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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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단편들의 경향은 비슷하다.

장편이 아파트 단지와 그 주변 전체를 배경으로 삼아

온갖 복잡한 집안들을 1000여 채씩 두루 돌아본다고 하면

단편은 한 집을 망원렌즈로 잡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흔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것 같으면서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어 입김을 불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큰일이 아닌데도

내 입장에서는 호들갑을 떨게 되는 그런 일들이

단편이 가진 힘이다.

그래서 내 악몽을 들킨 듯 거북한 마음이 들게도 만드는 것이다.

 

이 책 <내 여자의 열매>는 8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기 부처'와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이 두 편은

문학잡지를 열심히 읽을 즈음에 이미 만나봤던 작품이라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으며

(작품의 경향이나 완성도는 제쳐 두고라도)

나머지 작품들은 읽는 동안 작가가 누구였지?

표지를 다시 한 번 쳐다봐야 했다.

왜 단편들은 다 비슷해보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 수도 있다.

남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비슷한 상황을

이미 내가 간접으로 겪은 탓이다.

문장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어도 내겐 독특한 게 제일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아주 형편없다는 얘긴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이런 작품들을 좋아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겐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다.

다만, 내가 단편을 싫어하기 때문에 활짝 웃을 수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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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행복한 카시페로 마음이 자라는 나무 9
그라시엘라 몬테스 지음, 이종균 그림, 배상희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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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정한 배고픔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다.

밥 때를 놓쳐 겨우 몇 시간 허기진 것 이외에는

배고픔의 설움을 당해 본 적이 없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책은 배고픔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태어난 개

'귀돌이' '토토' '로드' '트룩스' 그리고 '카시페로'의 이야기다.

여러 마리의 개가 아니라

열 개밖에 없는 젖을 가진 엄마에게서 태어난 열한 번째 개의

다양한 이름들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귀돌이'

애완견으로 뽑혀 두 파마 머리들 사이에 살게 되었을 땐 '토토'

그들의 소중한 달러를 잘근잘근 씹어 쫓겨나면서

이모 댁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름은 '로드'

축 늘어진 귀를 위로 잡아 올리는 귀 싸개와

총알로 없어진 꼬리 대신 인조꼬리를 다는 비참함 때문에

탈출을 감행해서 잠깐의 자유를 만끽한 후에 잡혀가

장난감의 모델이 되었을 때의 이름은 '트룩스'

그리고 영원한 아름다움 연구소에 끌려가 실험 대상이 되었을땐

그야말로 '무명씨'였다가 다시 탈출해서 마지막으로 얻은 이름이

'귀돌이 신사, 배고픈 카시페로 공작'이었다.

 

귀돌이는 행복했다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아도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름과 함께.

 

우리 아버지는 개 키우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셔서

어릴 때 기억엔 늘 개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는데

우리 집에 마당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개도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털 날리는 걸 싫어하고, 냄새를 못 참아하는 엄마와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들의 심정도 모르거니와,

키움을 당하는 쪽의 의견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하늘을 나는 메어리포핀즈>에서도

멋지게 치장을 하고 너무나 받들여져 키워지던 '앤드류'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윌로비'를 따라

집을 나가버린다.

근사하게 치장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푹신한 잠자리가 제공되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자유인 모양이다.

 

개나 사람이나 별 다를 것도 없다.

지금 하는 일은 돈이 적어서, 적성에 안 맞아서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생이 마감되기 전에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날 때까지 떠돌기만 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버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사는 동안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하고 믿는다면,

하고 싶은 것을 절대로 잊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카시페로 공작처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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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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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편은 즐겨 읽지 않는다.

읽다가 금방 이야기가 끝나는 게 너무 아쉽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이 <빛의 제국>을 잡은 건

온다 리쿠가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었을 때의 그 신선함이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작품인 '커다란 서랍'을 읽고나선 가슴이 벌렁거렸다

잊어버렸던 소중한 사진 한 장을 찾은 그런 느낌인데

독특한 상상력 속에 다시 빠지게 된 게 너무 좋아서

한 편을 읽고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이 책은 도코노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도코노 일족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라고 할까?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전체 10편의 이야기들이 서로 전혀 상관 없어 보이지만

가느다란 실로 발목을 묶어 도망 못 가게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읽어가는 동안 앞에서 나왔던 이들이

카메오처럼 출연해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런 걸 찾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반짝이는 상상력이 충분히 가지를 뻗지 못하고

이제 막 떡잎이 나고 새싹이 나서 작은 나무로 자라려는 찰라

"됐어, 거기까지만!"이라고 소리를 질러

더 이상은 크지 못하게 만든 게 참 아쉽다.

한 편 한 편을 좀더 키워서 장편으로 만들었다면

진짜 신나는 책읽기가 되었을 텐데.

 

작가도 후기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굳이 서로 다른 이야기로 연작을 만들 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 만나 날 흥분시켰던 '커다란 서랍'이야기 만으로도

멋진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이것이 -도코노 이야기 첫 번째-라니까 두 번째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지 궁금해진다.

 

내 발목도 묶어 놓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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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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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 박민규, 한겨례신문사

 

나는 OB를 너무나 사랑했다.

