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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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나를 보내지 마

◎ 지은이 : 가즈오 이시구로

◎ 옮긴이 : 김남주

◎ 펴낸곳 : 민음사

◎ 2019년 11월 26일, 1판 27쇄, 39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보통의 인간이 복제인간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필립 K. 딕의 세계관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란! 그러니 비슷한 주제를 다룬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어렵다. 게다가 두 번째 읽는 작품이 늘 좋거나 신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가 끌고가는 이야기의 방향이 아름다워서 이 정도 별점이 가능했다. 그것은 아마도 영어로 작품을 쓰지만 일본인으로 태어나 깊이 배어든 동양적 정서 탓이 아닐까 싶다.

캐시가 11년 간의 간병일을 마치고 이제 기증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화자로 등장한 이 책은 과거 회상과 현재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뒤로 갈수록 서서히 그들이 다른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할 목적으로 사육되는 복제인간임을 드러낸다. 캐시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루스와 토미는 같은 헤일셤 출신으로 루스는 가해자이자 명령권자, 토미와 캐시는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루스에게 휘둘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들이 어릴 때 그토록 열심히 시와 그림에 열중해야만 했던 이유와, 엄격하게 선별된 그 작품들이 마담의 화랑에 걸리는 이유를 찾아가는 게 핵심이다.

이들이 추억에 매달리는 것은 혼자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주는 행위다. 간병사로, 기증자로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행복했던(상대적으로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공유함으로써 정상적인 인간과 다를 게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나 할까. '당시 우리가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이제 확실히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아주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교사들 그리고 바깥세상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때 이미 종국에 가서는 기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정말이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화제를 애써 피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103쪽)'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119쪽)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이고 교양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 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어. 헤일셤 이전에 클론들은, 우리는 너희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지만,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358쪽)

-현재의 너희에게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걸 우리가 줄 수 있었던 건 원칙적으로 너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헤일셤은 존재 가치가 없었을 거다.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너희에게 사태를 숨기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린 너희를 ’바보‘로 만들었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지만 우리는 그 세월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너희에게 유년을 주었어. (중략) 우리가 너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을 거다. 너희는 수업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고, 그림과 글쓰기에도 몰입할 수 없었겠지.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367쪽)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고, 처음에는 다른 이들을 간병을 하다가도 결국 기증자로서 삶을 마치게 결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그런 사실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면 기꺼이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들은 어렴풋하게 그런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이 커서 하고 싶은 일을 고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그 시기의 우리에게 헤일셤 너머의 장소는 어디가 되었든 간에 환상 속의 세계와 흡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 세상에 대해, 그곳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당시 우리는 극히 막연한 개념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99쪽)'

캐시 H, 샤로트. F, 신시아 E 로 불리며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한 그들이 근원자를 찾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자가 어디선가 근사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가 복제되어 나온 근원자를 보게 되면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197쪽)'

배경음악처럼 등장하는 Judy Bridgewater의 'Never Let Me Go'라는 곡에서 따온 제목은 캐시가 갖고 있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그러면서 나는 평생에 걸쳐 간절하게 아기를 바랐으나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 여자는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면서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몹시 행복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아기가 병에 걸리거나 누군가 아기를 빼앗아 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다.(중략) 내게 있어서 그 노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105쪽)'

이런 캐시의 모습에 대해 마담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372쪽)' 라고 말한다.

제목이 풍기는 향기는 마담의 말과 일치한다. 어떻게 보면 또 자신의 현재 삶을 살 수 있게 기증자로 보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캐시는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만 ) 실제로 노래를 들어봤을 때는 담백할 것 같았는데 끈적해서 어리둥절했지만 뭐, 음악도 듣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받아들이는 루스나 토미, 캐시, 그리고 그밖의 많은 '학생'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장기이식과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오래도록 살기 위해 장기 이식을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자식들에게 나쁜 병이 있어서 복제인간의 장기를 가져와야 할 경우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고, 우리는 모두 그렇다면 눈 감고 그쪽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라는 답변들을 내놨다. 내 자식에 관한 것이라면 논리적, 윤리적 판단따위는 어디론가 급하게 사라져버린다. 이러니 우리는 평생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 온 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토미와 나는 한참 만에 처음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내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에밀리 선생님?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357쪽)

