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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작고한 이청준(사진)씨는 1965년 등단 이래 40여 년을 한결같은 보폭과 열정으로 소설 쓰기의 외길을 걸어 온 장인적 작가였다.

지난 2003년 완간된 ‘이청준 문학전집’ 전24종 25권에다 그 뒤 추가된 장편 및 창작집 5권을 합해 무려 30권의 소설이 그의 이름으로 한국 문학사에 등재되었다. 한때 문단에서 유행했던 대하소설을 쓰지 않았고 긴 장편이라고 해도 두 권짜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생산력이라 할 만하다.

물론 이청준 문학 세계의 놀라움이 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등단 이후 한눈 팔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와 주제를 탐색했다. 그의 대표작인 장편 <당신들의 천국>에서 추구했던 유토피아의 가능성 및 자유와 사랑의 변증법을 비롯해, 정치적 질곡과 해방, 한으로 대표되는 전통 정서, 예술적 장인의 세계, 그리고 분단의 역사와 신화적 상상력 등을 그는 두루 문학적 도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반려와도 같았던 평론가 김현은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문학 세계를 ‘부정의 세계를 부정하려는 부정성을 간직하고 있는 부정의 세계’라는 까다로운 말로 요약한 바 있다. 강인한 부정의 정신이 이청준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는 뜻이겠다.

이청준 소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유년기와 성장기의 가난 체험에서 비롯된 부끄러움과 복수심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지배와 해방>의 한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 욕망은 애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가 그 패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위로와 그를 패배시킨 현실을 자기 이념의 질서로 거꾸로 지배해 나가려는 강한 복수심에서 비롯된다.” 극심한 가난이 초래한 한과 눈물겨운 모성의 풍경은 대표 단편 <눈길>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영화 <서편제>의 원작 소설 역시 남도 소리를 한의 승화라는 관점에서 형상화했다.

창작집 <소문의 벽> 후기에서 밝힌대로 그의 문학 작업은 “애초에는 자기구제의 한 몸짓으로서 출발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씌어진 소설이 작가 개인 차원의 위안과 구원에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의미와 가치를 확보한다는 데에 문학적 화학작용의 신비가 있다. 이청준 소설이 보편적 맥락을 획득하는 데에는 4·19 세대로서의 세대 감각이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4·19에 이어 곧바로 겪은 5·16의 체험을 두고 “삶에서 어떤 정신 세계가 열렸다가 갑자기 닫혀 버린 것”이라고 표현했다. 유신체제와 새마을운동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을 수 있는 <당신들의 천국>을 비롯해 중편 <잔인한 도시>와 같은 1970년대 작품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정치적 억압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 사이의 길항은 4·19 세대로서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광주에서 중등학교를 다닌 그에게 80년 5월 광주학살은 또 다른 문학적 도전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그 자신 중편 <비화밀교>를 가리켜 “광주 사태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라고 술회한 바도 있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으로 재탄생한 단편 <벌레 이야기> 역시 광주학살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가 하면 단편 <흰철쭉>과 중편 <가해자의 얼굴>, 그리고 장편 <흰옷> 등에서 그는 민족의 근원적 한이라 할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다뤘다. 중편 <이어도>와 단편 <해변 아리랑> 및 <선학동 나그네> 등에서 보이는 신화적 상상력 역시 이청준 소설의 뚜렷한 한 축을 형성한다.


그의 생전 마지막 저서가 된 지난해 11월의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는 <씌어지지 않은 인물들의 종주먹질>이라는 ‘에세이 소설’이 들어 있거니와, 소설로 씌어지길 기다리며 그의 내부에서 작가를 향해 종주먹질을 해 대던 숱한 인물들을 채 거두지 못하고 작가 이청준은 멀고 먼 길을 떠났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2008년 8월 1일)

*********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세상을 떠나시는구나.

박경리 선생님도, 권정생 선생님도, 이번엔 이청준 선생님까지..

지금쯤 모두들 모여서 담소하고 계실까?

부디..세 분 모두 천국에서 쉬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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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봉군..2008년 6월 26일자 한겨레 신문에서.

