.
감동으로 거의 울기 직전이 된 네티즌들은 이영표에게 차기 국대 감독을 맡아 달라고 읍소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다음 대회 때 이영표가 설령 감독을 맡는다해도 16강은 현실적으로 힘들며,
그리고 그 경우 이영표도 홍명보처럼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는 것을.
참고로 2002년의 기적은 우리가 개최국이라 1번 시드를 차지함으로써
브라질, 독일 등 강호들을 모조리 피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도 16강에 올랐다).
가끔은 이런 네티즌들에게 올바른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K리그에는 관심도 없다가 월드컵 때만 되면 축구팬 코스프레를 하는 게 옳으냐고.
K리그가 몇 팀이나 되는지 알기는 하냐고.
그런 지적에 대해서 네티즌들은 "K리그는 수준이 낮아서 못본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데,
수준낮은 K리그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는 대표팀이 어떻게 16강에 들겠는가?
여기에 대해 네티즌들은 "우리나라 선수들도 다 해외파 아니냐?"고 항변하겠지만,
그 해외파들이 각자의 소속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잘 떠올려보시길 빈다.
우리가 빅리그 팀의 주전 중에서 추리고 추려 팀을 꾸린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경기를 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우리 언론들이야 16강에 갈 것처럼 연일 기사를 써댔지만,
해외 축구전문지들은 진작부터 "한국은 3패로 탈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보냈단다.
농구만큼은 아니라해도 축구 역시 아시아에 적합한 스포츠가 아니며,
맨날 한국과 수준이 비슷한 아시아 국가들끼리 예선을 치루니 경기력이 향상될 리 만무하다.
현실을 외면한 채 눈만 높아진 네티즌들만 우글거리는 나라,
앞으로 국대 감독은 물론이고 대표로 뛸 선수를 찾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