작품을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3년의 유예기간을 얻어 둘이서 행복하게 보낼 시간을 얻는다는 낭설을 굳게 믿은 것만큼이나 아픈 장면이다.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세상이 던진 시선이 너무 차가운 게 단번에 느껴진다. 복제인간의 영혼 유무를 따지는 너희들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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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리마스터판)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세랑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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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피프티 피플

◎ 지은이 : 정세랑

◎ 펴낸곳 : 창비

◎ 2023년 6월 8일, 개정판 13쇄, 488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2016년 1월부터 창비 블로그에 연재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정확하게는 51명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책. 각자도생하는 듯 보이지만 서로 얽혀있는 인연들을 볼 수 있다. 하나하나의 삶이 펼쳐진 뒤 마지막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조우하고, 화재를 피해 살아남는다.

정확히 네모반듯하게 잘라서 50명을 넣어 둔 그런 아파트가 떠오른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뒤 스르륵 문을 잠그고 들어가면 또 다른 인물이 옆집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혼자인 듯 싶은 모두에게는 가느다란 줄이 연결되어 작가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발을 들어 척척 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이게 이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주인공이 많은 책이라고 하면 나는 제일 먼저 제임스 헤리엇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수의사인 헤리엇을 찾은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인데 만나자마자 반한 경우로 의사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나?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각 장마다 바뀌는 화자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신선한 즐거움을 맛본 책이다. 그런 까닭에 화자가 많은 책이 내게 감동을 주려면 뭔가가 더 필요했다.

여기 등장하는 화자들은 직업군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 역시 각자 다른 색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다들 자기 말만 하고 들어가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사건들에 교묘히 그물을 얽어 동선이 겹치게 하느라 고생은 좀 했겠지만 그것도 그리 새로울 건 없다.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역시 창비블로그에 연재한 글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독성은 좋다. 너무 쉽게 읽혀서 싱거울 정도랄까.)

어디에 계시거나 마땅히 누려야 할 안전 속에 계시길 바랍니다.

단단한 곳에 함께 서서야 그 다음이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처럼 믿고 있습니다.

-새로 쓴 작가의 말 중에서, 485쪽

고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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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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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지은이 : 김연수

◎ 펴낸곳 : 레제

◎ 2023년 7월 3일, 1판 2쇄, 30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그날의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

그런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들이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됐다.

작가의 말 중에서. 297쪽

그런 연유일까?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삶 속으로 스며들거나 거기서 배어나온 느낌이 들었다. 다 겪었던 일일 것만 같다. (심지어 화자가 여자일 때도!) 이런 게 능력이고 연륜이겠지. 읽어가면서 음악을 듣는 기분이 들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야 낭독을 위한 글들이어서 그랬구나 싶은 찰나 뒷편에 '너무나 많은 여름이_플레이 리스트'라는 게 보인다. (여기에 이르면 딱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먼 북소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 책은 음악과 와인이 빠지면 섭하거든. )




바로 옆 쪽에는 2021년 10월 제주 '어나더페이지'부터 2023년 6월 창원 '주 책방'까지 낭독회가 열린 서점, 도서관이 나열되어 있다. 아, 인천 연수도서관에서도 했구나. 가볼 걸 그랬네. 아쉬워라. 이래서 인생은 늘 타이밍이 중요하다니까. 4월 11일의 나는 무얼 하느라 이것도 놓쳤을까?

그 아래엔 큐알코드를 따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까지 되어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안 그래도 대부분 생소한 이 음악들은 어떤 느낌일까 했는데...(지금 그 음악들을 연속으로 틀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하니 또 내가 낭독회의 작고 불편한 의자에 몸을 부려놓고 그의 글을 듣는 것만 같다.)