 

***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돈 모아서 보청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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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는 촛불문화제를 주도하고 있는 네티즌에 대한 반작용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음 속에 말이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것 중 하나는 예전부터 의병이라는 것이 국가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뿐 아니라 내란에 처했을 때도 일어나는 법”이라며 “사회가 자기방어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걸 보고 참 걱정스럽게 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불장난을 오래 하다 보면 결국 불에 데게 됩니다. 너무 촛불장난도 오래 하는 것 같은데…”라고 주장했다.

또 이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곤두박질에 대해 “지지율 10%라든가 이상한 형태의 여론조사는 솔직히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사뭇 여론조사 개입에 대해서 의심만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어젠가 며칠 전부터 확실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성급함, 부주의함 ,말과 의욕이 앞서가는 것도 지지율 하락의 한 원인이지만 그 외에 사회적 여론 조작도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

<들소> 가 나올 무렵엔 참 마음에 드는 작가였는데

점점 권력추구형이 되더니 이제는 정신까지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내 마음에는 안 들어도 훌륭한 작가라고 하는 말들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었지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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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 그들이 밤새 저기서 열띤 토론을 통해

결국은 넘지 않기를, 우리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자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니

너무나 감사하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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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성 '촛불잔치'를 '촛불집회'로 개사 해봤슴다
    from 디지털 통-세상 사는 이야기 2008-06-12 16:10 
    혹시 1986년 '촛불잔치'로 히트를 친 가수 이재성을 아시나요. 기억으로는 가요 톱10에도 1위를 몇주 한 것 같습니다. 요즘 미국 쇠고기 재협상으로 시작된 촛불문화제가 정권퇴진까지 확산되면서 이 노래가 생각 나더군요. 그래서 이 노래를 개사 한번 해 봤습니다. 제가 직접 불렀으면 좋겠지만 노래를 못해서 ㅡㅡ;; 이재성씨의 촛불잔치 가사 대신 아래 개사를 넣어서 불러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1절 바람에 별이 떨어지고, 어둠만이 밀려오면 명박이 말에..
 
 
 



조형균(79) 계성종이역사박물관 관장은 깜짝 놀랐다.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 앞에 각기 놓인 연탁 앞면에 붙은 일본 총리실 마크(위 사진).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 자주 봤던 ‘고시치노 기리’(五七桐)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예전 한국 대통령 방일 때의 기자회견장 연단에 그 마크가 등장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자리에 등장할 수 있나. 그날 바로 일본인 친구에게 국제전화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분도 놀라면서, 아 그래요? 몰랐는데요, 하더니 거 다분히 의도적인데요, 그러는 거예요.”

문제의 문장은 큼직한 오동잎이 아래로 세 갈래, 그 위에 오동꽃 세 송이가 나란히 솟아 있는 형상인데. 세 송이 꽃 중 가운데 꽃은 꽃잎을 모두 7장, 양옆의 꽃들은 각각 5장씩 달고 있다.

지난 8일 연세대 후문 쪽에 있는 김옥길기념관 지하 1층 ‘삭개오 작은 교회’(담임목사 김경재 전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의 신도 40여명 앞에 선 조 관장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게 됐는지 한국 기독교사의 선구자 김교신과 유대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까지 엮어 차분하게 설명했다. 문제의 마크와 기자회견 장면 사진까지 준비해 온 그는 말했다.

“여러분, 이 마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건 조선총독부 마크입니다. 본래 이 마크는 또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마크의 유래가 더 중요합니다. 이 마크는 바로 400여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켜 온 조선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 살상과 문화재 약탈을 하고 심지어는 코까지 베어다가 소금에 절여 가져갔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입니다 (중략)

“설사 다른 행사 때는 몰라도, 우리 대통령이 갔을 때는 그것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게 조 관장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한테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이라는 조 관장의 역사 일깨우기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2008년 6월 11일자 한겨레에서
***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정말 우린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버시바우 미 대사가 무례하다고 꾸짖었더니, 일본은 한 술 더 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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