진중하게 입을 다물고 투구를 하던 멋진 모습의 박철순을,

1루에서 다리 찢기를 근사하게 해내던 신경식을,

아내와의 불화설에 시달리던 김**을,

그리고 크라운 맥주보다 OB맥주를 사랑했다.

난, 당연히 OB팬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살고 있었으니, 연고지인 삼미를 응원해야 마땅했으나

내 마음은 오로지 OB를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삼미슈퍼스타즈는 안중에도 없었고

뒤늦게 나온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따위는

생기거나 말았거나 무슨 상관이었냐는 투로 일관했다.

그러다가..참으로 그러다가,

나는 그의 명성을 듣고서야 그에게 슬그머니 관심이 생겼다.

박민규라는 작가가 있다더라..그의 입담이 장난이 아니라던데.하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소설계에 따분함이 생겨

다른 곳을 뒤지기에 바빴던 나로서는

마치 버터바른 빵에 잔뜩 탐닉해 있다가 뒤늦게야

김치가 몸에 좋다더라에 홀딱 넘어가 슬금슬금

김치쪼가리를 주으려고 덤비는 거지꼴과 다를 바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나는 박민규를 만났다.

첫 장을 넘기면서 배꼽빠지게 웃어재끼기 시작한 것이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계속 되었다.

진정으로 회 맛은 모르나 쫄깃한 씹힘으로 시작해서

어디 숨어 있을 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타날

고추냉이의 알싸한 맛을 기대하게 되는 초밥 같은,

그리고 결코 잊은 적 없이 알맞게 들어간 고추냉이를 만나게 되는

그런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가볍지만 결코 바람이 분다고 휙 날리지 않은 무게가 가운데 자리한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산다는 것이 어때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군데군데 묘사된 인천의 모습들을 보는 동안

내가 돌아다녔던 골목들이 생각나서 반가웠으며

한 번도 관심 갖지 않았던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OB팬이다.

프로에 환장한, 이겨야 산다는 것에 길들인 현대인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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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 전집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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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 탄식이 흘러나온다.

너무 좋아서,  그리고 이렇게 빨리 끝난 게 너무 허무해서..

4권이나 되는 분량이지만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한 권씩

해치울 정도로 푹 빠져서 읽었다.

3대 판타지 문학 중 하나로 꼽히는 책.

물론 <반지의 제왕>에는 못 미치고

그녀의 다른 책 <빼앗긴 자들>이나 <어둠의 왼손> 같은

치밀함과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런 상상력에는 감탄을 하게 만드는 멋진 책이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이 이야기는 <게드 전기>라는 온라임 게임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필경, <해리포터>시리즈도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으리라.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새매'라고 불리는 '게드'이다.

그들은 모두 남들에게 불리는 이름(새매 같은)과

진정한 자아를 담고 있는 이름(게드)를 갖고 있다.

함부로 남에게 자신의 자아를 담고 있는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

그런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말하지 않아도 이름을 알아채는 현자들과

그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은 이들에 한한다.

 

새매는 곤트의 염소치기였으나 현자 오지언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라 떠나간다. 훌륭한 마법사가 될 기질을 타고난 새매는

오지언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로크의 마법 학교에 배우러 가게 된다.

거기에서 모든 학생들의 우위에 서게 되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자꾸만 건드리는 '보옥'을 이기고자

해서는 안 될 마법을 사용하고,

그것으로 인해 나와서는 안될 어둠의 '그것'이 세상으로 나온다.

'그것' 때문에 새매는 얼굴에 상처를 입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현자는 목숨을 내놓게 된다.

마치 해리포터와 그를 괴롭히는 볼드모트처럼.

 

1편인 <어스시의 마법사>는 이렇게 게드가 탄생하게 된 경위와

그가 어둠의 '그것'을 물리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2편인 <아투안의 무덤>은 나중에 게드의 벗이자 결국은

반려가 되는 '테나'의 이야기를

3편인 <머나먼 바닷가>는 마법이 사라져 온 세상이 파멸되어가는

와중에 진정으로 어스시를 다스릴 왕이 될 '아렌'과 '게드'가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하는 과정을

4편인 <테하누>는 파멸로부터 세상을 구하느라 마법을 다 써버려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게드'와 그를 돌봐주는 '테나'와

그들을 구하는 '테하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작품과 비교하게 되는 게

참으로 민망하였지만, 다른 작품보다 늦게 읽은 탓이니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마법사이긴 하나, 해리포터 같이 멋진 주문을 외며

지팡이 끝에서 화려하게 퍼져나가는 마법은 없고

모험이 길고 험하긴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없애러 가는 그 여정처럼 가슴 아프거나

먼지 냄새 풀풀 일어 나까지 호흡 가쁘게 만들지 않는,

어찌 보면 정말 인간다운 마법사를 만나게 되는 여정이었다.

 

<핑거스미스>를 읽을 때도 내 이름에 대해 신중히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을 때 역시 이름을 함부로 짓는 것이 아니며,

사물의 이름을 부를 때나,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아무 의미 없이 부르면 안 된다는 걸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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