여기 실린 20편은 아주 짧거나 비교적 덜 짧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손바닥동화' 같기도 한데 장편을 선호하는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이 단편들을 읽은 이유를 딱 하나만 대라면 말없이 이 문장들을 들이밀 테다. 이것은 또한 작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도 이제는 교대해줄 수 없는 존재들 <두번째 밤> 9쪽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때 세상에는 지혜가 가장 흔해진다. <두번째 밤> 14쪽

-그렇게 서너 번 달이 차올랐다가 다시 이지러지는 동안 그는 감각적으로 다소 묵음의 상태였기 때문에 세상으로 향한 문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사이에> 69쪽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사이에> 79쪽

-어색하기만 했던 행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토키도키 유키> 204쪽

스무 편의 글들이 깔끔하게 모이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그룹으로 묶어보자면,

떠나기, 돌아오기

다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간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건 아주 오래된 장치지만 그것만큼 또 인생을 잘 나타낸 것도 없을 테니까. 엄마의 죽음 뒤,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 보았을 툴루즈로 간 뒤에야 이별한 '너'를놓아줄 수 있게 되는 <그 사이에>, 이상에 대한 소설을 쓰는 내게 유고집을 건네준 김충식에 의해 이상이 죽은 뒤 화장된 곳이라는 우구이스다니를 보러가는 <우리들의 섀도잉>, 사진작가 이진혁에 의해 알게 된 경주 팔복서점. 아들을 사고로 잃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주인 할머니 서지희의 사연까지 끌어온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신혼여행지로 고른 겨울의 홋카이도, 불안정한 행복을 느끼던 그들이 그곳에서 들었던 '때때로 눈'이라는 '토키도키 유키'라는 말을 아이에게서 들으며 비로소 안정이 되는 <토키도키 유키>

기억과 추억소환

영화배우였던 엄마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찾아가는 <첫 여름>, 죽은 반려견 궁금이와의 추억이 깃든 나무가 재개발로 사라진다는 얘길 듣고 다시 떠올린 기억들. '이 나무의 이름은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입니다.' <나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불러온 기억과 그 기억 속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주인공, 그러나 그녀는 나오지 못하고 그녀와의 추억만을 떠올린다. 그녀는 죽은 걸까? <풍화에 대하여>, 추워지기 시작한 무렵, 호텔 프런트에 근무하는 내 앞에 나타나 신혼여행 때 묵었던 전평호텔을 찾는 노인. 직원휴게소에서 자게 한 덕분에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을 보내게 한 <보일러>

사랑, 그리고 계속 살아가기

죽음을 기다리는 폭격이 뒤덮은 도시에서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알려주며 그러므로 세상은 다시 만들어질 거라고 희망을 주는 <두번째 밤>, 아내와 사별후 다시 깨어난 코메디언 신기철이 작가가 되기까지 일을 인터뷰 형식으로 쓴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조기축구회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다가 동맥이 파열된 기태. 세겹의 막 중 하나가 터져버려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그가 오래전 연인이었던 화영과 재회한 곳에서 '아직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했으나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생명이 연장된다는 <위험한 재회>, 마치 무릉도원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오랜 세월이 흘렀더라처럼 사랑에 빠져 순간을 영원처럼 살다가 남들에게는 스무 살, 스스로 인지하기엔 여든 살에 죽은 남자 이야기 <강에 뛰어든 물고기처럼>, 엄마의 임종과 나의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뭉뚱그려지는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인간답게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는 철학자들도 아직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산다. 그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지라도 답을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그 과정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모든 이야기는 이 해답으로 가는, 무수히 많은 길이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한 일들을 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등장하는 미야노와 이소노의 편지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편지는 "좋은 여름이 될 거야." "최고의 여름이 될 거야." 이들이 말하는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은 미야노가 죽고 난 뒤 여름이다. 삶이 끝난 뒤 남겨질 무수히 많은 여름을 행복하게 떠올리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죽은 뒤에도 아름다운 세상이길 바라는 마음이며, 죽음이 두려워 남아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보인다.

