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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의 연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노르망디가 어디에 있는지, 대략적인 지도상의 위치를 다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전쟁사를 좋아하는 나에게 노르망디는 중요한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노르망디는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 많이 나오는 배경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콜 오브 듀티> 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걸출한 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전장이었던 노르망디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전쟁이 주요 상황이겠지만, 주요 인물 간의 섬세한 인간관계, 행동, 심리 묘사 등을 주로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마다 프랑스 노르망디로 와서 여름을 보내던 폴란드 귀족 브로니츠키 가문의 딸 릴라와 우연히 만난 뤼도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소식이 끊긴다. 독일이 프랑스까지 침공하여 괴뢰 정부를 세우고, 뤼도는 레지스탕스가 되어 프랑스를 위해 싸우면서 애타게 릴라를 찾는데...
남녀 간의 사랑, 이별, 재회에 대한 희망 등이 소설의 전부일 거 같지만,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몰입감이 있다. 릴라의 오빠 타드, 브로니츠키의 양자 브뤼노, 릴라의 사촌이지만 프로이센인이 한스, 연 만들기와 날리기에 미친 앙브루와즈(뤼도의 삼촌이다.), 프랑스 요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뒤프라, 독일의 침공을 대비하는 유대인인자 책략가 쥘리 부인 등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는 거냐. 생각해보거라. 그 멋진 신사들과 아름다운 숙녀들이 옳아. 한 평생을 연에 바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광기가 있는 게 분명해. 다만 해석이 문제될 뿐이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숭고한 불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그 둘을 구분하기가 때론 어렵지. 하지만 네가 정말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너의 전부를 바치거라. 그리고 그 나머지엔 마음 쓰지 마라... (P.18)
4년 동안 기다린 뤼도에게 릴라는 왜 기다렸냐고 하니 뤼도는 이렇게 말한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20년도 지났으니 내 기억 속과 많이 다를 것이다. 아련하고, 희미한 느낌, 생각하면 미소를 짓게 하는 그 무엇인가의 느낌.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 느낌이 아닐 것이다. 결국, 다시 안 만나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말하니 슬프다.
- 때로는 누군가를 잊는 최고의 방법이 그 사람을 다시 보는 거라는 것 알아? (P.35)
홍역일지 모르는 병으로 아파하는 뤼도에게 다가와 빰에 입맞춤을 한 릴라를 걱정하는 뤼도에게 릴라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또 다른 정의이다.
- 병에 걸릴까봐 겁낸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P.54)
삼촌 앙브루아즈의 조언을 떠올렸다. "자기 연이 파랑을 좇아 달아나는 걸 막으려면 연줄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는 조언 말이다. 나는 너무 높은 곳을, 너무 먼 곳을 꿈꾸었다. 내가 살아야 할 것은 내 삶이지 릴라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유의 개념이 이렇게까지 엄밀하고 까다롭고 어려워 보인 적이 없었다. 삼촌이 종종 말했듯이 "의무교육"의 "희생양"이 된 플롸리 집안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알아서 나는 자유가 언제나 희생을 요구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자유에 대한 실습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P.137)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폴란드에 있는 릴라가 다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을 걱정하는 뤼도에게 삼촌이 하는 말이다.
사랑이 눈먼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너한테는 눈먼 상태가 어쩌면 세상을 보는 한 방식인지도 모르겠구나. (P.172)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소식이 끊긴 릴라를 다시 만났지만, 그녀는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뤼도의 기억 속에는 예전의 그녀가 남아 있었으니, 릴라는 뤼도의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을 뤼도가 지켜주기를 바랐다. 역시 다시 재회를 안 하는 것이 나았을까?
넌 나를 온전히 지켜주었어. 난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 이 모든 시간 동안, 3년 반이나 내가 여기 네 집에 무사히 있었다는 느낌이 들어. 온전히 말이야. 그렇게 나를 지켜줘. 뤼도. 난 그게 필요해. 내게 시간을 조금 더 줘. 난 다시 날 추스릴 필요가 있어. (P.306)
나는 앙드레 트로크메 목사와 르 샹봉 쉬르 리뇽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쓰면서 이 이야기를 마침내 끝내려 한다. 더 잘 말할 수는 없겠기에. (P.425)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더 잘 말할 수는 없겠기에." 이 글을 읽고, 멋이 있는 끝맺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뒤 로맹 가리는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그가 죽기 직전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노르망디의 연> 소설에서 전쟁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던 그가 왜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의 말대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더 좋은 소설을 쓸 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의 기쁨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알베르 카뮈만큼 로맹 가리의 죽음이 안타깝다.
2020.09.28 Ex. Libris HJK
앙브루아즈 플뢰리의 작품들이 전시된 클레리의 작은 박물관은 오늘날에 보잘것없는 관광지에 불과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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