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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바보 ㅣ 상수리 큰숲 2
이미영 지음, 송효정 그림 / 상수리 / 2012년 9월
평점 :
철 든 이후로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니 꽤나 오랜 시간 명절을 싫어한 셈이다. 그 싫음의 요건을 충족하게 만들어준 건 당연히 명절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치러야 하는 고단함이 으뜸이고, 두 번째 요인은 그리 모여 앉아 딱히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멍하게 앉아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는 그 순간이다.
세대별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아무리 달라도 가장 어른이신 아버지, 어머니의 취향에 따라 함께 볼 수 있는 건 명절이면 빼놓지 않고 중계해주던 씨름판! 덩치 큰 남자들이 팬티만 입고 나와서 모래판에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늘 봐도 심심하기 짝이 없는 그 경기를 왜 좋아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엄마 바보>라는 제목이나 표지 그림만 봐서는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이 책은 그렇게 뜨악하게 씨름판을 바라보는 내 표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녀에다가 애까지 딸린 엄마를 사랑하는 공 기사 아저씨가 씨름을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아는 순간 어린 봄이가 그랬던 것처럼 ‘왜 하필 씨름이야?’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났으며, 짤막짤막하게 끊어지는 문장도 괜히 거슬려서 이걸 끝까지 읽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미순이>에서 작가가 보여준 ‘울면서 웃기기’ 신공을 기억하는 터라 참고 조금만 더 읽어보기로 했다. 봄이가 사춘기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특별히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 않고 그 많은 음식들을 우적우적 먹어대곤 돌아가는 그 특이한 공 기사 아저씨가 은평 구민 체육대회에서 씨름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씨름판을 말로 전달하는 그 순간이 영상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온 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봄이가 경수보다 멋진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나고 무작정 싫기만 했던 공 기사 아저씨를 아빠처럼 의지하게 되었을 때는 내가 공 기사 아저씨와 연애를 하는 엄마가 된 것처럼 뿌듯해졌다.
캐릭터를 분명하게 살리는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가슴이 나오지 않아서 고민인 사춘기 소녀 봄이와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 배달 일을 하는 공 기사라는 등장인물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책은 거창한 걸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옆 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기만 할 뿐 공 기사처럼 이래라저래라 교훈을 늘어놓지 않는 게 참 좋다. 게다가 점점 늘어가는 이혼 문제와 편부, 편모 아래 자라는 아이들 문제를 어둡게 풀어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 똑 같은 생활은 아니지만 모두들 제 나름으로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춘기 청소년들이나 그에 못지않게 사는 게 재미없는 어른들이 한 번쯤 읽어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