-지금 이순간, 기다릴 만한 것을 기다리기.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는 온몸으로 기뻐하기.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18쪽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른 불순물 없이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 45쪽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113쪽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풍화에 대하여> 143쪽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관계성의 물> 166쪽

-밖에서도 검게 칠하고 안에서도 검게 칠하면, 인간은 그 즉시 하찮아집니다.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를> 194쪽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 214쪽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262쪽

또 하나는 서점 이야기다. 경주 대릉원옆 포석로에 있다고 해서, 정말 있을 것만 같아서 찾아본 곳, 팔복서점이다. 아니, 있기를 바랐다고 하자. 그래서 내가 찾아갈 수 있도록 그곳에 있기를 바랐다. 서점 주인을 만나 따뜻한 차 한 잔도 건네고 말없이 천마총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도 있게. 그리고 '이 책방의 운영 방침은 두 가지야. 첫째,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름이 적히지 않은 소설에 이름을 적을 기회를 준다. 단, 이것은 오로지 선물이므로 팔지는 않는다. 둘째, 선물은 소유할 수 없으니 여기 꽂아두고 간다. <고작 한 뼘의 삶> 187쪽' 여기 등장하는 서점은 꿈속에서 작가들이 만나는 서점이다. 그곳에서 내 이름을 적으면 그게 바로 내 소설이 되는 것이다. 부럽기도 하지.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건져오는 겁니까?

나는 아우구스티누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을 한 번 더 읽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너무나 많은 여름이>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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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 - 3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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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토지 12 (3부 4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7쇄, 42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12권은 읽으면서 참으로 힘들었다. 내용은 11권이나 12권이나 흐름이 같은데도, 그걸 읽는 동안 내 곁을 지난 시간들이 서로 얼키고 설켜서, 보통의 경우 하루나 이틀이면 다 읽어버릴 것을 꽤 오래 잡고 있어야 했다.

-'누가 나를 묶었나, 내가 나를 묶었지! 풀어라! 풀어버리는 거야!' (중략) '이것은 사는 게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독이야. 이 집안에는 사방이 독버섯이다!' (309쪽)

나랑 비슷하네. 중얼거리던 부분이다. 남편 조용하와 후배인 홍성숙의 불륜 스캔들이 터진 뒤 명희의 마음이다. 모르던 일도 아닌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조하는 그녀에게 이상현은 편지로, 자신이 종종 글을 써서 발표를 할 터이니 그 원고료를 자신의 딸인 양현에게 보내주기를 희망한다. 외로운 그녀는 양현을 양녀로 맞이하고 싶어하지만 서희와 윤국, 그집 가솔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는 양현을 보는 순간 단념한다.

서희를 사모하던 박 의사도 결혼을 한다고 밝히고, 원치 않았지만 정윤과 결혼하게 된 소림도, 그동안 정윤의 학자금을 대주던 숙희도 모두 인연이 어긋나버린 외로운 이들이다. 용이는 마침내 세상을 등졌으며 그로 인해 홍이는 만주로 갈 계획을 세운다. 얼른 공노인 곁으로 가서 좀 편하게 살았음 싶다. 용이나 그의 아들 홍이나 왜 이리 짠한지 모르겠다.

-사람 살아가는 기이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검정과 흰빛으로 구벨 지을 수 없는 거이 인간사라. 길상이도 하인신세에서 만석꾼의 바깥주인이 됐는가 싶더마는 타국 땅에서 설한풍 맞이며 편한 사람 눈으로 볼 적에는 지랄 겉은 짓을 하고, 니는 반역자 성을 둔 덕분에 애국를 하게 됐이니 기기묘묘한 세상이지 머겠나. 옛날의 선비들은 악산(惡山)을 안 볼라꼬 부채로 얼굴을 가리믄서 지나갔다 하더라마는 그런 생각 때문에 나라가 망한 기라. 안 본다고 해서 악산이 거기 없는 거는 아닌께. 악산도 이용하기 나름이제. 또 군자 대로행이라 하기도 하더라만 법이 바르고 늑대가 없는 세상이라야제? 늑대한테 안 잽히묵힐라 카믄 두더지맨크로 땅 속으로 갈 수도 있는 기고 스스로 늑대노릇도 해야, 끝끝내 해야, 석이 맘도 내 알지러. 그놈의 성정은 군자대로행이거든. 허허헛…허허헛…조상과 자손과, 상놈과 양반과 부자와 빈자 그리고 또 인종들이 얽히고 설키서, (353쪽)

흠, 그렇다면 갈고 닦아야겠군. 나는 벌목꾼이요, 나는 미장이요,

자기 직능을 똑똑히 말 못할 만큼 자신이 없다면 그건 어딘가 잘못돼 있는 게야.

잘못 살고 있다는 얘기지.

170쪽

뜨끔하게 심장을 찌르던 말이다. 나는 잘못 살고 있구나,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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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다
클라라 뒤퐁-모노 지음, 이정은 옮김 / 필름(Feelm)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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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사라지지 않는다

◎ 지은이 : 클라라 뒤퐁-모노

◎ 옮긴이 : 이정은

◎ 펴낸곳 : 필름

◎ 2022년 10월 18일, 초판1쇄, 23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어느 날 어느 가족에게 부적응한 아이가 태어났다.

9쪽

다소 충격적인 첫 문장이다. 뒤를 이어,

'부적응하다'는 말은 품위가 떨어지는 추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흐느적거리는 몸, 고정되지 않는 텅빈 눈길이라는 현실을 말해준다. '망가졌다'는 단어는 부적절할 테고, '불완전하다'는 단어 역시 그럴 것이다. 그만큼 이 두 범주는 폐기 처분해야 마땅할 쓸모없는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부적응하다'는 말은 아이가 기능적인 틀(붙잡는 손, 걸어가는 다리)의 바깥에 존재하며, 다른 삶들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그 가장자리에 엄연히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9쪽)

아름답던 아이가 태어난지 석 달 뒤에 옹알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 울음, 미소, 찡그림, 한숨, 소스라침말고는 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 그리고 보지 못한다는 것과 목도 가누지 못하며 걸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부모의 마음을 감히 알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으리라. 그 무너지는 세상 속에 이 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해주는 화자는 특이하게도 집을 구성하고 있는 돌멩이들이다. 그들이 바라본 맏이와 누이와 막내의 이야기다.

섬세한 맏이는 부모보다 더 다정하게 아이를 보살펴주고, 부모가 아이를 위해 매번 정부와 싸우는 일을 본 뒤로 '어른이 되어서 장소에 상관없이 그 어떤 창구에도 다가갈 수 없었고, 서명을 하지도 못했고, 아무런 신청 용지도 작성할 수 없었다. 맏이는 자신의 신분증도, 계약도 갱신하지 않았으며, 단 1초라도 행정 업무를 보느니 차라리 벌금이나 추가 경비를 내는 편을 택 (56쪽)'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적응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맏이는 자기가 아이를 볼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도 아이가 숨을 쉬고 있으며, 아이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도 아파서 대응책을 만들어냈다. 그는 책 읽기를 완전히 그만두고 과학에 집중했다. 과학은 적어도 그를 아프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65쪽)

-그는 평온함을 잃었다. 그는 영영 멈추어 버린 어느 정지된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돌멩이가 되었는데, 이는 무감각해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며 움직이지 않음, 날이 흐름에 따라 철저하게 똑같음을 뜻한다. (82쪽)

-맏이는 걱정하는 마음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그는 영원히 맏이다. (89쪽)

둘째인 누이는 맏이와는 반대로 아이를 혐오했다. 자신에게 신경 써주지 않는 부모 대신 할머니와 애정을 나누었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반항하느라 온 힘을 다 써버린다. 그러다가 아이의 죽음 이후 의지를 상실한 부모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아이는 모든 힘을 빨아들였다. 부모와 맏이의 모든 힘을. 부모는 상황에 맞섰고, 맏이는 녹아들어버렸다. 그녀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떠받쳐 줄 힘은 전혀 없었다. (94쪽)

-그는 탄생과 늙음 사이 어딘가에서 멈추어버린 그 둘 사이의 존재, 어떤 오류였다. 말하지 못하고 몸짓도 눈길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 그래서 무방비한 존재였다. 아이는 열려있었다. 그런 취약함이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95쪽)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흘러 어른이 된 누이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어떤 아이가 아프면, 항상 다른 아이들도 잘 살펴야 해." (127쪽)

-치유되는 것은 곧 자신의 고통을 포기함을 뜻하는데, 아이는 바로 그 고통을 맏이의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치유되는 것은 곧 흔적을 잃는 것, 아이를 영영 잃음을 뜻했다. 누이는 이제 관계가 서로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전쟁은 어떤 관계다. 슬픔도 그렇다. (159쪽)

아이의 죽음 이후 태어난 막내는 막연하게 아이를 그리워한다.

-막내는 죽은 아이의 그림자와 함께 태어났다. 그 그림자가 막내의 삶을 휘갑쳤다. 막내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그 강요된 이중성에 반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그것을 제 삶에 통합시켰다. 장애를 지닌 어느 아이가 앞서 태어났고 열 살까지 살았다. 없는 사람들도 역시 가족의 일원이었다. (173쪽)

-그녀는 삶이 그리웠다는 듯 삶을 한껏 끌어안고 있다고 막내는 생각했고, 누이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말을 하는 사이사이 침묵을 두었다. --(중략)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두려워하지 ㅇ낳고도 사랑할 수 있고,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어줄 수 있으며, 위험이 닥칠 것을 기다리면서 두 주먹을 꽉 쥔 채 살아서는 안된다, 라고 누이는 말했다. 바로 이것이 그 사랑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고, 큰 오빠가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오빠는 포기했으니까, 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203쪽)

부활절 방학 중 어느 날 저녁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아픈 양을 들어 트럭에 싣는 일을 도와달라며 양치기가 찾아왔고, 그 양을 들어 옮기던 맏이는 그 양에게서 아이의 흔적을 찾는다. 막내는 한 번도 곁을 주지 않던 맏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으며 어머니는 휴대전화로 그 모습을 찍는다.

-아버지가 아내에게 몸을 기울여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 입은 아이 하나, 반항아 하나, 부적응한 아이 하나, 마법사 하나로군. 이만하게 잘 키웠네." 그들은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234쪽)

이제야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비로소 가족이 된 것 같은 모습이다. '막내는 마음속으로 아이를 '거의 나인 존재'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어떤 분신, 자기를 닮은 누군가라는 인상이 들었다. (184쪽)' 둘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막내와 아이가 아닐까. 자신때문에 분열이 된 가족을 다시 묶어주려 환생한 듯한 느낌이다. 혹은 쌍생아 중 하나가 늦게 태어난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등장인물 들에게 이름은 없다. 그저 맏이, 누이, 아이, 막내로만 불린다. 무수한 세월을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견뎌낸 돌멩이들에게 그들은 시간 속에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테니, 이름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그들이 태어난 순서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원서의 제목은 '적응'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적응하다(s'adapter)'이다. 적응은 이 소설에 나온 인물들이 취한 다양한 태도와 행위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한 일은 바로 적응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238쪽

가족 구성원 중 장애를 가진 이가 있을 때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지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매체를 통해 짧은 시간 속에서의 그들을 보았을 뿐이다. 거기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보다 딱 하루 뒤에 죽고 싶다던 부모들의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부모의 시선은 일부러 배제한 게 아닐까. 부모들은 대부분(절대적이진 않지만)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시선, 아픈 형제를 둔 아이들의 시선을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알리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돌멩이가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적당히 객관적인 이 시선들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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